역할

주요 역할은 경기 종료가 임박한 시점에 팀이 이기고 있을때 구원 등판해 마지막 27번째 아웃을 잡을 때까지 던지는 것으로, 주로 경기가 3점차 이내의 접전인 상황에서 팀의 승리를 최종적으로 지키기 위해 등판하는 것이다.


사실 투수의 보직 개념이 희박했던 초창기 야구에서 불펜 투수라는 것은 선발 투수가 되지 못한 2진급으로 선발 투수가 경기를 마치지 못했을 때 남은 이닝을 처리해주는 잔업처리반의 역할이 강했다. 어떤 시기 어떤 나라의 야구건 가장 잘하는 투수가 많은 이닝을 던지는 것이 당연한 만큼, 선발투수가 투수 운영의 중심이 되고 선발투수가 무너지는 상황, 즉 정해진 시기란 게 없이 선발이 빵꾸가 나면 투입되는 형식이다. 


야구가 점차 체계적으로 진화하고 타자들의 상향 평준화가 일어나면서 점점 선발 투수만으로 게임을 이끌어나가기 어렵게 되자 그때부터 경기 중반부터 마지막을 책임지는 전문 불펜투수라는 개념을 생각했고, 야구사 전문가인 빌 제임스는 현대 마무리 투수의 개념을 처음 정립한 투수로 워싱턴 세네터스의 퍼포 마버리라는 선수를 꼽으며, 1930년대 뉴욕 양키스의 쟈니 머피라는 투수를 최초의 전문 마무리 투수로 보고 있다.


이렇게 몇몇 팀이 시도하던 전문 마무리 투수 개념은 1940년대쯤부터는 모든 팀이 사용하는 전략이 되었고, 이들에 대한 관심과 체계적 관리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비공식적으로 1950년대부터 세이브라는 기록이 생겨났고, 1969년도에는 정식으로 MLB 공인 기록이 되면서 마무리 투수가 선발 투수와 다른 별도의 보직으로 독립했다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9회 세이브 요건이 충족될 때만 등판하지만 7회나 8회라도 긴급 위기 상황에서는 등판하기도 한다. 불펜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투수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출장시 2이닝, 투구수 기준으로는 30개 이상을 넘겨 던지는 경우는 별로 없다. 아니 그래서는 안된다. 이기는 경기라면 매번 출장 준비를 하는 마무리를 혹사시키면 언젠가는 탈이 나기 때문이라 정작 중요할 때 써먹지 못하기 때문이다. 단, 포스트시즌에서는 7~8회부터 굴리는 경우가 많기는 하다.


메이저리그에서도 세이브가 공식기록으로 인정받은 1969년 이후부터 1990년대 초반, KBO에서는 2000년대 초중반까지 중간계투가 약한 팀은 마무리를 7~8회 등 비교적 일찍 올리기도 했다.


롤리 핑거스, 구스 고시지, 브루스 수터같은 1970~1980년대의 전문 불펜투수도 그랬고, 1993년 이후 부상으로 선발투수 출전이 불가능했던 선동열의 경우 해태에서 마무리를 뛸 때 5회 넘으면 올라오곤 했다. 구대성이나 임창용 역시 중무리 투수로 자주 등판했다.


이는 프로야구의 수준이 낙후되어 A급 선수와 B,C급 선수들 실력격차가 컸던 1980, 1990년대에서나 가능한 거지. 점점 상향평준화되는 현대야구에서 마무리를 이렇게 쓰는 건 한두 해 던지게 하고 은퇴시키겠다는 이야기다. 진필중은 OB 베어스 시절 너무 혹사당해 전성기가 오래가지 못했다. 구대성, 임창용처럼 말도 안되는 연투 능력을 보여준 투수도 있긴 하지만 이들도 꾸준하게 1,2점대 압도적인 불펜투수였던 경우는 없었다. 천하의 선동열조차 결국 부상으로 푹 쉬고 나서 1이닝 마무리로 완전 전업했다.


따라서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동점인 경우도 아니고 1~3점차로 박빙으로 이기는 상황에서만 투입되는게 정석이다. 지고 있는 상황에서는 몸도 풀지 않는게 보통. 가끔 관리 차원에서 다른 불펜투수와 달리 투구감각 관리목적으로 등판시키는 사례도 많다. 그래서 '마무리 투수들은 치사하다. 동료들이 실컷 고생한 다음에 막타친다. 마무리 투수라는 보직은 필요없다'는 말도 나온다. 물론 그 뒤에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다만 모든 정석이 그렇듯이 저 정석에도 예외가 있다. 9회말이 시작되는 순간, 즉 9회초가 끝났을 때 홈팀이 비기거나 지고 있을 때는 더이상 그 경기에서 홈팀에게는 마무리 투수가 필요 없다. 자기들이 점수를 뽑아서 앞서는 순간 그대로 끝내기가 되므로. 따라서 9회말에 동점이 되어 경기가 연장으로 넘어가게 되면 홈팀의 마무리 투수는 그냥 한 명의 불펜 투수로 바뀌어 비기거나 지는 상황에서도 투입되는 것이 정상이다. 보통 이쯤되면 이미 불펜진의 소모가 커서 그 상황에서 올릴 수 있는 투수가 마무리밖에 없는 경우도 많고, 그게 아니라 하더라도 어설픈 불펜 올려서 실점하느니, 마무리를 올려서 일단 한 이닝을 확실하게 틀어막고, 뒤이은 말 공격에서 득점을 노리는 작전이 최상일 수도 있다. 이 경우에도 팀이나 투수의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은 마무리 투수에게 1이닝 정도만 막도록 한다. 하지만 오히려 메이저리그에서는 이때 마무리에게 2이닝 이상을 맡기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은 애당초 선수층이 두껍고 육성능력이 좋다보니 마무리 투수에 대한 위상이 낮다. 유망주때는 동일하게 선발 투수로 경쟁하다가 체력, 3rd피치등의 문제로 선발로는 좀 아닌 선수들을 전환하거나, 일부 유망주시절부터 전문 마무리였던 선수를 키워서 올리고 팀내에도 이런 기량의 선수들이 한두명 있는게 아니라 경쟁구도가 생기기 때문에 마무리 투수라고 무작정 귀족대우 받지 못한다. 그래도 MLB는 데니스 에커슬리가 MVP와 사이영상을 수상하고, 마리아노 리베라와 트레버 호프먼의 이름을 딴 상이 나올 정도. 하지만 호프먼이 명예의 전당 투표에서 첫 턴에 입성하지 못하면서 아직도 풀타임 구원투수에 대한 대우가 박한건 사실. 사이 영 상을 봐도 구원투수가 수상한 사례는 많지 않다. 그래도 이전보단 대우가 많이 높아진게 사실. 하지만 계투는 아직도 박하다.


반면 일본프로야구에선 '수호신'으로 불리며 마무리 투수의 위상이 높다. 단적으로 센트럴 리그 최고의 마무리 투수였던 후지카와 큐지나 이와세 히토키는 투수, 야수를 막론하고 4억엔이 넘는 세리그 최고 수준의 연봉을 받았고,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임창용도 한때 팀내 최고 연봉자였다. 또한 2013시즌 종료 후 삼성 라이온즈의 오승환이 2년 9억엔이라는 파격적인 대우로 한신 타이거스로 입단한 것도 NPB 내 특급 마무리의 위상을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예. 이는 2년 전 한국 최고의 타자였던 이대호가 오릭스 버팔로즈와 계약하면서 받은 2년 7억엔 대우를 아득히 뛰어넘는 것이다.


KBO리그는 일본보다도 선수층이 얕고 특히 근래 타고투저의 심화와 투수 양적 부족이 심각해져서 전체적으로 봤을때 불펜 위주의 투수운용임에도 하도 작가들이 많아서 찬밥 더운밥 가릴 것 없이 할 줄 알면 써먹고 봐야하기 때문에 마무리 투수라고 귀족 그런거 없다. 이때문에 마무리 아닌 상황에 마무리가 갈려나가거나 경기력 유지 실패로 부상이나 셋업강등을 당하는 등 마무리가 안정적이지 못하고 매년 마무리가 바뀌는 팀도 수두룩하다. 당장 하단에 언급된 2016년 각팀 클로저들 중에서 3년 연속 이상으로 두자리수 세이브를 올린 풀타임 마무리 투수가 손승락 고작 1명뿐이라는 점이 현시대 크보의 마무리 부재를 드러낸다. 


그래서 한국 야구에서 마무리 투수는 소위 롱런하기 힘든 보직이기도 하다. 그만큼 굴려지고, 또 분석을 당하기 때문에 수명이 짧다. 가장 오랫동안 마무리를 맡은 오승환 이외에는 1년 반짝하고 사라진 마무리 투수들이 수두룩하다. 심하면 롯데 자이언츠처럼 해마다 마무리가 갈리는 최악의 경우도 생긴다.(정대현,김사율,김성배,김승회 순으로 헤마다 갈렸다.)


외국인 선수제 도입후 가끔 전문 마무리 투수가 용병으로 오긴 했지만, 용병제도 개편 및 리그 환경으로 인해 2010년도 이후부터는 마무리 용병투수의 대는 끊어졌고, 만약 들여온대도 욕을 바가지로 쳐먹고 시즌 운용할 생각 있냐는 비아냥을 듣기 쉽다.대표적인 예가 바로 14시즌의 하이로 어센시오. 불펜이 뒤에서 1, 2위를 다투는 기아였지만, 어센시오 영입 당시 많은 이들이 왜 선발이 아닌 마무리를 데려오느냐는 불평이 많았다.


평가 기준


세이버메트릭스가 아닌 기존 전통적인 가치관에서 본다면, 마무리 투수들은 일단 경기 마무리라는 확실한 목적이 있기 때문에 세이브의 수가 많고, 블론세이브가 적어야 되는게 가장 중요하다. 비율 스탯이 나쁘더라도 일단 세이브가 많고 블론 세이브가 적으면 그럭저럭 양호한 마무리 투수로 평가한다. 하지만 비율스탯이 나쁘면서 세이브가 많고 블론 세이브가 적다는 이야기는 경기 운영도 운영이지만 운이 따라줘야 하는 이야기이고, 보통 비율스탯도 평균자책점이 2.5 이하, WHIP이 1.20 이하라면 훌륭한 마무리 투수로 평가한다. 


세이버메트릭스적 관점에서 본다면, 사실 '세이브'는 매우 객관적이지 않은 스탯이기에 이걸로 마무리투수를 평가하는 건 의미가 없다. 스코어 2:1 상황에서 나온 마무리 투수가 삼진 두 개를 잡아놓고도 솔로포를 맞아 1점을 허용해서 경기가 연장으로 흘러간다면 세이브는 사라진다. 하지만 3:0 상황에서 나온 투수가 솔로포 두 방을 맞고 2점을 허용하고 안타, 볼넷, 볼넷을 허용해 무사 만루까지 만들어도 운좋게 삼중살 하나를 만들어 내 이닝을 마무리짓는다면 세이브는 올라간다. 물론 이는 극단적인 비교이긴 하지만, 그만큼 세이브가 투수의 능력을 세밀하고 객관적으로 볼 때에 적절한 스탯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는 선발 투수의 승패 기록과도 똑같다.


세이버 관점에서 본다면 뛰어난 마무리 투수의 조건은 사실 뛰어난 선발투수와 크게 다를 게 없다. 많이 던질수 있고 삼진 많이 잡고, 볼넷 적게 주고, 홈런 적게 맞으면 된다. 다만 1이닝만 던지는 투수이기 때문에 6~7이닝을 던지는 선발 투수에게 요구되는 것보다 절대적인 기준 자체는 높다. 단적인 예로 2013년 메이저리그 기준 뛰어난 마무리 투수들은 평균자책점이나 FIP나 모두 1점대였다. 또한 포스트시즌같은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지치지 않고 던질수 있는 체력을 가진 마무리라면 초특급으로 분류할 수 있다.


마무리로서는 어떤 상황에서건 아웃을 잡아야 하기 때문에 높은 탈삼진 능력이 요구되고, 특히 실력도 실력이지만 보통 2사 만루와 같은 절체절명의 위기에서도 상대 타선을 막아내야하는 보직이므로 중압감 따위 씹어먹는 강심장이 필수. 더불어 한 경기를 시원하게 말아먹더라도 다음 경기에 다시 나와서 팀의 승리를 지키는 보직이므로 오만에 가까울 정도의 자기 신뢰 역시 필수로 아무나 맡을 수 없는 포지션이다. 잘하면 수호신, 못하면 방화범이라고 불리며 추앙과 추락은 종이 한 장 차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다시 말하지만, 다른 어떤 보직보다도 강철멘탈이 아주아주 중요하며 어찌보면 야구는 멘탈 스포츠라는 것을 가장 여실히 보여주는 포지션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셋업맨과 추격조가 받는 부담감의 차이보다 마무리와 셋업맨 간의 부담감 차이가 훨씬 더 크다고 한다.


그렇다보니 필승조에서 잘 던지던 투수, 구위를 앞세워 좋은 성적을 올리는 투수를 마무리로 낙점했는데 그 중압감을 견디지 못하고 성적이 바닥을 치는 경우도 종종 있다.그렇다고 해도 최고의 프라이머리 셋업맨이 마무리 투수로 정착하는 경우가 더 많다. 라이언 매드슨의 경우는 브래드 릿지가 부상으로 빠진 2011년 시즌 임시로 마무리를 맡아 괜찮게 막아냈다. 역대 최고의 마무리투수로 칭송받는는 마리아노 리베라 역시 마무리를 맡기 전 셋업맨으로 뛰었다.


마무리 투수는 현대 야구의 특성성 한 시즌에 50여 경기를 나와서 60이닝 내외를 소화하는게 일반적이며, 관리만 잘 해주면 한 명의 구원 투수만으로 충분하다. 거의 이런저런 이유때문에 9회만 맡기는 전담 마무리 투수를 두는 게 보통이다.


과거와 현재


과거에는 전성기가 지난 베테랑 선발이 마무리로 뛰다가 은퇴하는 형태였지만, 1990년대 중후반부터는 아예 데뷔 초부터 마무리로만 뛰는 투수들도 늘었다.


9회 마지막 한 이닝만 맡는 1이닝 마무리 개념을 최초로 정착시킨 사람은 토니 라 루사 감독이다.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에서 선발투수로 뛰다가 부상을 당해 불펜으로 간 데니스 에커슬리가 최초의 현대적 마무리 투수였는데, 토니 라 루사 감독은 선발 투수로써의 효용가치를 잃은 에커슬리를 마지막 이닝에 승리를 확정짓는 투수로 등판시키는 기용을 최초로 시도하여 루비콘 강을 건넜지만, 당시 사람들은 '다 이긴 게임 한 이닝만 등판해서 돈 받는 먹튀 투수' 라고 비꼬았다. 이건 팬들 뿐만이 아니라 타 구단 선수와 감독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언제나 처음은 힘든 것이지만 이 선택이 에커슬리의 사이영-MVP 독식으로 성공임이 입증되며 결국 너도나도 전문 1이닝 마무리 투수를 운용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여전히 메이저리그 기준으로는 상대적으로 야수나 선발투수에 비해 중요도가 떨어지는 불펜 투수에 불과함을 부정할 수 없다. 냉정히 말해 현대 메이저리그에서 불펜 투수는 선발 투수가 되려던 유망주가 선발 부적격 판정을 받고 향하게 되는 길이며, 마무리 투수는 개중 좀 나은 놈 일 뿐이다. 대학 야구나 마이너리그에서부터 불펜 내지는 마무리를 뛰고 처음부터 불펜으로 시작하는 유망주는 선발 투수가 되지 못하는 하자가 한 군데는 있는 선수다.


마무리 투수가 메이저리그에서 받는 대우를 명확히 보여주는 것은 역시 연봉. 2013년 기준 최고의 마무리 투수는 연봉이 1000~1100만불 선에 보통 2년, 길어야 3년 계약이다. 역사상 최고의 마무리 투수라는 마리아노 리베라 역시 3년 4,500만 불 정도의 계약을 따내는 정도였다. 뭐 조나단 파펠본에게 4년 4,800만 불 계약을 해 준 돌마로 같은 단장도 있긴 하지만 2013년 기준 메이저리그 평균 연봉 최고액은 클레이튼 커쇼의 연평균 3,000만 불이며, 소득 상위 125명의 평균 연봉은 1,410만 불인데, 마무리 투수는 올타임 넘버원이 되어야만 간신히 이 금액을 넘기게 되는 셈이다.


이렇게 메이저리그에서 마무리 - 정확히는 불펜이 - 천대받는 데에는 압도적인 인재풀에 기인한 감이 없지 않아 있다. 불펜 따위야 선발했다가 안 되는 유망주로 때워도 된다는 것. 그래서인지 메이저리그에는 '마무리 투수는 잘 나갈 때 팔아라' 라는 말까지 존재한다.


세이버메트릭스로 살펴본 마무리 투수의 중요성 역시 타 포지션에 비해 상당히 떨어진다. 2013년 기준 마무리 투수 중 WAR가 가장 높은 선수는 우에하라 고지의 3.3 이었으며, 2012년 역시 크레이그 킴브렐의 3.3 로 최고의, 정말 리그 원탑의 마무리 투수는 보통 이 정도의 승리 기여도를 기록하는데 이때 리그 최고의 선발 투수는 6.5~7.5 사이의 WAR 를, 최고의 야수는 8.0 수준의 WAR 를 기록한다. 때문에 세이머메트릭스나 비즈니스에 철저한 단장들일 수록 마무리 투수나 불펜에는 절대 큰 돈을 쓰지 않고 그때 그때 유망주로 때우거나 적당히 주워서 기용한다.


때문에 최상위권 라운드에서 전문 마무리 투수를 뽑는 팀은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다며 두고두고 까임거리가 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일단 선발로 키워보고, 안 되면 불펜으로 돌리고 그 중에서 잘하면 마무리로 승격시켜주는 게 훨씬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도 웬만한 1라운드 클로저 지명은 다른 선수들의 계약금에 더 쓰려는 의도가 아닌 이상 일단은 팬들이나 전문가들이나 까고 봤으며, 2009년 역사적인 1픽 스티븐 스트라스버그의 계약금을 마련하기 위해 다른 픽들은 계약금을 후려쳐야 했기에 10순위라는 역시 최상위권인 픽을 드류 스토렌에게 쓴 워싱턴 내셔널스 정도만이 1라운드에서 마무리를 고르고도 드래프트의 승자로 취급받은 바 있다.


그래도 세이버매트리션의 등장과 더불어 낮아지고 있는 마무리투수의 가치와 달리 시장가치는 굉장히 높은 역할이다. 매년 꾸준히 3선발급 성적을 찍는 선수가 분명 마무리 투수보다 가치가 높지만 8이닝 무실점으로 막은 투수도 못하는 경기를 마무리 하는 세레머니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팀이 우승할 때 마지막 공을 던지는건 팀의 에이스가 아닌 마무리 투수고, 포수와 맨 처음으로 껴안는 것도 마무리투수다. 그래서인지 선수의 절대적인 가치와는 달리 마무리투수가 팀의 상징적인 존재가 되거나 팀의 정신적 지주가 된다거나 하는 일은 꽤나 많다.


그래서인지 일본 프로야구에서는 사정이 약간 다르다. 일본 프로야구에서는 마무리 투수를 '수호신'이라 칭하며 수준급 마무리를 얻는데에 큰 돈을 들이길 마다하지 않는데, 엄밀히 말하자면 일본다운 비합리로 점철된 관습이다. 분명 2005년의 후지카와 큐지처럼 세이버메트릭스 기준으로도 마무리 투수가 웬만한 수준급 선발 투수 이상의 활약을 하는 비정상적인 일이 일본에서는 가끔 벌어진다. 하지만 그런 일이 자주 벌어지는 것은 아니며 애초에 후지카와 큐지부터가 2005년, 2006년을 제외하면 그런 초월적인 활약을 보여주진 못한다. 거기에 2005년의 활약은 사실 칭찬만 받을 게 아닌 게 등판 게임이 80경기에 소화 이닝이 92이닝이었다. 거기에 이런 예외를 제외하면 세이버메트릭스로 따져본 마무리 투수의 중요성은 일본 야구에서도 크게 다를 게 없다.

KBO에서는 MLB에 비해 경기수가 적고 선수층이 얇으며, 선수 육성에서 보직에 대한 개념이 미약하기 때문에 전문 마무리 투수, 아니 전문 선발 투수나 불펜 투수를 찾기가 어렵다. 이틀 전 선발로 던졌어도 나가랄 때는 나가는 것이 투수의 숙명이다 대부분의 성공적 전문 마무리는 선발 투수가 불가능한 투수다. 그래서 충분히 오래 던질 수 있는 선발타입의 투수임에도 불구하고 3선발급 투수에게 마무리 보직을 주는 경우가 더 많다. 기량이 좋은데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전업 마무리 또는 불펜으로 시작하는 경우는 공을 많이 던질수록 구속이나 구위가 떨어져서 선발로는 쓸 수 없는 경우가 보통이다.


좌타에 비교적 약한 언더핸드 및 사이드암 투수나 경험이 많지만 체력적인 문제로 오랜 이닝을 던지지 못하는 경우에도 마무리를 맡긴다. 단 좌투수 마무리가 거의 없는 만큼 이쪽도 위험성 때문에 롱런하기 힘들다. 애초에 좌투에 구위가 위력적이라면 웬만한 경우가 아니라면 당장 선발로 먼저 돌리는 게 정상이다는 모 돌감독은 마무리로 돌린다. 


특징


마무리 투수에게 요구되는 최고의 덕목 중 하나는 높은 삼진율, 낮은 인플레이 유도다. 아무리 땅볼 유도, 플라이볼 유도를 잘하는 투수의 공이라 할 지라도 타자가 공을 인플레이시키면 공은 둥글어 어디로 날아갈지 모르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변수가 늘어난다. 제대로 유도했다고 한 타구가 행운의 안타가 될 수도 있고, 에러가 나올 수도 있고, 내야 안타가 나올 수도 있다. BABIP이라는 스탯을 알게 되면 더더욱 이 이야기가 잘 와닿는다. 때문에 한 이닝을 확실히 책임져야 하는 마무리 투수는 변수를 최대한 없애기 위해 삼진을 많이 잡는 게 최고의 미덕이다. 


그래서 제구력이 좋거나 다양한 변화구를 던질 수 있는 투수(Finesse Pitcher)보다는 오래 던지지는 못하고 보유 구종이 적더라도 강력한 구위를 가지고 있는 투수(Power Pitcher)가 많다. 가지고 있는 구종이 적으면 확실히 다음 타순일 때 타자들이 쉽게 공략을 하기 때문에 맞아나가겠지만, 마무리는 타순이 한바퀴 이상 돌일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돌면 끝장이다


때문에 강력한 구위의 패스트볼을 가진 파이어볼러의 비율이 높고, 마무리 투수라 하면 흔히들 강력한 강속구를 가진 선수를 떠올리기 마련이다. 활동하고 있는 선수들을 봐도 한국 야구에서는 오승환, 손승락 등이 그렇고 메이저리그 역시 크레이그 킴브럴, 아롤디스 채프먼, 켄리 잰슨 등 파이어볼러 마무리들이 많다.


강속구 투수는 아니더라도 뛰어난 구위나 무브먼트를 가진 결정구가 있다면 마무리로써 맹활약 할 수 있다. 쩔어주는 역회전으로 인한 무브먼트로 구속을 메꾸는 평속 89 마일의 패스트볼과 스플리터를 구사하며 보스턴의 수호신으로 활약한 우에하라 고지, 무시무시한 각도의 슬라이더로 87마일 구속의 패스트볼을 가지고 있음에도 샌프란시스코의 뒷문을 걸어잠그는 서지오 로모, 어깨 수술 이후 강속구를 잃어버렸지만 특유의 팜볼 체인지업으로 타자들을 요리했던 트레버 호프만, 패스트 볼 구속은 86마일 대지만 패스트볼 제구와 뛰어난 구위의 체인지업, 슬라이더를 바탕으로 2004년 보스턴의 우승에도 기여한 키스 폴크, 2015년 한국 프로야구 최강의 마무리로 불리는 정우람 등이 그 예. 이런 투수들은 비록 구속은 느려도 심판의 스트라이크 존을 파고드는 칼같은 제구력과 상대의 헛스윙을 유도하는 위력적 결정구를 무기로 높은 삼진율을 기록하니 피네스 피처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피네스 타입의 마무리가 없었던 건 아니다. 한미일, 대만의 야구리그를 모두 경험한 타카츠 신고가 그 예. 타카츠는 메이저리그에서도 비록 한 시즌 뿐이지만 화이트삭스의 마무리를 했었는데 이 때에도 삼진율이 높은 편은 아니었다.


비록 마무리 보직을 오래 맡았던 것은 아니지만 브랜든 리그, 하비 게라, 짐 존슨과 같이 삼진율이 높지 않은 땅볼 유도형 투수들이 마무리를 보게 되는 경우가 2010년대 메이저리그에서 가끔 생겨나고 있다. 하지만 이 중 짐 존슨을 제외하면 나머지 둘은 결국 마무리를 보다가 팀에서 트레이드 되거나 다른 선수에게 자리를 빼앗겼으며 짐 존슨도 2년 연속 50 세이브를 돌파하긴 했지만 낮지 않았던 블론 세이브 숫자, 낮은 평균 자책점에 비해 낮지 않은 FIP 등을 이유로 볼티모어 오리올스에서 트레이드 됐다. 


메이저리그에서 유망주를 평가할 때, 패스트볼의 구위가 뛰어나지만 구종이 단조롭고 체력이 떨어지는 선수를 불펜 투수로 간주하며 이 중 뛰어난 선수가 프라이머리 셋업맨을 거치다 마무리 투수로 정착하는 것이 일상적이다. 가끔씩 마이너에서 선발 투수로 활동하다가 메이저로 올라가기 직전 불펜 투수로 전업하는 사례도 있는데, 팀 사정도 있지만 대체로 위의 이유로 선발 부적격 판정을 받는 경우가 많다. 마리아노 리베라를 비롯해 꽤 많은 선수들이 이런 식으로 선발에서 불펜으로 전업했다.


또한 위와 비슷한 이유로 마무리 투수는 우완 정통파를 선호한다. 좌완 투수나 언더핸드/사이드암 투수는 우완 정통파보다 좋은 구위의 투수를 찾기 어려우며, 좌투수 킬러 우타거포, 혹은 사이드암 킬러 좌타자등 대타 작전을 통한 스나이핑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마무리


일부 세이버메트리션들은 3점차로 앞서고 있는 9회에 불펜의 가장 강력한 투수를 투입하는 것 보다 7회나 8회쯤 1~2점 차의 박빙일때 마무리 투수를 일찍 투입하고, 9회에 불펜에서 2~3번째로 강력한 투수를 투입하여 마무리를 짓는것이 더 의미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따라서 7회나 8회 승부처에 가장 강력한 불펜을 투입하고 9회에는 그날그날 컨디션 좋은 투수가 던지게 하는 '집단 마무리 체제'를 도입하는 팀이 있다. 실제로 컨텐더급 팀이라면, 클로저에 못지 않은 최고의 기량을 가진 불펜투수가 중간에서 이닝을 많이 먹어주는게 매우 중요하다. 후술할 오승환과 손승락의 앞에서 뛰던 안지만과 조상우같은 선수가 1이닝을 무실점으로 막는다면, 실제로 경기내의 공헌도는 절대 클로저에 못지 않은 중요한 성과이다. 


하지만 야구는 사람이 하는 스포츠인지라 실제로 9회에 등판하는 투수가 받는 심리적인 중압감 및 스트레스는 상상을 초월한다. 때문에 연습할때는 차이가 안나도 박빙의 9회에서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투수는 흔치 않다. 또한 이때문에 내가 만약 털리더라도 더 잘하는 불펜투수가 뒤에 있다는걸 믿고 전력투구한다는 자신감때문에라도 중간계투와 클로저의 마인드 차이는 어느정도 존재한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문제는 돈이다. 특히 대다수의 불펜투수들이 한해 한해 먹고사는 비정규직인데 반해 메이저리그에서 마무리 투수는 불펜 투수들 중에서도 이기는 상황에만 등판하며 팀의 투수진 플랜에 들어가 이닝및 휴식일 관리를 받는 유일한 정규직이기 때문에, 마무리 투수가 되느냐 마느냐는 아무리 뛰어난 투수라도 자신의 선수 생명과 고액 연봉에 중요한 기로가 된다. 그래서 아무리 구위 좋은 특급 계투들이 즐비해서 서열을 정하기 힘들더라도 계투들의 동기 부여를 위해 마무리 투수를 확정하는 경우가 많다.


상대적으로 미국야구에 비해 보류조항이 강력하고, 감독과 코치의 권위가 현장에서 중시되며 미국야구처럼 손쉽게 전문 불펜투수를 구하기 힘든 환경인 동양 야구가 집단 마무리 시스템을 쓰기가 좋은 편. 일본의 경우는 더욱 독특한 환경이라 9회 등판하는 클로저와 상관없이 수호신으로 인정받는 계투가 따로 있는 경우도 많다. JFK시절의 후지카와 큐지, 2011년 센트럴리그 MVP인 아사오 타쿠야의 경우는 클로저가 아님에도 팀내 위상이 클로저보다 높았던 특이 케이스. 반면 MLB에서 집단 마무리 체제는 팀 내에 확실한 마무리 투수가 없을 때 어쩔 수 없이 도입하는 경우가 많고 현대 야구의 투수 분업화 시스템은 집단 마무리의 개념을 상당부분 차용하고 있다. 2004년의 오클랜드 어슬레틱스(옥타비오 도텔, 짐 메시어, 채드 브래드포드)나 2005년의 시카고 화이트삭스(바비 젱크스, 더스틴 허만슨, 네이트 코츠 등)이 대표적인 경우다.


더블 스토퍼 체제라 하여 믿을만한 마무리 투수가 없는 팀에서는 두 명의 마무리 투수를 두는 경우가 있다. 상황에 따라 둘 중 한 명을 세이브 상황에 투입하는 체제로, 레너드 코퍼드는 <야구란 무엇인가>(The New Thinking Fan's Guide to Baseball)라는 책에서 좌완/우완 두 명의 마무리 투수를 대기시키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말한다. 마무리급 좌완 투수가 흔하지 않은 현실상 KBO는 물론, MLB나 NPB에서도 흔하지 않은 투수 운용이다. 실제로 이게 가능한 팀은 정반대로 특급 마무리가 좌/우 둘이라서 가능한 케이스 예를 들면 앤드류 밀러와 코디 앨런 두명의 특급 불펜 좌우 원투펀치로 밀어붙였던 2016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가 그렇다.


KBO에서는 불펜이 약한 팀에서 더블 스토퍼 체제를 쓰는 경우가 있다. 프라이머리 셋업맨과 클로저의 구분 없이 위기상황이 생기면 7, 8회라도 아웃 카운트 한 두 개를 잡기 위해 릴리프 에이스를 먼저 투입하고 다른 한 명에게 9회를 맡기는 경우가 있으며, 릴리프 에이스가 너무 자주 등판하거나 하면 또 다른 한 명이 대신 9회에 투입하고 게임이 연장까지 이어질 경우 다른 한 명이 대비하고 있는 것이다.


졸판왕?


어느 리그나 마무리 투수가 불펜 에이스 취급받는건 당연하지만, 한국은 일본리그 영향+리그의 환경때문에 세이브 상황이 아니라도 언제든지 위기 때 구원등판해서 무실점으로 막아주는 것을 마무리의 덕목으로 꼽는다. 실제로 투수 분업이 되어있는 현대 야구에서 마무리 투수는 마지막 이닝 세이브 상황 때 등판하여 안정적으로 경기를 끝내는 것을 의미하지만 이상하게도 한국의 야구팬들은 그것을 용납치 않는다. 대표적으로 2011, 2012시즌 때 오승환이 세이브 상황이 아닐 때는 등판을 하지 않는다 하여 '졸렬한 끝판왕'이라 하여 졸판왕이라고 조롱을 해 댔다.


그 때문에 2012년 시즌 기준으로 50경기 55⅔이닝 2승 1패 37세이브 평균자책점 1.94의 오승환보다 53경기 50⅓이닝 3승 2패 33세이브 평균자책점 2.15의 손승락이 야구팬들에게서 더 높은 평가를 받는 일도 생겼다. 손승락은 당시 넥센 히어로즈의 열악한 불펜 사정상 세이브 상황이 아닌 박빙의 동점 상황에서도 등판하는 일이 있었고, 불펜이 튼튼한 삼성 라이온즈는 정말 어지간히 중요한 경기가 아닌 이상에는 굳이 오승환을 올릴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오승환은 그대로 벤치에서 대기 중이었던 장면이 많이 잡혔다. 이 때문에 '야갤'에서는 손승락이 동점 상황에 등판할 때마다 '역시 팀을 생각하는 갓승락니뮤ㅠㅠ 졸판왕과는 차원이 다름!' 이라고 후빨을 하는 지경이었다.


야갤 구성원의 대다수는 야빠, 그것도 이미 라이트 팬의 수준은 넘어선 이들이 대부분이며, 당연히 적어도 2012년의 오승환과 손승락 중 누가 더 나은 마무리 투수인가 정도는 다들 알고 있다. 그러니까 진심으로 손승락이 오승환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우승팀의 클로저인 오승환을 까기 위해서 억지로 손승락을 찬양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기록상으로도 드러나듯 출전 경기수도 달랑 3경기 차이에, 오승환이 더 많은 이닝을 던졌고 기록도 더 좋다.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실제로 전문 마무리 투수는 '공무원급 야구선수'라는 조롱과는 달리 육체적, 정신적 스트레스가 매우 심한 보직 중 하나다. 9회 이기는 경기 3점차 내 등판이라는게 다른 중간계투보다는 정규직에 가까운 환경일 뿐, 마무리 투수도 언제 자기가 등판할지 모르는 비정규직인건 다를바 없다. 심하면 1주일에 6경기 모두 등판을 해야 할 수도 있고, 1주일간 공 한번 못만져보고 퇴근 할 수도 있다. 또한, 마무리 투수라고 컨디션 기복이란게 없는 기계일리가 없다. 몸상태 좋고 촥촥 긁힐때 나올 기회가 없어서 좋은 컨디션을 날리는가 하면, 감기몸살로 몸상태가 말이 아닌데 믿을맨이 자기 혼자 뿐이면 하늘이 노래보여도 나가서 상대타자를 맞닥트려야 한다. 


분명히 알아둬야 할 점은 마무리 투수라는 선수가 그렇게 마구잡이로 올라오는 건 결국 ' 우리팀 불펜 매우 약함 ㅋ 그래서 얘까지 막 올려야 함 ㅋ '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일반 야구팬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장면만을 기억하니 졸판왕 졸판왕 할 수밖에 없다. 졸판왕 소리 듣던 오승환의 소속팀인 삼성 라이온즈는 '당시 불펜이 튼튼했기에 굳이 오승환까지 마구잡이로 올려야 할 필요가 거의 없었고', 팀을 위한다는 손승락은 사실 말이 좋아 팀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었지, 정확히 보면 제 몸을 갉아먹어가며 무리해서 등판을 했던 것이다. 즉, 선수들의 희생정신이 누군 투철하고 누군 아니었던 것이 아니라 삼성 라이온즈의 불펜은 오승환까지 마구잡이로 올릴 필요가 없는 안정된 불펜이었던 반면 넥센 히어로즈의 불펜은 손승락까지 마구잡이로 올려야만 겨우 이어갈 수 있는 약한 불펜이었다는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이는 스케줄이 한국보다 훨씬 타이트한 미국도 마찬가지여서, 역사상 최고의 클로저로 명성이 높던 마리아노 리베라도 절대 정규시즌에는 2이닝 마무리를 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불펜 혹사로 악명이 높은 조 토레감독 밑에서 활동했을때도, 정규시즌에는 최대한 8회 등판을 자제했고 1이닝으로 끊었다. 그렇게 정규시즌에 체력을 관리한 다음 단기전에 돌입해서야 봉인을 풀고 2이닝씩 던지는 철벽 마무리로 군림했던 것. 오승환 역시도 정규시즌에는 최대 1.2이닝을 절대 초과하지 않았고 대부분 9회에만 등판했으나 2013년 한국시리즈 2차전에선 4이닝을 던지고 이틀 후에 1점차 세이브를 거두는가 하면 2014년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도 세이브를 거둔 다음날 3이닝을 던졌다.

지금까지의 역사


한국과 독일은 1883년 조선전권대사인 민영목과 주(駐) 일본 총영사인 자페 간의 '한독 수호통상조약' 을 통해 공식적으로 외교관계를 맺었으며 1884년 한양에 한옥으로 된 주(駐)조선 독일 총영사관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외교관계가 단절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중화민국 상하이에 있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일본 제국 이하 나치 독일, 이탈리아 왕국 등 추축국에 선전포고하면서 잠시 적대관계가 되기도 했다.


종전 후 연합국에 의해 독일은 동서(東西)로, 한국은 남북(南北)으로 분단되면서, 1949년에는 북한이 동독과, 1955년에는 대한민국이 서독과 외교관계를 맺었다. 1990년 10월에 동서독이 통일되자, 통일 독일은 대한민국과는 외교관계를 지속하였으나 북한은 일반대표급으로 격하시켰다가 2001년에 외교관계를 복원했다.


역사적 비교


적지 않은 한국인들이 이념 대립으로 인한 분단의 비극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독일의 역사에 동질감을 느끼곤 한다. 그러나 한국과 독일이 비슷한 점은 현대사, 그것도 타의에 의한 분단이라는 사실 하나뿐이며, 기실 양국은 분단의 원인은 물론 역사적인 맥락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서 안티테제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상반되는 면모를 보인다. 굳이 한국을 유럽 국가에 대입한다면, 폴란드나 아일랜드 공화국과 유사점이 더 많은 편이다.


구조적으로 봤을 때, 한국과 독일이 비슷한 점은 제조업이 강하고 수출 지향적이며 저출산 고령화라는 도전을 안고 있는 점 등을 꼽을 수 있다.


한편, 위의 서술에 대한 추가 의견으로 현대사에서 한국과 독일은 많은 지정학적 동질성을 공유하고 있다. 각각 동아시아와 유럽에서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이 만나는 관문에 위치했으며, 이 때문에 냉전시기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병존하는 분단의 역사를 공유하게 된 것이다. 

또한 둘 모두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끝과 서쪽끝에서 역사적으로 나름의 생존 능력을 발휘하면서 하나의 독특한 세력권과 문화를 갖춘 국가의 모습으로 살아남았고, 단일 민족에 대한 자긍심(비록 환상이지만)을 지니고 살고 있다.

더불어 두 민족 모두 전통적으로는 기록을 중시한 민족이라는 점, 현대에 와서는 제조업을 국가의 핵심 산업으로 생각한다는 점도 상당히 닮은 점이다.

더 나아가 바다로 나가는 길목을 왕이 다스리는 섬나라들이 막고 있으며, 속한 지역의 자본시장 역시 그 섬나라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는 점도 닮았다. 반대로 대륙으로 나가는 길은 공산주의 세력에 의해 막혀있다.


여담으로 근대사적 상처를 하나 더 공유하고 있는데 바로 중앙아시아 이주민 문제다. 각각 고려인과 볼가 독일인으로 불리는 이주민들은 정치적 문제로 소련 정부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이주되어 척박한 토지를 개간하거나 농사를 짓는 노동력으로 이용되었다. 현재는 각각 50만명, 80만명 정도가 러시아 중부,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지에서 각자의 문화에 러시아 문화가 혼합된 문화를 보존하며 살고 있다.


한국인이 보는 독일은?


일반적으로 한국인들은 독일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를 자동차, 맥주, 베토벤이나 바흐, 환경 등을 얘기하고, 독일의 덕목으로 근면성, 효율성, 강한 조직을 꼽는다.


한국이 과거사 문제로 옆나라와 끊임없는 갈등을 빚고 있어서인지, 한국인들은 대체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잘못된 행적을 분명히 인식하는 독일의 태도에 매우 호의적이다. 때문에 많은 한국인들이 일본더러 독일을 반만 닮아보라고 충고를 빙자한 욕설을하기도 한다.


그러나 보편적인 인식과는 달리, 독일의 과거사 반성은 주로 나치 독일 시절의 침략전쟁 및 전쟁범죄에만 국한되어 있으며, 일본이나 다른 유럽 식민제국들처럼 식민지에 대한 수탈을 나몰라라 하는 것은 크게 다를 바 없다. 심지어 그 전쟁범죄조차도 미국을 등에 업은 이스라엘의 주류 민족인 유대인 대상 홀로코스트, 그리고 폴란드나 러시아 등 외교관계를 관리할 필요가 있는 국가들에 한하여 배상하고 있을 뿐, 동유럽의 약소국이나 나라 없는 집시들의 피해에 대해서는 알지도,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순전히 식민지 문제만 놓고 보면, 그나마 무라야마 담화나 고노 담화처럼 여러 차례 사과를 표명했었고 한일기본조약으로 공식적인 배상까지 했던 일본이 차라리 나아 보일 정도이다. 국제사회가 철저히 힘의 논리에 따라 움직인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동서분단 시절에는 남북분단으로 있는 한국과 동병상련이었기 때문에 서로 비슷해보였다. 독일인은 그리 생각지 않았겠지만 광부, 간호사 파견 등에서 보듯 한국은 독일의 경제성취(이른바 "라인강의 기적")를 부러워했고, 자국의 성취를 "한강의 기적"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동서로 갈라졌으면서도 유학생이 많았기 때문에 1960년대 1970년대를 전후해 북한과 접촉이 많아 납북, 망명, 간첩사건도 많았고 또 그를 이용해 독재정권을 공고하게 하려는 고문조작 간첩 사건(동백림 사건 등)도 많았다.


이후 통일이 되면서 한국에게 독일식 통일 모델은 가장 이상적이고도 전형적인 모델로 여겨졌다. 그러나 동서독 국경은 유럽의 휴전선이었으며, 동독은 자유 진영에 대한 공산권의 광고판이나 다름없었기에 소련으로부터 막대한 지원을 받았다. 게다가 공산주의의 발원지다운 사상적 배경과 양차대전을 일으켰을 정도의 국력이 합쳐졌기에, 적어도 아무것도 없었던 데다가 그나마 남아있던 공업단지도 자업자득이지만 한국전쟁으로 다 날려먹고 막장 독재자가 권력을 장악한 북한에 비하면 인권/경제 사정이 훨씬 나았다. 때문에 90년대와 2000년대 흡수통일의 후폭풍이 널리 보도되자, 서독과 동독의 차이에 비해서도 넘사벽인 경제적 부담 때문에 통일을 반대하는 분위기도 등장하였다. 


한편 현대 독일이 유럽의 정치·경제적 중심지인데다가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선진국이다 보니, 한국의 여러 문제점들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독일의 선진성을 농반진반으로 찬양하는 모습도 보인다. 여기에는 1인당 GDP, 인간개발지수, 민주주의지수, 부패인식지수, 언론자유지수 등 각종 통계에서 어지간한 선진국들마저 압도하는 독일의 위엄이나, 프로이센 시절부터 나치 독일을 거쳐 이어져오는 왠지 모를 기술 강국의 이미지, 그리고 프랑스나 영국 등 주변국들에 비해 여행객들에게 대체로 깔끔하고 잘 정돈된 듯한 느낌을 주는 거리 등 복합적인 요소가 작용하는 듯하다. 물론 어느 나라나 그렇듯이 빛이 있으면 어둠도 있는 법이니 좋은 건 보고 배우되 맹신할 필요는 없다. 


법학과, 행정학과 소속 교수들 중에는 독일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들어온 경우가 적지 않다. 심지어는 슈파이어 국립 행정대학원에서 박사를 받고 들어온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책에서 독일어가 많이 나오는 편이고, 책 정보-제목 등도 독일어로 기록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국내 과학계에서도 아무래도 미국 출신들이 대세이기는 하지만 20세기 과학의 성지답게 독일에서 유학한 연구자들이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한다. 특히 독일이 현대 유럽의 중심이니만큼, 입자물리학처럼 미국과 유럽이 경쟁하는 분야들에서는 독일의 지분이 상상외로 크다.


독일인이 보는 한국은?


19세기 말에는 서로 외교적인 접촉은 있었지만, 양국간의 국민적 인식은 거의 전무한 수준이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당시 독일(프로이센)은 보오전쟁, 보불전쟁 등을 거치며 이제야 통일 국가가 들어선 상황이었고, 조선은 각종 내우외환에 시달리느라 한반도에 별로 간섭할 의지도 능력도 없는 머나먼 유럽 국가에 관심을 둘 겨를이 없었다. 


특이사항으로는 1899년 하인리히 친왕이 대한제국을 방문하기도 했고, 독일 제국의 빌헬름 2세가 대한제국의 고종 황제를 Kaiser von Korea라 칭해 주었던 기록이 있지만, 그래봐야 외교적 수사에도 미치지 못하는, 그냥 그랬다더라 하는 수준의 이야기일 뿐, 구한말의 정세에 독일이 실질적으로 관여하지는 않았다. 당시 독일인들의 조선에 대한 인식은, 비유하자면 현대 한국인들이 저 멀리 아프리카나 남미의 별로 유명하지 않은 수교국 A에 대해 가지는 인식 정도였을 것이다.


정치인들을 제외한다면 독일에서 대중적으로 알려진 첫 한국인은 아마도 1936 베를린 올림픽 당시 한국인 금메달리스트였던 손기정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당시 한반도는 일제강점기를 겪고 있었기 때문에, 손기정의 소속은 일본 제국(정확히는 일본령(領) 조선)이었으며 세계인들도 당연히 한국인이 아닌 일본인으로 인식했을 것이다. 광복 후 한 공무원(혹은 의원)이 독일의 손기정 기념비에 기록된 국적을 바꾸려 시도하기도 했으나, 그런다고 공식 기록이 바뀌진 않았고 훼손죄로 처벌을 받았다. 현재 IOC 기록에선 일단 일본 선수로 기록하고, 손기정 선수에 대한 당시 조선의 상황 설명을 첨부하는 수준이다.


또한 2차 대전 패전 이후 서독에서는 1946년에 출판된 작가 이미륵의 소설 '압록강은 흐린다'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교과서에도 수록될 정도로 독일인들에게 호평을 받았다.


이후 축구선수 차범근이 분데스리가에 진출, 맹활약하며 독일 내에서 한국에 대한 인지도를 상당히 상승시켰다. 차붐의 등장으로 인해 한국이란 나라를 처음 알게 되었다는 반응이 대다수. 갈색 폭격기 차붐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던 차범근은 이후 분데스리가 전설의 반열에 오른다. 이런 차범근의 업적은 이후 한국 선수들의 독일 진출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실제로 그의 독일 내 위상은 말하면 입 아픈 수준이다. 항목 참조.


독일인들 가운데는 남북간의 분쟁이나 북한이 국제사회에 끼치는 악영향을 쌍방과실로 인지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는 동서독이 실제로 남북한과는 달리 냉전기에도 제법 상당히 활발하게 교류하였으며 동방정책으로 대표되는 관개개선 시도를 여러 차례 했던 전적이 있기 때문에, 남북한이 서로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상황이나 북한의 극한도발→남한의 강경반응→더 강한 도발로 이어지는 구조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쯤 보면 알겠지만 동독 입장에서 북한은 통계상으로 나타나는 경제력부터 지도층의 정신상태에 이르기까지 비교되는 것조차 실례인 국가이므로, 남북관계의 문제를 쌍방과실로 인지하는 건 양국의 서로 다른 역사적 경험에 기인한 오해에 가깝다고 봐야 한다. 


BBC 국가 영향 평가 여론조사에 따르면 한국이 세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가장 좋지 않은 평가를 내린 나라는 독일이라고 한다. 특히 다른 나라까지 와서 사업하면서 야근을 밥먹듯 시키는 한국의 골때리는 기업문화를 그들이 이해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위와 같은 이유도 있고 해서 혐한 수준이라고 보긴 어렵다. 최근 들어 삼성, LG 같은 한국 기업들의 성공적인 국외 마케팅과 함께 두각을 나타내는 예술계 인사 등으로 “한국을 세계에 알리는 기회의 폭이 아주 넓어졌기 때문"이다. 실제 2005년에는 프랑크푸르트 국제 도서전에서 한국이 주빈국으로 행사를 성공리에 치렀고, 2004년 베를린 영화제에선 김기덕 감독이 사마리아로 감독상을 수상했다. 2007년 박찬욱 감독의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는 알프레드 바우어상을 수상하면서 독일뿐 아니라 유럽 전역에 한국영화를 알렸다. 2012년에는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대박을 치면서 일본을 제외한 여느 나라에서나 그렇듯 독일에서도 관심을 보였다. 싸이는 EMA에서 공연을 가진 뒤 최고의 권위를 가진 상인 EMA 베스트 비디오 상을 타기도 했다.


한편 한국은 1990년대 후반부터 독일 비자 발급이 용이해지기 시작했으며, 2000년대가 돼서는 비노동 비자일 경우 독일 비자를 찍어주는 기간이 최소 소지 금액에 비해서 길어졌다. 쉽게 말해 한국인이 독일에서 불법 체류할 가능성이 적다고 판단했다는 의미로, 한국의 경제적 성장을 어느 정도 반영했음을 알 수 있다. 독일어를 알아야 가지 이미 1972년부터 한독간 사증면제협정에 따라 독일로의 무비자 입국 및 90일간의 체류가 가능했으며 장기체류 허가 또한 현지에서 직접 받을 수 있는데, 참고로 독일에 무비자 입국이 가능한 비 EU 국가들은 한국, 미국, 캐나다, 일본, 호주, 뉴질랜드, 이스라엘 뿐이라 한국이 독일 정부로부터 불법체류 가능성이 낮은 국가로 대우를 받는다고 할 수 있다.


협력 및 진출

2016년 3월 7일 국방부는 독일 국방부와 '한-독 군수협력에 관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하고 양국 간 군수협력회의 정례화 등 군수협력 강화 방안을 논의했다. 양해각서에 따라 한독 양국은 군수협력회의를 정례화하고 지금까지 유지해 온 우호협력관계를 심화, 발전시키고 군수혁신 경험 등을 공유하기로 합의한다. 
또한 국제평화유지군(PKO) 활동이나 재난구조 등의 분야에서 군수협력을 강화해 나갈 가기로 했다. 군 관계자는 “이로써 우리 군은 국제평화유지군(PKO) 활동 등 독일과 공동으로 참여하게 될 다양한 군사작전 분야에서 군수지원능력을 향상시켜 작전역량을 높이고 안정적인 임무수행을 기대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국방부는 지금까지 미국, 호주 등 15개 국가와 상호 군수협력을 위한 양해각서를 체결해 시행 중이다. 또한 향후 우방국들과의 군수협력을 지속적으로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현대자동차는 ?

현대자동차그룹의 중심이 되는 회사이다. 현대그룹을 창업한 故 정주영 회장이 일제강점기인 1940년 3월에 인수하여 서울 마포구 아현동에서 운영했던 아도서비스라는 자동차 정비공장을 그 근원으로 볼 수 있다. 정주영 회장은 빨리, 완벽하게 고치고 수리비는 많이 받는 방침으로 사업 성공의 토대를 닦았다. 1940~1942년 당시에는 자동차 보급률이 매우 낮았다. 그 때문에 자동차를 빨리 수리해야 고객층을 유지할 수 있었다. 다른 수리공장에서는 수리비를 더 받으려고 자주 늑장을 부렸다. 그러나, 정주영 회장은 '자동차가 고장나면, 차주인이 발이 묶여 힘들어 한다. 그러므로, 빨리 차를 고치는 게 고객을 위한 길이다.'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보통 밤 12시까지 작업소에 머물면서, 고객들 차를 빨리 빨리 수리했다. 이처럼 "빨리 빨리"와 "빠르고, 정확하고, 납기 준수" 철학이 있었기 때문에, 경영은 순조로워 수익을 많이 냈다. 그러나 이후 공장이 불타 없어지고 전쟁까지 일어나자, 사업이 어려웠다. 결국 일제는 기업 통제정책인 ‘기업정비령’을 실시했다. 이 과정에, 종로 5가에 있는 '일진공작회'로 정 회장이 소유하던 아도서비스가 강제 흡수·합병 되었다. 정 회장은 어쩔 수 없이 자동차 수리업을 그만두었다. 이후 아도서비스를 정리한 자금으로 트럭을 구입하여 석탄운반업을 하였으며, 해방 이후 아도서비스를 반환받아 1946년에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설립한다. 설립 직후에는 미군 병기창에서 하청을 주로 받았으나 점점 수요가 늘었고, 이 회사를 현대토건사가 흡수해서 현대건설로 변모한다.


현대자동차의 공식적인 역사는 1967년 자동차 제조업에 뛰어들면서부터 시작한다. 1967년 12월 정주영 동생 정세영이 정식으로 회사를 설립하여 당시 자동차 최강국인 미국의 포드와 기술계약을 채결하고 기술을 도입했다. 초기에는 포드 코티나를 조립, 생산하면서 자동차 생산 기술을 배웠다. 또한 70년대 중후반에는 메르세데스-벤츠와 기술제휴를 맺고 버스 생산 및 승용차 수입에 들어갔다. 


포드의 모델을 대한민국에 조립생산 방식으로 들여와서 판매하다가 1973년 기술이전 문제로 포드와 갈라섰다. 그리고 1980년대 중반엔 메르세데스-벤츠와 갈라선다. 이후 독자적인 모델을 생산하려고 자체개발을 시작하였으며, 일본의 미쓰비시와 기술계약을 새로 체결했다. 한때 세계에서 자동차 산업이 가장 컸지만, 영국병과 잦은 노사 불화로 몰락한 당시 영국 최대 자동차 회사, 브리티시 레일랜드 부사장이었던 '조지 턴불'을 영입하여 엔진, 엑셀러레이터, 트랜스미션 같은 주요 부품 제작 기술 계약을 체결하였다. 


1976년 대한민국 자동차공업의 자립화를 선언한 고유 모델인 포니를 시작으로 독자모델 생산을 시작하여 쏘나타를 기점으로 대한민국 최대 자동차 기업으로 떠올랐고, 아시아에서 2번째로, 독자 자동차 모델 생산국이 되었다. 당시 미국 정부는, 주한 미국 대사에게 정주영 회장이 자동차 독자 개발을 포기하도록 지시하기도 하였다. 1977년 당시 리처드 스나이더 주한 미국 대사가 정주영 전명예회장을 만나 “현대가 포니의 독자 개발을 포기하면 모든 힘을 다해 현대를 지원하겠다. 중동 건설에서도 현대자동차를 도와주겠다”고도 하였으나 정 회장은 이를 거절했다. 관련기사 아무래도 대한민국이 언젠가는 미국 자동차 산업을 위협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미국이나 일본은 자신들 국가의 대기업이 한국의 공업을 점유해서, 자신들 제품을 조립해주기만 하는 공장을 갖고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고자 정주영에게 압력을 많이 넣었다고 한다. 한국이 독자적인 엔진 기술을 개발해낸다면 자신들이 챙길 이익은 적어지고, 한국이 독자적인 차량, 상품 등을 만들 수 있기 때문. 정주영은 결국 모든 압력을 무시하고 독자개발을 밀어붙였다.


1976년 남미 에콰도르에 포니 5대를 수출한 것을 시작으로, 국산차를 해외 시장에 내놓았다. 1980년대 말 엑셀을 북미 지역으로 수출해서 북미 시장에 진출했다. 현재는 전 세계로 자동차를 수출하는 거대 기업으로 성장했다.


북미 시장 공략을 강화하기 위해 캐나다 퀘벡 주 몬트리올 인근의 브로몽에다가 현지공장을 1986년에 착공하여 1989년에 가동을 시작했으며, "현대모터캐나다"라는 캐나다 현지 법인을 세웠다. 브로몽 현지공장에서는 쏘나타를 생산하여 미국 등지에 공급했다. 하지만 당시 북미 승용차 시장에서 일본 메이커들이 미국 현지공장에서 생산하는 등 초과공급인 상태에서 현대자동차는 당시에 품질이 떨어진다는 나쁜 평가를 받아 실적이 부진했다. 연간 1만대~2만대 가량 생산하는 데 그쳐 손익분기점을 넘지 못하는 등 누적 적자가 가중되어 1993년 10월에 가동을 중단한 후, 1996년 2월 현대모터캐나다를 청산하기로 결정하면서 브로몽 현지공장은 매각되었다. 덧붙여서 브로몽 공장을 지었을 때 캐나다 정부로부터 받았던 보조금도 모두 상환했다. 브로몽 공장의 청산은 현대자동차에게 있어서 악몽이나 다름없는 흑역사였고, 정세영 前 사장도 북미 시장에 대한 충분한 조사를 하지 않고 브로몽에다가 공장을 지은 것을 후회한다고 언급했다.


1998년 10월 기아자동차와 아시아자동차를 인수하였고, 2000년 9월 현대그룹에 있는 다른 계열사 9개를 가지고, 현대그룹에서 독립해서, 지금 있는 현대자동차그룹을 형성하였다. 


정몽구가 그룹 회장에 취임했고, 현재 현대자동차그룹은 현대그룹에서 분리된 전혀 다른 기업 집단이다. 연간 차량 총 생산량 기준으로 기아자동차를 합치면 세계 5위의 자동차 생산 기업이며(2013년 기준 756만대) 현대차가 별도로 생산하는 차량도 세계 8위 수준이다. 2009년 정몽구의 아들인 정의선이 부회장에 임명되었다.


더 알아보면...

내수시장에서는 경쟁사 '대비' 저렴한 가격에 뛰어난 상품성과 동력성능을 자랑하며 넓은 실내공간이 특징이다. LPI엔진, 1.6~3.0리터 디젤엔진등 다양한 연료사용가능성과 염가패키지로 택시,렌터카,관공서등 플릿시장에서 또한 높은 시장지배력을 지니고 있다.


보쉬와 합자하여 케피코를 설립 했고(현재는 분리), 합자를 통한 기술 이전을 시도했으나 막상 보쉬의 보수적인 운영으로 큰 실효는 거두지 못했다는게 중론. 독자기술개발에 꾸준히 투자하여 현재는 유럽 및 일본의 자동차 기업과 비교하여 짧은 시간안에 상당한 수준까지 기술격차를 좁힌 상태이다. 그 뒤에는 보쉬가 있다 기술은 사오면 된다며 R&D와 엔지니어들을 천시하던 대우자동차의 행보 및 그 결말과 대비되는 모습이다


알파엔진의 개발성공과 엑센트가 나오기 이전까지는 미쓰비시 자동차와 기술협력관계를 통해 기술제공(엔진, 파워트레인 등)을 받아가는 기술종속적인 관계였으나 현재는 자체기술을 바탕으로 한 설계능력을 갖추고 일부기술은 외국경쟁업체에 팔기도하는 등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다. 현재 에쿠스는 자체개발 모델로 탈바꿈하고, 프라우디아는 닛산 후륜구동 세단 OEM으로 나오는 2013년 현재를 보면 참 묘하다. 과거 80년대 미쯔비시는 현대차가 독자적으로 엔진을 개발하는 것을 막기 위해 로열티를 깎아줄테니 엔진 개발 연구소를 폐쇄하라고 압력을 넣기도 했다. 당시 엔진 개발을 하던 연구원의 책상이 출장 다녀온 후 없어지는 등 그 고초는 엄청났다.


그러나 결국엔 자체적으로 엔진을 개발해 내고, 생산하고 자회사인 현대파워텍과 현대모비스를 통해 부품 및 소재까지도 서서히 자체적으로 생산, 소화해내면서 최근 10년간 독자적으로 개발해서 내놓는 자동차 관련 기술이나 시스템이 늘어나는 추세.


독자적으로 개발한 주행 시스템 중 대표적인 것이 AGCS(Active Geomatric Control Suspension, 능동제어 서스펜션 시스템)이 있다. 하지만 AGCS는 YF에서는 제외되었는데, 다른 4WS와 비슷하게 잊혀져 갈 듯 하다. 개발자 후문으로는 초기 적용차들에서 좌우 액튜에이터가 반대로 장착된 체 판매되었다고 하니, 초기 베타테스터들은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GDI는 에쿠스를 도입하면서 미쯔비시에서 같이 넘어왔지만, 당시에는 단점이 부각되어 GDI엔진을 MPI분사로 바꾸는등 엔진을 거의 새로만들어 시스템을 삭제했다.


2015년 6월 현재는 GDI 엔진을 4기통 1.6리터엔진부터 8기통 5.0리터 엔진까지 폭넓게 적용 중.


타우엔진과 H엔진, G엔진을 발표하면서 휘발유와 디젤엔진 모두 자체기술력으로 일반승용차량과 상용차량 범위에서 사용되는 모든 배기량의 엔진을 설계/생산하게 되었다. 엔진을 직접 개발한지는 20년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엔진 성능은 상당히 뛰어나며 고연비를 내고 있어[15] 대체적으로 평가가 좋은 듯. 참고로 에쿠스와 제네시스에 탑재된 타우 V8 엔진은 미국 Ward 선정 세계 10대 엔진에 내리 선정 되기도 했다.Ward는 다음과 같이 평했다 "the Tau continues to dazzle with its combination of silky, smooth power delivery, aggressive tip-in, satisfying exhaust note and admirable fuel economy." V8 타우엔진 말고도 아반떼에 들어가는 M16 GDI엔진도 세계 10대 엔진에 선정된적이 있다.


또한 2.4 GDI 엔진의 YF 쏘나타는 미국 EPA 측정 기준으로 고속도로에서 35 MPG의 연료 효율을 보이고 있으며, 이는 하이브리드급에 육박하는 동급 최고의 연비이며, 출시 당시 중형세단 중에서는 혼다 어코드와 도요타 캠리등 이를 상대할 자가 없었다) 또한 미국인 드라이버 중에는 2.4엔진의 YF 쏘나타로 66 MPG 까지 달성했던 드라이버도 있었으니 #[17] 다만 위의 연비는 미국에서 뻥연비로 지적되어 소송걸렸었고, 깔끔히 털렸다...


또한 디젤엔진 기술에 있어 일본 업체 대비 경쟁력이 높지만, 디젤의 종주국 유럽 업체와 비교하면 연비를 비롯한 전체적인 성능면에서 다소 열세에 있으나 대중자동차 시장에선 큰 격차를 보이지 않는다.


Fast follower 측면에서 보면 2001년에 발매된 BMW의 밸브트로닉과 동일하게 스로틀 대신 흡기 밸브의 개방량을 통해 출력을 제어하는 CVVL 을 2012년에 판매하고, 벤츠나 포르쉐 카이엔과 동일한 하이브리드 시스템을 바로 다음해에 판매하고 있다. CVVL은 상당한 시일이 소요됐지만, 하이브리드는 발매 바로 다음해에 쏘나타 하이브리드가 나와 Follower 로 보긴 어렵다.


파워트레인에서 좋은 평가를 받으나 대중차시장 한정이고 6기통 8기통 가솔린엔진은 다운사이징 대응이 늦어지고 있다. 최신 엔진 기구 cvvl, gdi등 다양한 기술들을 엔진에 적용하고 있지만 세부적으로 들여다보면 이미 선진업체가 5~10년전에 적용한 한세대 이전 구조를 취하고 있으며 6기통이상 가솔린 엔진의 경우 10여년간 기존설계 엔진에서 보어업등 수정만 하다보니 독일업체의 엔진보다 연비가 많이 떨어지는 데서 비판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 사실 현대차가 대배기량 엔진을 개발한게 워낙 최근 일인 탓도 있다. 현대 에쿠스 2세대의 타우 4.6, 5.0 엔진이 나오기 이전엔 4L 이상 엔진은 버스, 트럭 엔진 뿐이었다. 1세대 에쿠스의 것은 미쓰비시 것에 가깝다.


변속기 대부분을 자체개발 하고 있다는 점은 선진 자동차 업계 후발주자로서 높이 평가받는 부분이다. 전 세계적으로 자체변속기를 개발하는 자동차 회사는 VW,GM,벤츠,토요타,닛산 등 외에는 거의 찾아보기 드물며 대부분 ZF나 자트코,아이신등 선진 변속기 전문 제조업체로 부터 변속기를 사와서 장착한다. 그나마도 토요타를 제외한 대부분의 회사는 일부차종에만 적용하고 생산규모가 떨어지는 후륜구동 변속기나 DCT는 서플라이어로부터 공급받는게 일반적이나 현대는 상용차 몇개 차종을 제외하면 소형 전륜, DCT, 대형 전륜,대형 후륜 등 전륜4속~후륜8속 모두 파워텍, 모비스, 다이모스, 위아 등 계열사로부터 자체공급받는다. 한편 한국GM은 미션을 국내에서 만들었다가 욕만 처먹고 망했다


크라이슬러에게 전륜6속 변속기를 공급하는등 경쟁사의 현대변속기 채용 사례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외국에서의 실패

2000년대를 기점으로 일본시장 진출을 전개했다. 클릭과 투싼, 쏘나타, 그랜저 네 모델을 투입[31]하였으나, 일본 제품과 성격이 겹치는 동시에 외산차 품질에 대한 신뢰가 극히 낮은 일본 소비자 성향을 파악하지 못했고 일본인들이 선호하는 차종이 아니어서 큰 인기를 끌지 못했다. 아줌마 부대를 타겟으로 배용준을 모델로 판촉에도 노력하였으나 결국 시장 철수를 하며 NF를 반값에 팔고 일본 시장을 떠났다. 승용부문 사업을 전부 철수한 후 현재는 대형버스인 유니버스 하나로만 일본에서 버티고 있다. 일본의 대형버스는 가격이 3억이 넘는 등 매우 고가이고 내구연한도 딱히 정해진 게 없어서(배기가스 규제에 걸릴 때 대개 대차) 대폐차 간격이 긴 편인데, 유니버스는 가격이 싸고 일본산 버스 대비 연비와 출력, 내구성에서 높은 평가를 받아 경쟁력이 있다고 한다. 관련기사 유니버스는 일본 내 수입 대형버스 시장에서 최고 판매량을 기록한 적이 있다.


2011년 현재 일본에 2리터급 터보 후륜구동 차량이 멸종하여 2리터 가솔린 터보 엔진을 장착한 후륜구동 스포츠 쿠페인 제네시스 쿠페가 일본에 일부 병행 수입되고 있는 상태. 토요타 86이 86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자체적인 개발이 아닌 계열사로 편입한 스바루의 BRZ를 바탕으로 빠르게 내놓은 것도 2L급 후륜구동 터보 쿠페 모델의 부재 속에 불어닥친 제네시스 쿠페의 병행수입 모델의 인기에 영향을 받았다는 의견도 있다.


2015년 헝가리와 노르웨이 법인을 철수하였다.

해당 국가 신차 시장규모가 작고 시장점유율사정이 좀처럼 나아 지지 않는 국가에 한해 현지국가 법인을 정리하고 근처유럽법인 소속으로 귀속시키는 경영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일이다. 사무실 법인이 철수 하는 것이지 시장에서 철수 한 것은 아니며 판매 채널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고는 하나 동유럽 일부국가와 북유럽 일부 국가에서 장기간 사정이 나아지지 않는 걸로 봐선 해당국가에서 단기간에 큰 성과를 내기는 어렵다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그 전에는 1989년 캐나다 퀘벡 주 브로몽에 현지공장을 세워 Y2를 만들었다가 부진으로 1993년에 가동을 중단하고 청산한 흑역사가 있다.


현대자동차에 입사하면?

취준생들이 꿈의 기업으로 손꼽는다. 현대자동차그룹 내에서도 기아자동차와 함께 완성차 분야 갑이기 때문에, 구직자들이 상당히 좋아한다. 연봉도 삼성그룹에 있는 어지간한 계열사들을 능가한다. 다만 대기업 중에서 군대문화로 대표되는 후진적/남성적 기업문화가 강하게 남아있는 회사기 때문에 단순히 연봉만 보고 갔다가 성격과 맞지 않아 퇴사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니 신중한 선택이 필요하다.


현대기아차그룹에서 중시하는 것은 기초질서 확보, 업무 시작 시간 준수 등이다. 조선비즈에 따르면, 점심시간 준수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11시 50분~12시 사이에 밥먹으러 가는 사람들은 카메라를 동원해 잡아낸다. 1층 커피숍은 7시 50분부터 9시까지는 영업을 하지 않는다. 아침 먹을 생각을 하지 말고 일을 하러 가라는 뜻이다.


기술직으로도 꿈의 기업이나 뽑는 인원이 엄청나게 적어 고졸 및 초대졸을 대상으로 하는 기술직 모집은 최근 약 8년여 만에 겨우 100여명 채용하였으며 생산공정 관리, 보전 등과 같이 플랜트를 담당하는 대졸 신입사원 또한 적은 인원을 채용하며 지역 출신을 좀 뽑는다. 공장 특성상 굉장히 시끄럽고 반복작업이며, 따라서 근속년수가 길어지면 근육통 / 요통 / 청력저하에 시달린다. 주간 연속 2교대 전에는 2조 2교대, 12시간 철야 근무를 하였으나 주간 연속 2교대 채택 이후로는 오전 06:45~오후 3:30인 1조(아침식사를 식당에서 판매한다) 와 오후 03:30 ~ 익일 새벽 00:30 (잔업포함)인 2조로 구분하여 운영하고 (이건 생산라인 기준이다 기술직은 근무시간이 다르긴 한데 공장이 12시 30분까지 계속 돌아가는 바람에 야근이 엄청나게 많다.) 각 조는 1시간 30분 근무, 10분 휴식의 반복 및 식사시간으로 구성되며 식사시간은 평일 40분 / 주말, 공휴일 특근의 경우 50분이었는데 주간연속 2교대가 되면서 40분으로 고정되었다. 주간연속 2교대의 도입으로 회식은 물건너가게 되었으며 1주일마다 주야근무가 바뀌는건 덤. 또한 공장 복불복도 있어서 바쁜 부서에 배치되면 공휴일과 토요일은 사라지게 된다당분간은 신입으로 뽑을 예정이 없겠지만 현대자동차 채용에서 자녀 가산점은 폐지된지 오래되었으며 출결과 관련경력을 많이 보므로 고딩때 출결이 좋지 않다면 깔끔하게 포기하길 바란다. -> 채용관련 팩트는 18년도까지는 사내하청에서 정규직으로 신규채용을 하기에 일반인은 채용을 안할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16년기준 향후 10년간 정년퇴직자가 13000여명이다.


울산에서는 유명한 아르바이트 장소이며 현대자동차 그룹의 위상이 올라가기 시작한 2000년대 초부터 인맥 없이는 들어갈 수 없는 꿈의 아르바이트로 불린다. IMF때 직원의 1/3이 해고되는 경험을 한 후 노동자들이 평생직장의 개념을 잃고 있을 때 최대한 뽑아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 안그래도 강성이였던 성향이 더욱 강해졌고 울산공장만 해도 직원이 3만명이 넘기 때문에 울산에서 작업복을 입은 사람을 보게 된다면 거의 현대자동차 근로자이며 (혹은 현대중공업) 타 공장까지 포함하면 4만명이 넘는 이 근로자의 힘과 IMF의 교훈을 바탕으로 현대자동차 노조는 국내 최대, 최강의 노조가 되었다. 기업문화는 현대계열사가 그렇듯 군대식이며 제조업 특성상 대부분이 남직원이다. (면접을 볼 때 여성에게 여기는 남자가 많은데 버틸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복지수준은 대기업 + 노조의 투쟁으로 높으며 근속년수에 따라 할인율이 달라지는 직원할인이라는 것이 존재하는데 직원할인이야말로 현대자동차를 다니는 이유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자사 자동차를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다. (물론 GM이나 르노삼성에도 동일한 제도가 있다) 여러 사람들이 할인가로 자동차를 사기 위해 현대자동차 직원에게 자동차 구매를 부탁하는 바람에 현재는 2년에 1번으로 직원할인을 제한하고 있다.


현대문화 + 공돌이를 생각하면 연구직의 근무환경은 뻔할 것이다. 

대한민국의 자동차 산업과 자전거 산업의 역사를 이끌고 지켜봐 온 기업. 방위산업체이기도 하다.

현대자동차그룹의 두번째 자동차 회사로 1944년 12월 11일에 학산 김철호에 의해 '경성정공'이란 이름으로 설립되어 우리나라 최초의 자전거 '3000리호'를 출시(다들 아시는 그 삼천리자전거의 기원이 된다)하고 1952년 2월 회사 이름을 기아산업(주)로 변경하였다.

1962년 기아마스타 시절에 일본 마쓰다와의 기술 제휴로 배기량 356cc의 3륜 화물차 K-360을 생산하였으며, 1973년에 김철호 회장의 타계로 장남인 김상문 씨가 후계자로 나서며 1974년 마쓰다 파밀리아의 차체를 바탕으로 최초의 국산 FR 승용차 브리사를 제작하였다. 브리사는 당시 현대자동차의 포니 및 새한자동차의 제미니와 격돌해 한때는 국산 승용차 시장 1위를 차지하는 최강자의 위치에 있었을 정도로 막강했던 차량.

1976년에는 아시아자동차를 인수해 자회사로 편입시킨다. 현재의 기아자동차 광주공장 및 특수차량 공장. 현재도 일부 SUV, 버스, 봉고트럭, 군용차는 광주공장과 특수차량 공장에서 생산하고 있다.

1981년 자동차공업 통합조치(산업합리화)로 인해 정부로부터 '중소형화물차 및 버스 전문생산업체'로 지정받아 경영 위기를 맞았으나, 같은 해 10월 전문경영인 체제가 들어선 이후로 트럭을 개조해 내놓은 소형승합차 봉고를 출시하면서 오히려 기업 이름을 알리는 데 도움이 되었다.

한편 이쯤부터 마쓰다 차량을 OEM 생산해 수출하기 시작했다. 주로 일본과 동남아 지역으로 수출되었다.

1986년 말부터 오대양 육대주를 휘날리는 깃발(또는 물결무늬)을 형상화한 로고로 변경하고 1987년 자동차공업 통합조치가 풀리고 프라이드, 콩코드로 부활, 이후 1992년에 세피아를 출시하고 아산만공장(현 화성공장)을 지으면서 확실하게 그룹을 키워갔다.

1994년 지금과 같은 로고로 변경한다. 바뀐 이유는 그 전 로고의 굴뚝이 환경오염을 연상하게 해서 바꿨다는 것이 정설이다.

현대차 인수 뒤에는 내수용 한정으로 차량 외부에 원형의 다른 로고를 붙였지만, 인지도가 낮고 BMW의 로고와 비슷한지라 "어차피 현대나 기아나 타원 모양의 로고이니 통일감 있게 예전 그대로 하자" 해서 2004년 2세대 스포티지의 출시 때 지금의 타원형 로고로 다시 돌아왔다. 단, 수출용은 기존의 타원형 마크를 그대로 쓰고 있었다.

1997년 경영의 악화로 부도를 맞고, 1998년 10월 입찰을 통해 현대자동차에 아시아자동차와 함께 인수되어 현대그룹에 편입되었다. 1999년에는 기아자동차판매, 아시아자동차, 기아대전판매, 아시아자동차판매 4개사를 합병하였다.

2000년 현대자동차를 중심으로 여러 계열사들이 현대그룹에서 분가하면서 현대-기아 자동차 그룹을 형성하게 되었다.

2011년에는 현대-기아 자동차 그룹이 현대건설을 인수하여 정통성을 강화한 기념으로, 현대자동차그룹으로 간판을 바꿔 달면서 이름이 빠지게 되었다. 지못미.

유명 테니스 선수인 라파엘 나달의 스폰서이기도 하다.

 

기아차의 부도

기아그룹은 1997년 기아차를 중심으로 기아중공업(구 기아기공, 현 현대위아), 기아전자(본텍, 2005년에 현대오토넷으로 합병), 기아정기(카스코, 2007년에 현대모비스로 합병.), 기아특수강(현 세아베스틸), 기산 등의 28개 계열사에 직원 5만 5천명, 1996년 자동차 수출 30억달러의 재계 순위 8위의 거대 그룹이 되었다. 특히 특정 일가의 소유가 아닌 소유 분산이 잘 이루어져 있고 전문 경영인 체제가 잘 갖추어져 있는 모범 기업으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이러한 소유구조 때문에 강력한 재벌들 사이에서 매우 불안한 모습을 자주 보였다. 1993년 자동차 산업 진출을 노리던 삼성그룹이 대량 주식 매입에 나서면서 삼성그룹과 기아그룹이 충돌하기도 했다. 여론의 비판을 받은 삼성이 지분 일부를 다시 매각하지만 삼성의 기아자동차 인수설은 끊임없이 제기된다.

이후 기아는 국제 경쟁의 격화와 경기침체, 계열사의 부실한 경영 실적 등으로 1997년 봄부터 위기설에 휩싸이다가 결국 1997년 7월 15일 부도유예협약 적용대상이 된다. 이후 28개 계열사를 14개로 줄이고, 기아차노조가 무분규, 임금동결 선언을 하는 등 자구책을 마련했으나 결국 10월 법정관리로 넘어가고 김선홍 회장 등 경영진은 완전 퇴진하게 된다. 외환위기의 혼란 속에 여러가지 시나리오가 제시되지만 결국 1998년 10월 국제입찰을 통해서 현대자동차에 매각된다.

기아그룹 부도의 원인으론 크게 2가지가 거론된다.

첫번째는 잘못된 예측에 바탕한 무리한 사업 확장. 기아그룹은 1990년대 아시아자동차, 기아특수강, 기산(건설) 등에 전폭적인 투자를 했으나 아시아의 트럭과 기아특수강의 철강은 수요예측이 잘못돼서 만성적인 공급 과잉이었고, 주택건설에 뛰어든 기산은 부동산경기 침체로 엄청난 자금이 묶이고 말았다. 이 3개 계열사의 적자때문에 기아의 부채가 눈덩이처럼 커졌다는 것.생사 갈림길 선 기아그룹 패인 분석 특히 전문경영인에 불과한 김선홍 회장이 프라이드의 성공이후 자만심에 취해 무리한 몸집 부풀리기만 하는 등 여타 재벌을 흉내내는 오너놀이를 하고 있다는 비판도 많았다. 기아사태와 경제민주화

두번째는 삼성의 무리한 인수추진과 갑작스런 자금 경색에 따른 일시적 위기. 기아그룹이 계열사 적자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외환위기 이전 한국재벌들은 대부분 만성적자 상태에서 은행빚 돌려막기로 수십년째 운영중이었다. 1997년 3월 삼미그룹 부도로 인한 금융시장의 경색에 유탄을 맞은 것뿐이라는 주장이다. 더구나 기아그룹은 주력사인 기아차는 흑자였기 때문에 방만한 몇 개 계열사만 정리하면 충분히 자력회생이 가능했다는 주장이 당시 기아 임직원들 사이에선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5개 재벌 그룹의 10개 계열사 재무관리팀에서 간부와 임원으로 25년간 일하였던 김건씨의 "엉터리 재무제표 읽는 비법" 12페이지에서 언급한 바에 의하면 1997년 당시 기아자동차가 설립 이후 34년 동안 단 1년만 흑자를 내었을 뿐이며 실제 적자는 3조 3천억원 가량이었지만 재무제표에 나타난 적자는 3800억원에 불과하였다고 나온다.

이 와중에 곁들여진게 일명 삼성음모론이다. 나중에 '삼성 X파일 사건'을 통해 기아차 매각 앞뒤로 유동성 위기에 처한 기아차 쪽에 금융권이 추가 지원을 하지 않도록 삼성이 정치권을 대상으로 로비를 벌인 정황이 실제로 드러나 음모론이 사실로 밝혀기도 했다. 삼성이 삼성생명과 제2금융권을 통해 기아의 자금 경색을 유도하고 정부를 압박해 기아 경영진 퇴진을 이끌어 냈다는 것. 이후에 기아차를 인수할려 했으나, 자동차 산업 철수를 결정하면서 인수는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실제 삼성은 1997년 초에 '기아차 성장 한계 봉착' '자동차 업계 대대적인 구조조정 필요' 등의 보고서를 공개해서 기아를 흔들기도 했다. 삼성자동차 보고서 파문 부도유예협약 직후인 8월에는 '쌍용, 기아차 인수가 필요하다'는 삼성내부 보고서가 유출되기도 했다. 1999년 외환위기 청문회 당시 김선홍 회장은 "삼성이 이를 바탕으로 금융계열사 등을 통해 빌려줬던 5000억원대의 자금을 거둬들였고, 결국 기아가 파산에 봉착했다"면서 음모론을 제기했고,

이에 대해 몇가지 추가 이야기가 있는데 1995년 당시 삼성중공업 직원들이 기아차 소하리 공장 출고장에 있던 봉고 J2의 사진을 찍다 기아자동차에 걸리는 바람에 기아와 삼성 간의 알력이 발생한 바 있고(1995년 6월 17일 한겨레 기사), 1997년 3월에는 중앙일보의 취재헬기가 기아자동차 아산만공장(현 화성공장) 상공을 선회하는 일이 있기도 했다.(1997년 3월 13일 동아일보 기사). 참고로 봉고 J2 사진을 찍다 걸린 사건에 대해 삼성중공업에서는 사내 차원에서 중징계를 내리는 조치를 취했다고 한다.

부도가 나자 굉장히 특이한 상황이 발생되었는데, 회사의 실질적인 주인인 노조와 경영자가 정치로 회사의 위기를 풀어나가려 시도한 것이다. 적은 규모의 부정 혹은 부도였다면 14%의 지분율을 가지고 있던 노조가 1% 지분율의 경영자를 쫓아냈겠지만, 너무 부도의 규모가 크자 양 측이 합심해서 정부를 상대로 정치적인 수단을 이용한 것이다.

 

기아차만의 특색

현대가 안정적인 쪽을 선호한다면 이쪽은 모험으로 위기를 돌파하는 쪽을 선택했다. '기술의 기아'라는 이름에 걸맞는 행보를 보였었는데, 예를 들자면 국내최초로 차체(Underbody, "섀시(chassis)"라고도 함)를 독자 개발한 세피아라든지, 영국 로터스에서 생산 라인을 그대로 들여온 것이긴 하지만 대한민국 최초의 로드스터인 엘란, 세계 최초의 온로드 중심 소형 SUV인 스포티지, 그리고 대한민국 대형버스 최초로 자체 디자인을 적용하여 GD마크를 획득한 그랜버드 등이 있다. 게다가 그 이전으로 올라가면 박정희 정권 시절에 이미 부품면에서 90% 이상의 국산화를 이루어낸 브리사까지 포함하는 등 기아의 기술력은 보통이 아니었다.

엔진에 있어서도 연비위주의 현대자동차와는 달리 성능 위주의 세팅을 하였으며, 후에 자체 개발한 엔진인 T8D엔진 역시 성능위주의 세팅으로 나왔다. 이 엔진은 엘란의 생산분과 크레도스 등에 쓰였는데 성능은 그럭저럭 괜찮았고 당시의 한국엔진 중 가장 스포티했다. 부도 전에는 사실상 업계에서 가장 뛰어난 기술력을 자랑했던 회사로 엔지니어 마인드가 국내 자동차 업체 중 최강이었다고 봐도 할 말이 없는 회사. 창업주부터가 애시당초 일본에서 기계공업에 종사해서 돈을 벌었던 인물이다. 엔진 특성으로 보면 대체적으로 마쓰다의 터보엔진을 당시 국내 실정에 맞게 자연 흡기로 개조하고 출시한 엔진이 많고, 전체적으로 회전수가 높게 잘 돌아가고 압축비도 높은 편. 비슷한 자연흡기용 엔진과는 다르게 전부동식 피스톤핀이나 피스톤 쿨링용 오일제트를 장착하는등 약간 오버스펙인 면이 있다. 터보용 엔진에 어울리는 부분이지만, 자연 흡기로 고치면서도 다운그레이드 하지 않은 부분 부분이 남아있는 편.

자동차공업 합리화 조치 이전에는 유럽의 차량들을 도입하여 생산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아시아자동차까지 포함하면 피아트 124, 피아트 132, 푸조 604 등이 있으며, 몇십년 후의 일이지만 기아자동차가 영입한 피터 슈라이어와 유럽 전용 모델 기아 씨드를 포함하여 이들은 기아자동차의 유럽 DNA로 분류되고 있다.

다만 자동차 디자인 부분에서는 현대자동차보다 뒤쳐져서 촌스럽다거나 거친 느낌을 주는 자동차가 많고, 자동차 내부의 스위치 질감이나 배치도 현대자동차보다 저렴한 느낌이 나는 것이 단점이었다. 1980년대 내내 자동차공업 합리화 조치를 비롯한 이유로 승용차 개발 역량을 키우지 못했던 부분도 이에 한 몫을 했었고, 1980년대 중순 이후로 부족해진 승용차 개발 및 디자인 노하우를 포드와의 협력 개발 프로젝트나 해외에 나와 있었던 직원들을 통해 조금씩 배우기 시작했다.

이렇다보니 현대자동차 인수 후 '기술의 기아'라는 이미지가 퇴색되고 '디자인의 기아'로 이미지 변신 후에는 과거 기아자동차를 추억하는 오너들 사이에서 나의 기아차는 이렇지 않아라는 반응도 일부 있다.

어찌됐든간에 현대에 인수 된 이후 현대차의 플랫폼과 파워트레인을 받아서 차를 제작하지만 어차피 이정도는 해외 메이커에서도 흔한 일이라 기아의 나름대로 독자적인 세팅과 설계를 하기도한다. 같은 플랫폼이라도 서로 비교해보면 은근히 다른 부분이 많은 등 비교 시승해보면 재밌다.근데 깨알같은 차이라 일반인에게 큰 의미는 없다 그러나 역시 현대차 그룹 산하기 때문에 정말로 마음대로 차를 제작할 수 없다는건 큰 애로사항이다. 아우디나 폭스바겐의 예처럼 서로 차종이 겹치건 말건 상관 안하고 마음대로 차를 개발해서 판매하는 것 과는 매우 대조적인데 아무래도 기준점이 현대에 있기 때문에 기아차는 상대적으로 파워 트레인 공급 등에서 많은 차별을 받는다. K9의 엔진과 위치 같은건 유명한 예시고 트림이나 옵션 구성도 묘하게 제한받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어차피 상술된 스위치 질감 같은 실내 인테리어 문제는 2015년 현재에 와서는 일부 구형차종을 빼고 완전히 해소 된 문제다. 하지만 파워 트레인 공급이나 미묘한 트림 구분은 쉽게 해소되기 힘든 문제일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현대차 그룹의 정책상 기아는 틈새시장 공략용으로 설정했기 때문이라 생각되는데 엑센트에는 1.6 디젤 엔진에 DCT 미션을 달고 나오지만 프라이드는 그런거 없고 1.4디젤에다 인기가 떨어지는 수동 미션만 나온다던지, 내수용 경차나 MPV, 미니밴같은 차량은 기아에서만 생산 한다던지. 어쨌든 위에 설명된 사항은 무조건 단점이라고 볼 수는 없다. 젊은 층이나 일부 매니아들은 기아차의 옵션구성을 더 반기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자신의 취향에 맞춰 차를 구입하는데는 무리가 없는 수준이다.

역사

인류 문명에 있어 가장 오래된 계산 도구는 손이며, 그 후로 긴 시간에 걸쳐 주판이나 계산자와 같은 계산을 돕는 보조 도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642년 파스칼에 의해 최초로 덧셈, 뺄셈이 가능한 최초의 기계식 계산기가 출현하였고 라이프니츠에 의해 곱셈, 나눗셈까지 가능한 계산기가 나왔다. 하지만 본격적인 현대 컴퓨터의 개념을 최초로 제시한 이는 찰스 배비지로서, 그는 차분기관이라는 기계식 계산기를 만든 뒤 오늘날의 컴퓨터와 개념적으로 같은 기계인 해석기관을 설계하였으며, 최초의 프로그래머가 탄생한다. 이후 1893년에 홀러리스에 의한 천공카드 시스템이 개발되어 인구통계 및 국세 조사에 이용되었고 자동계산의 실용성이 확인된다.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1938년에 독일의 콘라트 추제가 Z1을 개발하였고 이후에도 계속 개량하였다. 추제는 패전국이라는 이유로 잘 알려지지 않은 부분에서 십수년동안 최초의 타이틀을 거머쥐었는데, 특히 Z3은 튜링 완전을 포함하여 현대 컴퓨터가 갖춰야 할 모든 기능을 갖춘 세계 최초의 컴퓨터였다. 설명


1937년 2차 대전 직전에 영국의 앨런 튜링은 추상적 계산기의 모형이 되는 튜링 머신을 고안했고 이는 추상적 계산기의 모형으로서 컴퓨터의 논리적 모델이 된다. 이후 1942년에 아이오와 주립대학의 아타나소프 교수가 베리아와 진공관으로 이루어진 특수 목적용 컴퓨터 ABC를 개발하였으나 오늘날 이 기계는 최초의 전자식 계산기라고 보기엔 특수목적용이었으므로 일반적으로는 최초의 진공관 사용 계산기로 보는 경향이 있다.


1943년 영국 GCCS(현 영국의 GCHQ)에서 독일군의 최고위 암호장치를 깨기위해 콜로서스를 개발하게 된다. 콜로서스는 진공관, 릴레이만 사용한 최초의 디지털 컴퓨터였으며, 덤으로 프로그래밍도 가능한 컴퓨터였다. 즉, 시작은 에니악보다 더 빠른데 이놈이 발표된 건 기밀이 해지된후 1975년 이후였다. 그리고 한국 교과서엔 아예 콜로서스가 없지


이후 에이컨에 의해 1944년 최초의 전기기계식 계산기인 MARK-1이 제작되었고 2차대전 이후인 1946년 에커트&머큘리에 의해 최초의 범용 전자계산기 ENIAC(에니악)이 개발되었다. 에니악이 개발되기 1년 전, 헝가리 출신 수학자 존 폰 노이만이 프로그램과 데이터를 주기억장치에 두고 주기억장치에 있는 프로그램 명령어를 하나씩 수행해 나가는 방식을 제안하고, 또 오늘날까지 사용되는 2진법을 컴퓨터에 채택할 것을 주장하는데, 이 제안들이 적용된 최초의 컴퓨터인 EDSAC(에드삭)은 1949년 모리스 윌키스에 의해 개발되었다. 이로부터 현대적인 컴퓨팅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1950~1960년대에 컴퓨터의 개발을 본격적으로 견인한 것은 ICBM과 우주항공 분야에서의 수요였다. 왜냐면 이 이전에도 NASA의 전신인 NACA나 노스롭, 보잉같은 우주, 항공분야에서는 수학적인 계산을 많이 요구했기 때문. 문제는 컴퓨터는 커녕 계산기도 없으니 그걸 전부 사람 손으로 했다! 수많은 계산사람(…)들이 계산을 하고 옆사람에게 넘겨 검산하는 형식. 효율성은 당연히 똥이었다. 미니트맨에는 항법 유도용으로 최초로 메인프레임이 아닌 트랜지스터 로직을 사용한 임베디드 컴퓨터를 사용했고, 1960년대 중반에는 새턴 V의 항법 컴퓨터에 집적회로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1959년에는 미니컴퓨터 PDP-1을 통해 키보드를 통한 I/O 개념이 대중화되었고, 1962년에는 PDP-1으로 돌아가는 스페이스 워라는 기념비적인 컴퓨터 게임이 탄생했다.


오늘날 우리가 쓰고 있는 대부분의 컴퓨터는 개인용 컴퓨터(personal computer, 약자로는 PC)이며, 개인용 컴퓨터 규격은 IBM의 IBM PC와 IBM PC 호환기종, 애플의 매킨토시였다. 당연히 매킨토시는 고사양에 화려한 그래픽을 자랑하였지만, 정작 본문에 충실하고 사무용 컴퓨터로 많이 쓰인 IBM PC가 거의 주름을 잡게 되었다. 왜냐하면, 당연한 소리지만 사무실에서 사용하기 때문에 배우려면 사무실용 컴퓨터를 배워야 하기 때문이었다.


1970~80년대에 백색 가전에 제어용 IC가 들어가기 시작하면서 아무데나 “콤퓨타”라는 말이 붙던 시절이 있었지만, 제어용 IC의 소형화 및 가격 하락으로 인해 1990년대 이후에 출시되는 전자 제품 중 CPU(MPU)가 들어가지 않는 제품은 드물다.


1980년대만 해도 컴퓨터는 배우기도 힘들고 쓰는 것도 힘들었지만, 지속적으로 컴퓨터 산업이 발전하면서 이젠 그 누구나 기초적인 지식만 있다면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이 개선이 되었다. 컴퓨터의 특징은 정확성, 신속성, 대용량성, 범용성, 호환성이며 이는 기계로서 컴퓨터가 기계로서 다양한 곳에 성능을 사용할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시험에 자주 나오는건데, 두줄 긋고 별표쳐 컴퓨터에 '창의성'같은 건 없다. AI가 개발되지 않는 이상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는것이 일반적이 었지만 구글이 가진 기술력으로 만든 인공지능을 바둑에 접목시킨 알파고로 이세돌과의 대국에서 창의적으로 보일 수 있는 수를 데미스 하사비스(알파고 개발자)의 알파고 원리(정책망과 가치망)에 의한 연산결과의 판단으로 인간보다 더 창의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가 바둑기사들에게 특이점을 선사했으므로 역사적인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계산과 연산은 더 정확한 선택을 찾기위한 과정이기에…)



1995년, 컴퓨터는 또 한 번의 대격변을 맞이하게 된다. GUI를 채택한 Windows 95가 대중화되며 컴퓨터는 쓰기 쉽게 변모했다. 이게 없었다면 우리는 위키질도 못했다.


여담으로 컴퓨터의 성능 향상만큼이나 놀라운 것이 가격의 하락이다. 컴퓨터의 가격대 성능비는 지난 반세기동안 몇억배로 증가했다. 일례로 미국 우주선인 아폴로 시리즈에 탑재된 각종 컴퓨터들은 80년대 패미컴만도 못한 성능을 가졌지만, 한 대의 우주선 전체(즉 1~3단 로켓 및 착륙선+사령선)에 탑재된 컴퓨터의 가격을 합치면 지금 돈으로 수십억원에 육박한다고 한다. 애당초 미국이 우주왕복선을 개발하게 된 이유중 하나가 바로 왕복선의 경우 탑재된 컴퓨터를 재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엔 지금처럼 컴퓨터 가격이 싸질 줄은 상상도 못했기 때문.


그리고 클라우드 컴퓨팅이 발전하고, 스마트폰의 성능이 비약적으로 올라가면서, 개인적으로 집에 PC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줄어질지도 모른다는 추측도 있으나, 클라우드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이 개인이 올린 정보를 마음대로 들여다보거나 사용자의 동의 없이 자료를 이용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개인용 컴퓨터 자체가 사라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컴퓨터의 분류

슈퍼컴퓨터 : 2010년의 기준으로는 초당 수백 테라~수 페타플롭스의 속도로 연산을 수행한다. 일반인이 슈퍼컴을 가장 가까이서 접해볼 수 있는 매체는 단연 일기예보. 그 외에도 핵물리 실험 같이 계산량이 쩌는 분야에는 꼭 필요하다. 요즘에는 전투기, 헬리콥터, 미사일 등의 무기를 개발할 때 다수의 시제품을 만드는 대신 시뮬레이션으로 대체하는 추세이므로 이 슈퍼컴퓨터가 국력의 척도가 될 날도 머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서도 무기 뿐만이 아닌 일반 기업에서(물론 비용문제 때문에 대기업 수준이 되어야 가능하다) 휴대폰, 각종 전자제품, 자동차 등을 설계할 때에도 슈퍼컴퓨터를 이용한 시뮬레이션을 하고 있다. 아닌게 아니라 이미 슈퍼컴퓨터가 한 나라의 국력과 과학, 기술력의 척도로 어느 정도 자리매김 하고 있다. 현재 세계에서 최신 고성능 슈퍼컴퓨팅 기술 개발과, 장비 도입을 경쟁적으로 시행하는 나라는 미국, 중국, 일본 정도다. 세계 슈퍼컴퓨터 성능 순위가 발표될 때 마다 세 나라에서 새롭게 개발한 장비들이 1위를 서로 탈환하고 있는 형편. 반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은 슈퍼컴퓨터는 세계 30위권 정도에 위치해 있다.

슈퍼컴퓨터도 이미 조 단위의 가격을 가지고 있다. 국가 슈퍼컴퓨팅 연구소의 자료에 따르면 일본 이화학연구소의 슈퍼컴퓨터 'K' 는 1조 5천억원을 들여 구축하였다.

메인프레임 : 프로세싱 능력을 극대화한 대형 컴퓨터로서 대규모의 이용자가 동시에 이용할 수 있으며, 주로 은행, 병원, 정부 기관 등에서 사용한다. 슈퍼컴퓨터의 경우에는 계산 능력을 극한으로 끌어 올린 계산기라면, 메인프레임의 경우에는 계산과 함께 광범위 한 컴퓨팅 능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린 범용 컴퓨터이다. 그만큼 메인프레임의 활용 분야는 매우 다양하다. 또한, 인류가 가진 컴퓨터 기술의 최첨단에 서 있는 컴퓨터이기 때문에 성능뿐만 아니라 안정성, 보안 역시 대단히 우수하며, 이 때문에 은행이나 정보 기관과 같은 보안이 중요한 단위들에서 많이 사용되고 있다.

다만, 최신 컴퓨터 기술력이 총동원된 만큼 도입 비용이 엄청나게 비싼데, 메인프레임의 도입 비용은 조 단위로 올라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특히, 전국에 분포한 영업망을 전용 통신망으로 연결하여 금융 데이터를 처리해야 하는 은행에서 도입하는 메인프레임의 경우는 수 조원을 상회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13년 금융위원회는 은행에 메인프레임을 주구장창 팔아먹는 IBM에게 메인프레임 도입 비용을 공개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영업 비밀의 사유로 고지를 거부하였고, 은행들도 공개를 거부하였다.

보통 컴퓨터 기술이 발달할수록 대중 컴퓨터의 가격은 하락하지만, 메인프레임의 경우에는 오히려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는데, 이에 대한 대안으로 클라우딩 메인프레임의 개념이 제안되기도 한다. 이는 일정 단위의 컴퓨터들을 네트워크로 연결하여 메인프레임에 준하는 성능을 뽑아내자는 개념이다. 하지만 메인프레임의 도입 목적은 성능뿐만 아니라 보안과 안정성[19][20]이기 때문에 메인프레임하면 여전히 고전적 메인프레임을 지칭하고 있다. 또한, 상황이 역전되어 클라우딩 시스템이 메인프레임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메인프레임이 압도적인 성능을 내세워 클라우딩 컴퓨팅의 주전산기로 부상하고 있는 상황이다.

미니 컴퓨터 : 중형 컴퓨터로서 학교, 연구소,등의 업무 처리나 과학기술 계산등에 사용되는 종류를 뜻한다. 역시 20세기적 이야기. 역사가 오래된 대학의 공학동 등지에 폐품이 굴러다니고 있을지도 모른다.

마이크로 컴퓨터 : 소형 컴퓨터로서 마이크로프로세서를 CPU로 사용하는 컴퓨터다. 사실 요즘 컴퓨터는 커다란 하나의 기계로 구성하는 게 아니라 다수의 컴퓨터를 네트워크로 묶어 사용하는 것이 대세이기 때문에 마이크로 컴퓨터 방식을 이용한 서버 컴퓨터의 묶음이 위에 언급한 미니 컴퓨터, 메인프레임 등을 거의 대체한 상태다.

워크 스테이션 : 생긴건 데스크톱 컴퓨터처럼 생겼지만 크기가 꽤 크고 무거운 편이다. 보통 고속, 고성능의 그래픽 처리가 필요한 설계 분야나 공학 시뮬레이션 분야에 사용된다. 설계에서 요구하는 그래픽 기술과 게임에서 요구하는 그래픽 기술이 서로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워크스테이션으로 게임을 하긴 좀 거시기하다.

데스크탑 : 책상에 놓고 사용 할 수 있는 일반적인 개인용 컴퓨터를 말한다.


완제품 PC

완제품 컴퓨터 판매라고도 한다. 이런 컴퓨터는 당연히 부품 원가보다 가격이 많이 비싸다. 회사에 따라 다르지만 조립식으로 사는 것보다 최소 20~30만원, 많게는 50~70만원정도 더 줘야 한다. 100만원이 넘어 갈 수도 있다 이는 해당 PC가격에 사후 AS비용과 광고비, 대기업의 이윤등이 들어가며, 컴퓨터 본체 뿐 아니라 안에 깔린 정품 운영체제랑 기타 소프트웨어의 가격도 같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일단 OS가격이 10만원대 중반으로 만만치 않다는 것만 따져봐도 그렇게까지 폭리를 취한다고 보긴 힘들다.


그리고 부품의 조합이 컴덕후의 시각에서는 좀 이상한 경우가 많다. 일단 게이밍이라고 따로 표기하기 않는 이상 CPU는 퍼포먼스급인데 그래픽 카드는 저렴한걸 쓰거나 아예 인텔 내장 그래픽으로 때우는 경우가 꽤 있다. 특히 사용자가 성능을 체감하기 힘든 부품들(메인보드, 파워 서플라이, 그래픽 카드)을 저렴하지만 저성능의 것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게임용이 아닌 일반 가정용이나 사무용으로는 적합하다. 다만 파워 서플라이나 메인보드가 저가형이라는 주장은 컴알못들의 주장일 뿐인 경우가 많으며, 실제 대기업 컴퓨터의 경우 고장률이나 내구성이 회사 브랜드 가치와 직결되기 때문에 비록 고성능 파워나 메인보드를 채택하지 않더라도, 안정성이 보증된 우수한 제품을 채용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일례로 삼성컴퓨터의 경우 파워 서플라이로 AcBel이나 FSP의 제품을 사용하는 것이 그 예시라 하겠다.


메이커 제조사들은 부품 제조업체에서 S, A, B급을 받고 아키하바라나 용산 전자상가 등지엔 C급 부품을 공급한다는 설명이 잘못되었다는 설명이 있었는데, 전반적으로 반박이 잘못되었다. 수율을 따져서 제조하는 부품이 RAM 밖에 없다는 말부터 잘못됐다. RAM 수율, CPU 수율 등은 단일 실리콘 소자에 대한 수율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전기밥솥이나 냉장고 같은 개념이라고 보면 된다.


그래서 구매자가 하드웨어를 잘 알아도 부품에 각종 제한이 걸려있는 탓에 사양 변경이 힘들다. 당연히 오버클럭 같은 행위도 어렵다. 특히 대기업. 예를들면 S사라든지… 사실 메이커의 경우 오버클럭을 싫어할 수 밖에 없다. 원래 오버클럭 자체가 제조사가 보증하는 행위가 아닌데다가 오버클럭 시 뽑기(?)에 따라 달라지는 허용 범위를 넘으면 부품고장이 아니더라도 작동이 안되는데 그로 인한 워런티 서비스 소모가 장난 아니기 때문. 별거 아닐거 같지만 전국/전세계 단위가 되면 기업입장에선 머리꼭지 돌아갈 수 밖에 없다. 더군다나 2000년대 들어서 메이커 PC는 슬림형 및 일체형 위주로 시장이 편성되는데 오버클럭으로 인한 발열등을 생각해 보면 오버클럭 허용해주고 인식 상향되는 거 보다 발열로 인한 안정성 저하로 기업 신뢰도 깎아먹는게 더 클것이 뻔하기 때문에… 심지어 다나와 등을 보면 조립컴퓨터 시장에도 슬림PC에 120mm팬 파워에 고성능 그래픽카드(메인스트림급 이상 예를 들면 GTX760이라든가…) 근데 애초에 슬림형 PC에는 GTX 760을 끼울 수 없다. GTX 750 Ti 껴야된다 깔고 쿼드코어 CPU 오버클럭 하고는 케이스 냉각성능이나 파워 고장을 욕하는 유저를 근데 애초에 슬림형 PC에는 오버클럭이 가능한 메인보드 칩셋이 탑재되지 않는다 아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혼다 커브에 하야부사 엔진 얹고는 윌리 일어났다고 욕하는 격. 오버 잘되는 CPU 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극히 일부 컴덕후 관점에서 좋은 품질로 인식되는 것이지, 생산되는 제품에서 기본적으로 오버클럭으로 CPU를 동작시킬 것이 아니라면, 일반적인 시각에서는 애초에 주목할 특성이 못된다.


반박하는 내용으로 수율에 맞추어 납품하는게 다 다르다는게 말이 되냐는 내용이 있었는데, 애초에 이쪽 발주자는 일반인이 생각하는 것 보다 굉장히 세세한 스펙을 준다. 이 스펙에 맞추어 생산하다 보면 당연히 같은 라인에서 사양을 대단히 잘 만족하는 것, 그것보다는 못하지만 품질 측정에서 합격선 안에 들어오는 것, 제시된 스펙에는 못미치지만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는 것, 원래 스펙을 만족하지 못하지만 하위 모델로 변경하면 일반적으로 쓰는 데에는 문제가 없는 것, 부품 일부를 교체하면 스펙을 만족할 가능성이 있는 것, 재생 가능성이 없어 폐기해야 할 것으로 다양하게 나온다. 주문자가 요구한 스펙과 물량을 칼같이 맞추어 최소한의 자재와 설비, 노동력을 투입하여 생산하고 출고하는 것은 아마도 모든 제조업체의 이상이자 꿈이 아닐까 싶다. 현실은 이를 못따라주기 때문에 한 푼이라도 더 건지기 위하여, 주문자의 스펙을 만족하지 못하더라도 생산업체 자체의 내부 QC 기준을 만족하면 일반 유통용으로 출고하거나, 하위 모델로라도 변경하여 출고를 하는 경우는 당연히 발생하고 있다. 하위 모델로 변경해도 하위 모델의 QC 기준에 합격한 것 만을 출고하니 품질 문제는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단지 내가 가지고 있는 부품이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과 뭔가 살짝 다르게 생겼다거나, 겉은 똑같이 생겼는데 무게가 다르다거나 하면 이런 것일 확률이 높다. 즉, 할 수 있다면 주문자가 원하는 스펙을 만족하는 물량만을 생산할 자재와 설비, 인력을 말 그대로 딱 맞게 투입하여 생산하면 되겠지만, 이것이 대부분 불가능하며, 수량을 맞추다 보니 안맞는 잉여생산품이 나오고, 이 중에서 원 주문자의 까다로운 스펙을 만족시키지는 못하지만 일반용으로 사용해도 문제가 없는 품질을 보여주는 것들이 일반 소비 시장으로 흘러가는 것이다.


그 외에 가장 문제가 많다는 파워 서플라이도 델타와 FSP, Enhance등 정말 세계구급으로 알아주는 파워들을 쓴다. 쉽게 확인해 보는 방법은, 노트북 어뎁터의 제조사를 확인해보면된다. 헌데 파워고장이 잘 나는 이유는 업그레이드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메이커 PC의 경우 대부분 180~270W라는 빈약한 용량의 파워가 들어가기 때문에 조립PC에서 일반적으로 쓰이는 500~600W급에 비해서 상당히 빈약해 보여 싸구려 파워다! 라는 오해가 있지만 실제로 조립 피시라 하더라도 실제로 사용하는 총 용량은 200W를 넘기 힘든게 현실이다. 원래 고사양 그래픽 카드를 쓴다고 하더라도 50~60만원급의 제품이 아니라면 실제 컴퓨터 본체 풀 로드는 350W 안팍이다. 즉, 원가 절감을 위하여 제품의 풀로드를 정확하게 측정하여 그에 딱 맞는 파워를 넣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업그레이드를 시도하면 파워가 허용하는 용량 이상의 전력을 요구하게 되어 고장나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 어떤 회사의 경우는 하드 하나만 추가해도 파워 허용량을 넘어버리게 되도록 만들어 놓은적도 있다. 이것이 바로 원가 절감이다!! 물론 확장성은 매우 떨어지므로 조립할 때 400W 정도로 맞추는 건 충분히 고려할 만 하다.


DELL은 예외적으로 커스터마이즈로 구매가 가능하며, 이 덕에 사양 변경에 비교적 자유롭다. 대신 적어도 국내에서는 DELL의 A/S에 대해 불만이 많다. 델은 메이커긴 하지만 염가, 커스터마이징, 부실한 AS 등 조립식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해외에서 들어온 메이커인 HP, 소니, ACER등에 비하면 양호한 편이다.


최저가의 함정

컴퓨터를 아주 간략화해서 CPU, 그래픽카드, 마더보드라는 3개의 부품만으로 구성된다고 하고, 각각의 부품 가격을 11만원이라고 하자. 그럼 33만원으로 하나의 컴퓨터를 구성할 수 있다.


그런데, 예를 들어 

A 업체는 CPU를 할인해서 9만 원에 팔지만, 그래픽카드와 마더보드는 각각 11만 원에 판다. 

B 업체는 그래픽카드를 할인해서 9만 원에 팔지만, CPU와 마더보드는 각각 11만 원에 판다. 

C 업체는 마더보드를 할인해서 9만 원에 팔지만, CPU와 그래픽카드는 각각 11만 원에 판다. 


어떤 사람이 발품을 팔아서 A 업체에서 CPU를 B 업체에서는 그래픽카드를 C 업체에서는 마더보드를 샀다고 하면 정가보다 싼 27만원에 모든 부품을 구할 수 있다. 이것은 가격을 조사하고 최저가 업체를 찾아 다닌 그 사람의 인건비 만큼 가격을 절감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이 경우에는 조립을 직접 해야 한다. 게다가 CPU를 최저가에 올려놓은 업체 치고 단품 판매(= 메인보드 메모리 등과 세트로 구입하지 않아도 됨)하는 업체가 없다는 게 함정. 보통 최저가에서 10% 정도 더 줘야 CPU만 따로 구매할 수 있다. RAM, HDD도 최저가 업체들은 매장 가서 달라고 하면 안 파는 곳이 태반이다. 제대로 알아보고 오셨어야죠 호갱님 그 외 부품들은 현금영수증이 필요 없다면 거의 대부분 다른 조건없이 최저가에 구매 가능.


그런데, 한 업체에서 3가지 부품 모두를 구매하고, 조립을 의뢰하려 한다면, 세 업체 어느곳이든 정가 33만원 보다 비싼 34만 원을 부품 비용으로 지불해야 한다. (그리고, 조립 비용은 별도.)


실제로 대부분의 조립 컴퓨터 업체 경우, 한 업체가 모든 부품을 최저가로 갖추어 판매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에, 한 업체에 모든 부품을 주문하는 경우는 업계 최저가 보다는 어느 정도 더 비싸게 부품 비용을 지급할 수밖에 없다.


혹시 가격만 보고 여러부품을 각각 최저가로 파는 곳에서 살생각이라면 신중할 필요가 있다. 소비자 기준으로 만족할 만한 가격에 제품 을 파는 업체일 경우 최저가만 골라 사는것보다 5%안팍 정도 비싼 가격에 한 업체에서 같이 구매 할 수 있다. 

2004년부터 이글루스에서 '레진닷컴'이라는 이름의 유명한 블로그를 운영하던 블로거 레진(한희성)이 주도해 개발자 권정혁과 함께 만든 웹툰 전문 서비스. 


'재미있는 만화를, 쉽게 결제해서, 편하게 보게 하자'를 목표로 성숙한 독자를 위한 어른의 만화 서비스를 표방하고 있다. 2013년 6월 7일에 안드로이드 애플리케이션이 개장되었고, 이를 시작으로 동년 8월 17일에는 iOS 애플리케이션, 9월 21일에는 웹 사이트가 오픈되었다.


로고에 나온 견공은 이름이 있는데, '돈독이'라고 하며 마스코트로도 절찬 활용 중. 특별한 의미는 없고 대표 한희성 씨가 개를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스티키 몬스터 랩의 부창조가 만들어주었다고 한다.


무료로 볼 수 있었던 기존 웹툰과 달리 레진코믹스는 시작부터 부분 유료화 모델을 시도해 논란이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네이버, 다음이라는 거대 포털을 모체로 하는 '네이버 웹툰'과 '다음 만화 속 세상'이 양분하고 있는 웹툰 시장에 작은 신생기업이 진입한다는 것은 무모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우려의 목소리와 달리 레진코믹스는 출시 즉시 구글플레이 만화부문 매출 1위를 달성했고 앱스토어 도서부문 매출 1위를 달성했다. 2014년 매출이 103억 정도였고 서비스 개장 이후 2015년 5월 기준으로 월평균 매출이 20%씩 계속 증가하고 있다. 광고가 없다는 점을 생각하면 놀라운 성과이다. 유료인 만큼 수수료를 제외한 수익의 60% 이상이 작가들에게 원고료로 지급되는데 이에 따라 돈을 많이 버는 작가들도 나오기 시작했다. 연봉 환산 시 억대를 기록하는 작가들도 있다. <나쁜상사>를 연재하는 작가 '네온비'는 서비스 시작 1년 후 2014년 6월 첫째 주 누적 매출 2억8천만 원을 달성했다. 2015년 5월 기준, 레진코믹스에 등록된 만화는 700여 개며 연재 중인 만화는 240여 개로 국내 최대를 기록 중이다. 2015년 5월 기준 등록된 회원 수는 약 450만 명가량이고 월 방문자 수는 700만 명 정도이다. 벤처기업으로는 이례적으로 창업 첫해부터 흑자를 달성하여 미래창조과학부 워크숍에서 사례 발표를 하는 등 주목을 받았다.


레진코믹스를 운영하는 것은 벤처기업 (주)레진엔터테인먼트이다. 원래 레진 닷컴이라는 통합 콘텐츠 포털을 만들고자 했지만, 처음부터 여러 가지를 하는 것보다 하나를 선택해 집중하는 것이 좋겠다 판단해 만화만 서비스하는 레진코믹스를 시작했다. 제작비용이 적고 파급력이 좋으며 남녀노소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레진코믹스의 성장에 따라 영화, 애니메이션, 드라마, 소설, 영화 전반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실제로 보유한 만화를 기반으로 만드는 드라마, 영상 등의 영상화 작업을 진행 중이다. 영화를 본 관객들이 원작 만화를 보기 위해 다시 레진을 찾아오는 연결고리를 만드는 것이 목표이다. 2015년 후반에는 웹툰과 게임을 결합한 콘텐츠를 공개할 예정이다. 


2015년 미스터블루가 한국거래소 상장예비심사를 통과하여 상장에 성공하자 레진코믹스(정식명칭 레진엔터테인먼트) 쪽으로 기업공개를 권유하는 증권사나 SPAC들이 줄을 서고 있다고..(...) 한국경제신문에서 내놓은 기사.

2015년 10월 라이트 노벨 레이블인 레진노벨을 창간하였다.일본 라이트노벨을 직접 번역,출간을 한다고 한다.

2015년 상반기까지는 레진에 대한 평가가 아주 좋았으나, 2015년 9월 들어서 원고료 관련 논란, 루리웹 여론조작 사건 등으로 인해 이미지가 많이 하락할 듯 하다. 

여담으로, 밑에 있는 레진코믹스 연재작의 목록이 업데이트 된지 꽤 지났다. 할일이 없는 위키러는 가서 빨리 업데이트 하자.


2016년 상반기부터 백합에 대해 상당히 집중적인 섭외를 하고 있다. 한국시장에서 백합 장르가 많지 않은 것을 생각하면 굉장히 이례적이면서 차별화된 모습인데 웹툰뿐만 아니라 조아라에서 백합 소설로 인지도가 높은 소설가들까지 연재제의를 하며 많이 포섭한 상태이다. 4월초부터 웹툰이 벌써 3개나 연재를 시작했으며 6월까지 천천히 웹툰과 소설이 정식연재를 하는만큼 한국 백합덕들의 관심과 기대를 한몸에 받는 중. 백합이라는 장르가 한국에서 이제 마이너는 아니더라도 메이저는 아니기 때문에 한국백합덕들의 수요에 비해 공급이 적다. 그 탓에 굉장히 목메는 편이고 정보교환에 굉장히 목숨걸고 찾아다니는 편인데 그만큼 한국에서 백합을 즐기는 것은 언제나 갈증의 연속인 편. 이러한 상황에서 레진 코믹스가 작정하고 백합웹툰과 소설의 연재제의하는 것에 공식적인 표명은 없지만 이미 조아라의 소설작가들부터 웹툰을 결정한 작가들의 레진에서 정식연재 제의를 했다는 정보가 마구 쏟아지고 있는 탓에 작가들 중에서 어디서 정식연재한다고 밝히지 않더라도 현재 자연스레 레진 코믹스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추세다.


특징


네이버에서 북스 설립을 통해 실행했던 "부분 유료" 모델을 조금 더 본격적으로 도입했다. 유료화 모델 자체는 네이버 북스에서 신과 함께등으로 2013년 초에 큰 수익을 거둔 바가 있다.


기존 웹툰 서비스와 레진코믹스의 가장 큰 차이는 처음부터 유료 모델로 시작했다는 것이다. 기존 웹툰들은 모체인 대형 포털(네이버, 다음, 네이트 등)에 트래픽을 가져다주는 목적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대체로 무료로 제공되었다. 목적이 이러하다 보니 포털 서비스사들은 만화 작가들과 수익을 나누는 데 소극적이었다. 이러한 한국 웹툰 시장의 구조적 문제와 악순환을 개선하기 위한 유료화 시도도 있었지만 이미 웹툰은 무료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는 네티즌들의 외면으로 실패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레진코믹스는 처음부터 대형 포털과 독자적인 웹툰 전문 플랫폼을 기반으로 유료화 모델을 도입했고 안정적인 수익을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레진코믹스의 유료화 성공 원인은 크게 네 가지로 평가할 수 있다. 첫째는 콘텐츠의 질이다. 레진코믹스의 이성업 총괄 이사는 콘텐츠의 질을 좋게 유지하는 것이 최고의 마케팅 방법이라고 말한다. 웹툰 이용자들이 돈을 주고서라도 보고 싶을 만큼 수준 있는 웹툰을 제공한다면 자연스럽게 지갑을 열 것이라는 말이다. 유료화 성공의 두 번째 이유는 성인 독자들을 표적화 했다는 것이다. 레진코믹스는 '성숙한 독자들을 위한' 웹툰 서비스를 표방하고 있다. (2015년 5월 기준) 전체 웹툰의 20% 정도가 19금 아이콘을 단 성인웹툰인데 성인 웹툰은 거의 유료로 결제해야만 볼 수 있다. 10대보다 구매력이 높은 성인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세 번째로 레진코믹스는 결제 과정이 매우 간단하다. 레진 코믹스 앱은 결제하기 위해 페이지를 벗어날 필요 없이 앱 안에서 곧바로 코인 결제를 할 수 있다. 웹사이트도 모바일 결제, 문화 상품권 결제 등의 방식도 제공한다. 마지막으로 부분 유료화 전략이 매우 영리하다. 유료 콘텐츠의 종류는 두 가지인데, 무조건 결제해야만 볼 수 있는 웹툰이 있고, 일정 시간이 지나면 무료로 풀리는 웹툰이 있다. 성인을 대상으로 하거나 이미 높은 인지도를 가지고 있는 작가의 웹툰의 경우 전자에 해당하는데 기본적으로 인기가 많아서 완전 유료임에도 불구하고 이용자가 많다. 대다수의 웹툰은 후자에 해당한다. 7일을 기다리면 무료로 다음 편을 볼 수 있지만, 300원~500원만 지급하면 당장 다음 편을 볼 수 있으므로 유료로 결제의 유인이 매우 높다.


한국콘텐츠진흥원(KOCCA)에서 2015년 6월 발표한 <웹툰 산업 현황 및 실태 조사>는 '레진코믹스로 시작된 웹툰 전문 플랫폼이 유료 기반 서비스로 작가와 일정 비율로 수익을 배분하는 시스템을 이용하여 작가 수익시장 활성화에 큰 기여를 했다'고 평가했다.


어른의 만화 서비스를 모토로 삼아 다른 웹툰 사이트와 상당히 작품의 방향성이 다르다.


폭넓은 독자층에 호감을 살 수 있는 작품을 주로 연재하는 네이버 웹툰, 다음 만화속세상과는 달리, 레진코믹스의 연재작품은 대체로 대중성보다는 작품성 및 작가의 표현의 자유를 중시하여 주제와 장르와 관계없이 다양한 작품을 연재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 때문에 타 웹툰 서비스였다면 연재되지 못했을 비주류 소재의 작품이 많은 편. 특히 백합계에서는 거의 독점 수준으로 작품들을 쓸어가고 있다.


레드렌의 마녀도시 리린이야기처럼 완결이 이미 났었던 작품부터, 도전만화의 이너프 같이 다른 곳에서 연재 중인 작가를 스카우트해온 작품, 레진에서 직접 끌어온 나의 보람이나 봄빙수 등까지 다양하다. 백합계 커뮤니티들에서는 가뭄에 콩 나듯이 나오던 백합물이 잘 나와주니 좋다는 사람도 있지만, 너무 싹 쓸어가는 게 아니냐고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 향후 레진코믹스의 플랫폼이 흥행에 성공할 경우에는 웹툰 작가의 자유 연재 성향이 더 강해질 것으로 보인다.


2015년 7월 31일 기준으로 1위작중 19금은 화(포미닛), 금(불타는 감자), 토(핸드 플레이), 일(쉐어하우스), 열흘(몸에 좋은 남자) 5개의 작품이 들어가 있고 TOP100에서도 10위안에 들어가있는 19금 작품은 6작품이나 된다. 확실히 2014년과 비교했을때는 19금 작품의 득세가 많이 줄어든것을 알 수 있지만 아직은 19금 작품의 아성을 넘기에는 부족한것 같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국 레진 먹여 살리는건 19금인듯하다


작가층은 신인과 기성작가가 고루 섞인 편으로 각종 유사 포털 사이트에서 실제로 프로 작가로 일하거나 혹은 거기에 따르는 실력을 이미 갖췄다고 판단되는 사람들을 모았다. 네이버 도전만화 등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유명 아마추어 웹툰들을 다수 끌어왔기 때문에, 해당 작품들의 레진코믹스 연재 공지가 올라올 때마다 진작에 작가를 데려가지 않은 네이버를 마르고 닳도록 까는 댓글들이 도배되고 있다.


최근에는 루리웹의 창작만화 게시판에 활동중인 유저들 중 작품성이 있다고 생각되는 작가들도 섭외하고 있다. 가령 이런 경우라던가 이런 경우... 한두 명이 아니라 그런가 해당 작가분을 포함한 다른 레진당한 작품에도 레진이 또..!!라던가 레진당했다!!나 레진이 또 납치해갔다!!! 라는 덧글이 심심찮게 달린다(...).


완전유료 작품과 무료 작품으로 나누어지며 코인을 사용할 경우 무료 작품의 아직 공개되지 않은 연재분의 잠금을 먼저 해제하거나 유료 작품을 열람할 수 있는 시스템. 코인을 구매할 경우 고화질로 볼 수 있다. 보통 한 회당 가격은 2 코인이며 완결되면 3 코인으로 증가한다. 구글 플레이 결제를 한 번이라도 했던 사람이라면 구글 계정에 저장된 카드 정보와 연계가 되어 터치 한 번으로 결제할 수 있다.


또 결제를 통해 잠금을 해제했더라도 그다음 비공개분의 해금일이 당겨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해금될 때까지 한 달을 기다리든가 완결될 때까지 계속 결제해서 보라는 소리 무료 웹툰은 주로 1주에 1회 공개되지만 잠겨져 있는 비축분의 상황에 따라 격주 1회로 변경되기도 한다.


외전 같은 경우 포인트로 볼 수 있는데 이 포인트란 게 처음 가입할 때 100P를 준 다음 충전할 길이 거의 없다. 게다가 이것도 모바일 앱을 통해 가입할 경우에 한해서다. 코인을 고액 충전할 때만 포인트를 얻을 수 있기 때문. 100P 이상을 얻으려면 3만 원 이상을 충전해야 한다.


유료 결제 만화가 있는 만큼 로그인 할 수 있는 기기 수를 제한하고 있다. 최대 5개의 기기만 사용하게 되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안드로이드 기기의 경우 커스텀롬을 깔아 쓰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 커스텀롬이 다르면 다른 기기로 인식하므로 주의해야 한다. ADB나 백업 앱 등을 이용하여 기존 롬에서 백업 후 복원하는 것이 좋다. "로그인 허용 횟수를 초과했습니다"라고 나오며 로그인이 안 될 경우 레진코믹스 홈페이지에서 기기 리스트를 리셋할 수 있다.


수익구조

레진코믹스는 헤비 유저들을 주 고객으로 삼고 있다.


달리 말하자면 기존에 만화책을 사서 보던 독자나 특정 작가의 열성팬을 공략하는 것이다. 좀 더 다수의 독자를 확보하는 방식이었다면 광고를 붙여 트래픽을 발생시키는 식으로 나갔겠지만, 레진코믹스는 다음 분량을 빨리 보고 싶어하는 유료 독자를 확보하기 위한 전략을 취했다.


이 방식이 기존의 트래픽 발생으로 사이트의 이용 시간을 높이는 방식을 쓰던 포털의 웹툰과는 차별화되는데, 레진코믹스가 등장하자 기존의 포털 웹툰들은 수익이 발생치 않는 (그러나 트래픽은 만들어 포털에 도움은 되는) 베스트 도전의 작품들이 광고를 붙이는 게 가능해지기도 했다.


이와는 별개로, 레진코믹스가 시행 중인 연재 종료 작품/사전 업로드 분량의 유료화는 네이버나 다음도 이미 시행 중인 것들이다. 다만 포털들이 다수의 라이트유저를 붙잡는 게 가능한 데 비해, 레진은 신규로 헤비유저를 들이는 게 가능하냐는 과제가 있다. 최근 레진 광고 그림이 야한 게 다 이유가 있다.


가입자 수는 2014년 5월 기준 100만이고 이 중 실제 액티브 사용자는 월 40만 명, 하루로 치면 10~15만 명 수준이라고 한다. 연인원이 아닌 실제 사용자를 기준으로 하는 것이다. 그중 실제로 유료결제를 하는 비율은 7% 정도로 네이버나 다음의 3~5%보다 높다. 관련 인터뷰


하지만 한 편당 3 코인을 결제해야 하는 가격은 부담이 되는 게 사실. 보통 잡지 연재도 8~9주간의 연재분을 모아 만화책 1권이 나오는 것을 생각해보면 레진에 있는 모든 만화는 단행본이 아닌 사이버상 재화임에도 불구하고 1권당 약 5천 원의 가격을 지급해야 한다.


이처럼 높은 가격으로 인한 낮은 접근성은 레진코믹스가 가지고 있는 단점이라고 볼 수 있겠다. 레진코믹스에 연재되고 있는 수준급의 만화들이 당장 네이버나 다음에서 연재된다면 더 높은 인기와 관심을 받을 것이 분명하고, 수익 면에서도 영화화, 드라마화 등의 수익구조로 갈 수도 있다는 의견들도 많다.


작가의 수익

2013년 10월 말에는 레진코믹스를 통해 억대연봉을 받는 작가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면서 새로운 수익 모델로서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는 기사가 나왔지만, 아직 1년도 안 됐는데 연봉을 논하다니 말이 안 된다는 논란이 생겼다. 이후에 나온 공식인터뷰에서 해명하기를 월매출 천만 원을 넘는 작가가 있어 연봉 1억이 넘는다고 표현했다고 한다. 해당 인터뷰 이 말은 그 당시까지는 진실이 아니었으나 2014년 중순쯤에는 진실이 되었다.

2014년 6월 1주년 기념으로 순수익을 공개했는데 나쁜 상사의 네온비 작가가 1년 동안 2억 8천여만 원의 순수익을 올렸다. 세금과 수수료를 제외하고 작가가 가져간 순수익이 2억 8천여만 원이라는 것. 2014년 말쯤에는 네온비 작가가 순수익 4억 원을 달성했다.[2]

임금은 수익쉐어와 기본급중 많은 금액으로 지급된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독자들이 구입한 코인수가 기본급보다 많다면 그 돈이 입금되고, 기본급보다 적으면 기본급이 입금되는 식. 인기작가는 돈을 쓸어담는 데, 인기없는 작가는 생활비도 못버는 양극화를 막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 그래도 인기작에만 수익이 몰리는 건 어쩔 수 없었는지 2015년 8월경부터는 수익쉐어를 코인당 70원에서 50원으로 줄이는 대신 기본급을 150만원에서 200만원으로 올렸다. 사실상 인기작가의 돈을 떼서 비인기작가에게 주는 정책이었지만 작가의 수익쉐어가 줄어든다는 것 때문에 갑질논란이 일어났다.

레진코믹스 집단 환불 및 탈퇴 사태와 맞물려 기본급 200만원을 받는, 다시 말해 기본급 이상의 수익을 내지 못하는 일부 레진코믹스 소속 웹툰작가들이 트위터에 유급 휴가를 주장하고토가시 요시히로와 오다 에이치로 등 일본의 거물 만화가들과 자신들의 처우를 비교하며 200만원으로 설정된 기본급의 인상을 주장해 빈축을 사고 있다. 프리랜서의 개념을 제대로 알고는 있는 것이냐는 비판, 실력은 일본 아마추어 만화가에도 미치지 못하면서 작품을 질을 향상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이기는 커녕 대접만 일본 프로 만화가처럼 받고 싶어하는 것이 가당키나 하냐는 비판, 그동안 이들이 주장한 '독자를 배제한 금전의 순환구조'가 이제야 이해된다는 비판공산주의가 왜 망했는지 알겠다는 비판이 다수.

상술한 기본금 제도는 사실 취지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다. 기본금을 제공함으로서 일종의 안전망을 만들게 되고 이를 통해 작가들이 비교적 안전하게 그림을 그릴 수 있기 때문이다. 작품성이 뛰어나지만 대중성은 떨어지는 작품들, 즉 수익률이 떨어지는 작품들을 그리는 작가들도 기본금을 통해서 생계를 어느정도 유지하고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작품의 다양성을 유지하고 포텐셜이 있는 작가들이 대성하기 전까지 뒷받침해준다는 면에서 제도 자체는 나름대로 괜찮다. 문제는 앞서 언급했듯이 일부 작가들이 주제파악을 못하고 날뛰는 것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회사에서는 작가들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지원을 해주는 것인데도 일부 개념없는 작가들이 이에 불만을 제기한 것이다.


세계만화 공모전

2014년 9월 17일부터 12월 17일까지 3개월간 제1회 레진코믹스 세계 만화 공모전을 개최했다.

해당 공모전에는 클립 스튜디오 페인트, 와콤, 엔씨소프트, 판타지오가 참여하는데 혜택도 파격적이고 응모 조건까지 파격적이다. 공모전 수상 금액이 대상(1명) 1억 원, 최우수(1명) 2천만 원, 우수(10명) 3백만 원이다.(총 수상자 12명) 단 상금 수상자는 레진코믹스에서 독점적으로 일정 기간 연재를 진행하는 것이 조건이며, 상세 조건은 별도 협의를 진행하게 된다고 한다. 상금에 +한·일 동시 연재가 기본 혜택에 수상 되면 게임화 검토가 진행되고 영상화도 진행된다. 판타지오가 검토 및 진행을 추진한다고 한다.

응모조건은 성별, 나이, 직업, 데뷔 여부도 상관없이 프로도 참여 가능, 1인 복수 작품, 복수 장르가 가능하고 원고 형식도 자유이며 나이, 장르도 제한이 없다. 응모 작품 수도 무제한이다. 더불어 응모자(예정자 포함) 전원에게 만화, 삽화 제작 툴 'CLIP STUDIO PAINT EX' 3개월 체험판을 선물한다. 그냥 기간까지 보내면 모두 심사대상에 들어간다. 발표일은 2015년 1월 30일이다.

2015년 1월 30일에 발표가 됐다. 대상은 은송[4]의 기도가 수상했다. 기생들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으로 출판만화의 형태로 작성되었다.

최우수상은 김민소의 Delicious가 수상했다. 우수상은 13명. 한국인 10명에 일본인 2명, 중국인 1명이다.


편집부의 위기관리 능력

2016년 웹툰계 전체를 대상으로 벌어지고 있는 유래없는 보이콧의 시작은 클로저스 티나 성우 교체 논란에서 박지은을 비롯한 네이버 웹툰측 웹툰 작가들의 폭언으로 시작되었지만 사태를 키운 것은 레진의 애제자의 작가 김영조의 도발 트윗으로 시작된 레진 작가들의 폭언 행진이었다. 레진 소속 작가들의 폭언에 분노한 독자들은 트윗으로 작가들과 논쟁을 벌이는 것을 넘어 일부 독자들은 레진코믹스를 탈퇴하기까지 했지만 기존의 레진 작가들이 조롱을 멈추지 않았을 뿐 아니라 다른 레진작가들까지 조롱 행렬에 가세하여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고 결국 독자들은 아예 웹툰 전체를 박살낼 각오로 강도높은 보이콧 운동을 벌이게 되었다.


문제는 일련의 사건들이 레진의 편집부가 작가들의 SNS를 조금이라도 관리했다면 이 정도로 크게 번지지는 않았을 일이라는 것이다. 하다못해 문제를 파악한 순간 레진 측이 작가들의 SNS를 통제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면 비난은 일부 작가들에게 집중되었을 뿐 독자들은 실상을 잘 모르고 넘어갔을 것이다. 어찌보면 전화위복? 하지만 SNS에서 레진 작가들은 마치 스스로 불에 뛰어드는 불나방인 양 알아서 자폭했고 이 며칠간의 광란의 상황에서 레진 코믹스는 어떤 입장도 내놓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사태가 매우 심각해지고서야 레진은 작가나 관련인들의 SNS를 통제하겠다는 입장을 내놓았으나 작가들 대부분은 레진의 SNS 자제 요청을 무시하고 계속 SNS에서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이는 레진의 편집부가 작가들을 통제하지 못고 있다는 뜻인데 출판업계의 편집부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심지어 레진보다 규모가 영세한 AA미디어나 탑툰이 박달곰 문제에 대해 빠른 해명을 내놓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를 보이고 봄툰에서도 메갈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빠른 입장 표명을 내놓은 데 비해 레진의 대응은 너무 소극적일 뿐 아니라 신속하지도 않은, 유료웹툰 쪽 선발주자라는 명칭이 무색할 정도로 아마추어적인 대응이었다.


현재 이 일로 탑툰이 반사이익을 누리고 있다. 물론 탑툰에도 물의를 빚어 보이콧이 일어났고, 아예 웹툰을 좋게 보지 못하는 상황이지만 흠잡을데 없는 대처를 해서 보이콧이 멈췄고 이 일로 탑툰을 좋게 보고 있는데다가 레진을 탈퇴한 일부는 탑툰에 가입을 했다. 탑툰을 회의적으로 보는 입장에서도 레진코믹스의 대처보다 좋았다고 한다.


게다가 사건의 시발점이었던 네이버 웹툰 쪽의 경우 7월 25일을 기점으로 논란을 일으킨 작가들이 트위터에서 활동을 중단한 상태인데 이는 트래픽만으로도 돈을 벌 수 있기에 사실상 '철밥통'이라 불리며 독자 측에서도 보이콧 실력행사가 힘든 회사임에도 레진 측보다 먼저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사건의 확산을 막은 것이 확실하다. 이런 경쟁업계들의 모습과 달리 레진의 무기력한 대응은 매우 실망스러운 행위였다.


레진 측의 해명에 의하면 문제를 일으킨 작가의 수가 많고, 전부 중단시키고 코인환불을 해주면 큰 손해를 입는다고 한다. 하지만 지속적인 집단 탈퇴로 앞으로 독자들이 작품을 보면서 결재해서 얻을 수익이 깍인다고 생각하면 분명 이런 대처를 했어야했다. 정안된다면 작가들에게 사과문을 올리게해서 징계를 내리는 등 소극적인 대처라도 했어야 했었다. 

레진 편집부가 작가들의 행동을 통제하지 못하고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는 데에는 과거 몇몇 레진 작가들의 편집부 길들이기의 영향이라는 추측이 웹툰갤에서 나오고 있다

게다가 사건의 중심 인물 중 하나인 BU-NONG을 신작 작화가로 채용한 것이 드러나면서[21] 계속 아예 편집부 전체가 친 메갈이라고 비난받는 상황에 이르렀다. 현재 사건이 발생한 지 거의 한 달이 가까워지는데 논란이 된 인물을 자숙시키지는 못할 망정 신작 작화가로 채용하는 모습에 어처구니가 없다는 반응이 웹갤과 루리웹을 중심으로 나오고 있다.[22] 이 일때문에 다시 집단 탈퇴가 이루어지며 탈퇴했다는 인증이 나오고, 일부 과격한 사람들은 레바같이 인기있는 작가들에게 다른 플랫폼으로 이적했으면 좋겠다며 하소연하고 있다.[23] 근데 이런 상황에서 어떠한 해명이나 답변이 없고 작품을 내릴 생각을 안 하고 있다. 당장 탑툰에서 연재 예정이었던 카라차가 메갈을 지지한 것에 알게된 탑툰 측에서 작품을 내려 초동대처를 한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주고 있다. 

개요

휴대 전화의 한 종류. 스마트 기기란 응용 프로그램을 앱 스토어 등을 통해 설치할 수 있는 기기를 말하는데, 이에 따라 스마트폰의 기준이 결정된다. 컴퓨터에 상응하는 최고급 기능을 제공하는 스마트 기술이 휴대 전화에 이식된 플랫폼. PC와 휴대 전화를 합친 기계라고도 한다. 이 때문에 스마트폰을 손바닥 위에 놓고 쓰는 컴퓨터라는 의미의 팜톱(Palmtop)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그간 수 차례 시도돼왔던 스마트 기술의 응용사례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자리잡고 성공한 사례다.

같은 운영 체제 끼리는 응용 소프트웨어가(application software, 흔히 앱(app)이라고 함) 호환이 되는 경우가 많고, 전화 기능 뿐만 아니라 개발자 입장에서는 플랫폼이 규격화되어 있어 앱을 개발할 수 있고, 사용자 입장에서는 앱을 인터넷에서 PC를 거치거나 혹은 ESD(마켓, 앱스토어) 등 여러가지 형태로 스마트폰에서 바로 다운로드를 받아서 이용할 수 있다.

2010년 이후에 출시되는 휴대폰은 전화, 문자메시지, e-mail 이외에 인터넷 접속, 멀티미디어(동영상, 음악) 파일 재생, e북, 카메라, GPS 등의 기능이 보편적으로 제공된다. 다수의 휴대용 디지털 기기가 전부 스마트폰 하나로 대체되는 궁극의 디지털 제품으로 진화하고 있다.

스마트폰 이외의 일반폰은 스마트폰과 구분하기 위해 피처폰이라 부른다. 피처폰도 당연히 자체 OS 및 플랫폼(애니콜랜드나 WIPI가 대표적)을 가지고 있고 애플리케이션을 따로 설치할 수 있는 모델도 있으나 플랫폼끼리의 애플리케이션 호환이 그리 쉽지 않다. 심지어 같은 제조사(또는 같은 제조사의 같은 모델)라고 할지라도 모델이나 통신사가 다르면 애플리케이션 호환성을 보장할 수 없어서 디버깅 후 모델에 따라 일일이 고쳐줘야 한다. 또 고급형인 경우 웹서핑이나 멀티미디어 재생 정도는 가능하나 스마트폰에 비해 저성능이고 여러가지 면에서 스마트폰의 개방적인 연결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물론 2010년대 초 과도기에는 운영체제만 임베디드 시스템을 사용하고, 스펙은 당시 기기들보다 오히려 더 좋은 스마트폰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대표적으로 LG전자의 MAXX. 물론 이들은 굉장히 고가였기에 스마트폰과의 경쟁에서 얼마 가지 않아 패해 시장에서 밀려나게 된다.

 

최초의 스마트폰은 1992년 발표된 IBM의 "사이먼"(Simon)이며, 1993년 애플은 뉴턴 메시지 패드를 출시하였다. 1999년 삼성전자는 애니콜 풀터치 PDA폰(sch-m100, sph-m1000)이라는 웹 브라우징과 이메일 확인이 가능한 스마트폰을 발매하였으며, 인터넷 서핑 기능은 물론, 메일, 어학사전, 성경, 불경, 찬송가, 게임 등의 실용적인 각종 애플리케이션까지 기본 설치의 형태로 제공하였다. 이후에 동년 모토로라도 이메일 확인 기능이 있는 전화기 "아이덴 i1000"을 출시하였다.

실제로 대중에게 어느 정도 의미 있는 수량이 보급된 것은 2000년대 들어서 PDA 제조업체들의 전화모듈 내장을 통한 PDA폰의 유통 이후였다. 사실 초기엔 이 둘은 서로 독립적으로 분류했다. 이 시기 한국에서 유통/판매되던 PDA폰들은 PDA + 전화모듈 부착의 형태였기 때문에 매우 크고, 수백만원 상당의 고가였다.
셀빅XG는 PDA계에서 나름 입지를 구축하고 있던 한국 기업 제이텔이 하드웨어부터 OS까지 전체 국내 개발한 것으로 관심을 끌었는데, 성능은 강력했고 실용적이었지만 점점 복잡해지는 업계와 핸드폰 산업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폰 모듈이 장벽으로 작용하여 지속되지는 못했다. 게다가 PDA는 얇은데, PDA폰의 두께는 마치 워크맨과도 같아서(...) 불편했고 멀티미디어 기능은 MP3P 기능이 유일했는데 이걸 쓰려면 폰모듈을 떼내야했다.
이후 제이텔은 코오롱그룹에 인수되어 사명을 셀빅으로 고친 다음 마이큐브 V100을 개발, 시판하나 종전기종과 다른 바탕으로 개발되었기에 앱 호환성이 전무하였다. 또한 당시 SK텔레콤의 서비스와 겹치는 기능을 죄다 거세당해버렸다. 당시 수입되던 PPC 계통보다 기능이 부족하여 그대로 사장되었고 셀빅도 법인등기만 유지하는 수준으로 추락한다.

사실 삼성전자는 넥시오라는 PDA폰 라인업을 더 가지고 있었다. B2B목적으로 출시한 상품이었는데 SKT용으로 1개기종(S151) KT용으로 2개기종(S150/S155)을 출시하였으며 마지막 기종인 XP40은 와이파이 전용으로 출시되었다. 이들은 특이하게 Windows CE계열로 출시되었는데 당시 기준으로는 굉장히 거대한 5인치라는 규격을 자랑해서 다 기능 휴대번화보다는 현재의 윈도우 태블릿과 같이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고 사용자들이 전화기능을 쓰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이 기종들은 특이하게 USB A타입 포트를 장착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착안해서 폰 모듈은 떼어내버리고 USB 허브를 안에 빌트인해서 사용하는 일이 많았다. 서자취급도 제대로여서 UMPC 출시 직전에는 모든 공식 AS가 중단되며 그대로 소멸되었다.[2]

2002년 정통부에서 "통신사 보조금 지급 금지" 를 한후 잠시 PDA폰 인기가 사그라들었으나 2003년 PDA폰/스마트폰에 보조금 지급을 허가하여 얼리아답터나 업무용, 산업용 위주로 판매가 지속되었다. 당시 Windows Mobile의 전성기였고, 그 위주로 시장이 재편되어갔다.

•2003~2005년 윈도우 모바일 스마트폰들이 본격적으로 출시되었다. 하나같이 덩치가 컸다. 사이버뱅크 POZ(포즈), 삼성 M400/4000, HP RW6100, 삼성 M420/4300 등이 있었다.

•2006년 드디어 슬림하지 않지만 그나마 휴대폰같은 작은 PDA폰이 나왔다. 삼성 M450/M4500(2G폰)

•배터리가 방전되면 폰이 초기화가 되었다. 저장소가 RAM이었기 때문에 연락처 이메일 메모 그리고 설치한 앱들까지 다 날아갔다.

•윈도우 모바일에서는 터치가 되면 "PDA폰", 터치가 안되면 "스마트폰"(삼성 SCH-M600, WM for Smartphone)이라고 지칭되었었다. 물론 지금은 2007년 해외에서 삼성 블랙잭이 잭팟을 터트리면서 그동안의 기술시험기/ 구색맞추기/ 알 사람만 사는 식이 아닌 본격적인 스마트폰 마케팅이 시작되었다. 그렇다 해도 2009년 까지는 여전히 햅틱 아몰레드 같은 피처폰이 주력이었지만.

•2007년 네임드 PDA폰/스마트폰이 출시되었다.


•2008년 삼성 옴니아의 출시로 본격적인 스마트폰 대중화 시대가 서막을 올랐고, 9시 뉴스 시보에 삼성 옴니아(2008), 옴니아 II(2009)가 뜨기 시작했다.

 

스티브잡스의 스마트폰

 

그러다가 2007년 애플이 스마트폰의 정의를 재정립하기 시작했다. 아이폰이 없었다고 해서 스마트폰 또한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은 억지에 불과하지만, 아이폰은 최초로 다양한 멀티터치 제스쳐를 지원하는 OS를 탑재하고 GPS와 앱스토어 IOS를 출시하여 현대적인 스마트폰의 개념을 정립했다고 할 수 있다.

원래 스마트폰은 PDA폰이라는 이름처럼 일종의 사무용 기기라는 컨셉이 강했다. 따라서 사용 계층도 주로 비즈니스맨들이였다. 대표적으로 블랙베리. 스마트폰이라곤 하지만 현재처럼 다용도 만능 기기라는 카테고리와는 맞지 않게 사용 용도가 상당히 제한적이었다. 아이폰 역시 1세대가 막 출시됐을 때는 인터넷, 메일, 달력, 문자 등 기본 앱만 구동할 수 있는 비싸기만 한 사무용 기기에 가까웠으나 후에 OS 업데이트와 함께 앱스토어가 추가되면서 사용용도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 것이다. iOS가 고전적으로 수 년간 쓰여온 Windows Mobile의 아성을 무너뜨릴 수 있었던 이유는 애플리케이션을 능동적으로 잘 활용할 수 있었다는 것과, 당시에 WM과 비교될 만한 높은 최적화 수준을 보여주었다는 점 등이 있다.

이와 같이 새로운 스마트폰이 기존 피쳐폰의 한계를 단번에 뛰어넘을 수 있었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하나는 물리적 버튼을 없애고 정전식 멀티터치 디스플레이를 장착함으로써 소프트웨어의 UI에 엄청난 유동성을 부여했다. 결정적으로 두번째 이유는 높은 수준의 OS이다. 당시 iPhone OS(현 iOS)는 깔끔한 UI와 발전한 기능을 선보임으로써 비슷한 Windows Mobile 등의 기존 모바일 OS보다 진일보했다는 평을 받았다. 세번째 이유로, 어플리케이션 스토어를 위시한 모바일 개발자 지원과 새로운 하드웨어적 기준 마련에 있다. 스마트폰은 멀티터치 제스처와 물리적 버튼의 부재, 다양한 센서, 고성능의 모바일 CPU와 GPU를 장착함으로써, 그에 걸맞는 수많은 종류의 애플리케이션 제작을 가능케 했다. 결과적으로 앱스토어에 우후죽순 올라오는 다양한 소프트웨어가 스마트폰에 바로 설치될 수 있었고, 이는 스마트폰이 단순한 전화기를 넘어선 "만능 기기"로 재분류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내었다고 할 수 있다.

 

애플VS구글


2009~2011년의 짧은 격동기 후, 스마트폰은 애플의 아이폰과 삼성 갤럭시의 양강체제 속에서 국내의 LG전자, 팬택을 비롯한 제3, 제4, 제5의 안드로이드폰 제조사들이 그 뒤를 잇는 구성으로 마켓이 형성되게 된다. 안드로이드, 혹은 iOS 외의 OS를 가진 스마트폰은 시장 점유율이 상당히 저조해졌으며, 심지어 한때 세계 최고 점유율을 자랑했던 심비안 단말기는 전량 단종을 맞이하고 노키아는 인수당하고 말았다. 국내에서는 우스개소리로 카카오톡이 안되는 폰은 스마트폰이 아닌 것 취급 당하고 있다. 자세한 설명은 하단에 기술되어 있다.

2015년 8월 기준 세계 스마트폰 시장은 OS로 살펴볼 때 안드로이드와 iOS의 양강 구조이다. statcounter 기준 안드로이드 65.56%, iOS 19.03% 이다. netmarketshare 에서는 스마트폰과 태블릿 컴퓨터까지 합산해서 안드로이드 51.65%, iOS 41.18% 이고 3세계 시장의 약진으로 안드로이드의 비중은 끊임없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 기업에서 사용되는 모바일 OS의 경우 iOS가 비교적 높은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으며, 특히 iPad의 경우엔 기업에서의 선호도가 상당히 높다. 이와 경쟁할 태블릿 컴퓨터는 삼성전자의 제품들이나 구글의 넥서스 태블릿들을 제외하면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2014년 2분기에는 안드로이드의 시장 점유율이 높이 올랐지만 iOS가 여전히 60% 가까이 차지했다.출처 현재는 점유율이 우열을 가릴 수 없이 거의 비슷한 수준이기는 하다.

전체적으로 안드로이드의 시장 점유율이 전체 대비 과반을 차지하여 iOS에게 확실한 우세를 점하고 있지만, 한국은 그 정도가 더욱 심하여 애플이 죽을 쑤고 안드로이드가 '사실상' 독점하고 있는 시장인데 15년 8월 기준 한국의 안드로이드의 시장 점유율은 78%가 넘고, iOS의 시장 점유율은 고작 20%를 겨우 넘기고 있다. 안드로이드 78.31%, iOS 21.50%. 출처 이것도 iPhone 6의 출시의 여파로 11%대에서 21%대로 크게 오른것이다.

Windows Mobile를 사용하는 옴니아 시리즈를 말아먹은 삼성은 갤럭시 A(2010)와 갤럭시 S(2010)와 갤럭시 S II(2011)와 그 파생상품들을 물량공세로 쏟아냈다. 삼성전자-애플 간 고소전으로 국내외의 일부 유저들로부터 카피캣이란 오명도 듣긴 했지만, 이에서는 대부분 승리하고[4] 오히려 고소전으로 이름을 전 세계에 널리 알리기도 했으며, 아이폰이 가지 않은 길(대화면, 스타일러스)을 걸어 갤럭시 노트 시리즈의 대성공을 이끌어내어 전 세계 스마트폰 점유율 1등을 달성한다. 그 세력은 2016년 2분기까지 계속 이어져 내려왔다. 물론 이는 애플 vs 삼성의 양강체제이기도 하지만, iOS vs 안드로이드의 양강체제이기도 하다.

그 와중에 블랙베리는 점차 밀려나고 있으며, 전 세계를 호령하다시피 하였던 피처폰의 제왕 노키아는 MS에게 인수당했다. 그렇다고 MS의 Windows Phone이 잘나가는 것도 아니다. MS는 휴대기기용으로 소위 메트로 UI를 도입했다가 오히려 Windows 8을 말아먹을 뻔 했고, 이후 그냥 인텔 x86 프로세서용 OS에만 집중하게 되었다. 현재는 사실상 지원과 개발을 포기하고 명맥만 이어가는 상태다. OS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깨달아 WebOS로 전세역전을 도모했던 Palm은 두드러진 행보를 보이지 못하고 있으며, 한편으로 삼성이 참여한 바다(운영체제)와 타이젠도 삼성 Z1 등의 저가 단말기로 인도 등의 미개척 시장에서 점유율을 상당히 높이는 성과를 거두었지만 하였지만 크게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안드로이드에 올인한 모토로라는 꽤 버텼지만, 결국 레노버에 휴대전화 사업이 매각되었다. 그래도 스마트폰 점유율 3위 이하 상위권 제조사들은 대부분 안드로이드 OS를 채용한 제조사들이다. 국내에서도 일찌감치 안드로이드에 올인한 팬택이 한 때 LG 전자를 앞지르기도 했다. 다만 팬택은 해외 진출에 실패하고 넓은 시장을 확보하지 못해 외부 요건에 회사가 굉장히 어려워졌다가 다시 살아났다.

저가 공세를 앞세운 중국/대만쪽 휴대폰 제조사들의 추격이 거세다. 한때 HTC 휴대폰들이 두드러졌다가, 화웨이, 샤오미의 제품들이 좋은 가성비로 주로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오늘은 만우절이다.

별다른 계획이 없었던 우리는 평소처럼 내 집에 모여서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오늘은 만우절이라서 우리는 한 가지 게임을 하기로 했다.

거짓말을 말하는 게임이다. 그리고 이야기를 안주 삼아 한 잔 시원하게 들이킨다.

톱타자로 내가 말문을 열었다.

여름에 헌팅 했던 여자가 임신하는 바람에 내가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물론 100% 거짓말이다. 하지만 전혀 얼토당토 말 같지도 않은 이야기는 금방 탄로 난다.

하지만 본인이 아니면 모르니까 거짓말인지 진실인지 모른다.

그래서 이런 자리를 빌려서 진실을 거짓말인 양 말하는 경우도 있다.

모두 순서대로 이야기했고 마지막 친구 차례가 왔다.

그 녀석은 맥주 거품을 할짝거리며 말했다.

[난 너희처럼 거짓말은 잘 못하니까, 하나 지어낸 이야기를 할게.]

[뭐야.. 아예 대놓고 거짓말을 하시겠다?]

[뭐 좋으니까 얘기해. 대신 지루하기만 해봐!]

친구는 바르게 고치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금부터는 친구의 이야기.

아침에 일어나보니까 아무것도 없는 하얀 방에 있었다.

왜 여기에 있는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그냥 깨고 보니 나는 거기에 있었다.

잠시 멍하니 상황 파악도 못하고 있는데 갑자기 천장 근처에서 소리가 들렸다.

[앞으로 나아갈 길은 삶의 길이며 인간의 업을 걷는 길. 선택과 고통과 결단만을 제공합니다.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여러 가지. 하지만 결코 모순됨이 없게 하도록.]

그리고 소리를 듣고 처음 알았는데 내 뒤에 문이 있었다.

문 옆에는 빨간색으로 전진이라고 쓰여 있었다.

[세 가지 선택이 주어집니다. 첫 번째, 오른쪽에 있는 TV를 끄는 것.

두 번째, 왼쪽 침낭에 들어 있는 사람을 죽일 것.

세 번째, 당신이 죽을 것. 첫 번째를 선택하면 출구에 가까워집니다.

당신과 왼쪽에 있는 사람은 풀려나지만,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죽습니다.

두 번째를 선택하면 출구에 가까워집니다. 대신 왼쪽에 있는 사람의 길은 끝입니다.

세 번째를 선택하면 왼쪽에 있는 사람은 풀려납니다. 축하합니다. 당신의 길은 끝입니다.]

[병신 같네..] 어떤 걸 선택해도 비극적이다. 나는 무서워서 심쿵심쿵.

어디에 사는지 누구인지도 모르는 수많은 생명이냐 아니면 바로 옆에 있는 누군가의 생명이냐.

그렇다고 세 번째 선택을 하긴 싫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로 죽긴 싫다. 한 명의 생명과 수많은 사람의 생명.

비교할 필요도 없다. ​침낭 옆에는 쇠 파이프가 있었다.

나는 조용히 쇠 파이프를 손에 쥐고 천천히 침낭 쪽으로 걸어갔다.

애벌러와도 같은 침낭을 쇠 파이프로 내리쳤다.

풕!!! 둔탁한 소리와 감각이 전해진다.

하지만 문이 열릴 기색은 없다. 다시 내리쳤다.

풕!!!!!! 얼굴이 보이지 않고 누군지 모르기 때문에 죄책감은 이미 사라진 상태.

다시 한 번 쇠파이프를 높게 들어 내리친다.

내리칠 때마다 고통스러운 듯 꿈틀거리는 침낭 속의 주인공.

마치 깨어나기 전의 나방 고치처럼 꿈틀거리는 모습.

그리고 어느 순간 문이 열렸다.

오른쪽 TV 화면에는 검은 눈을 한 귀신이 새침한 눈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다음 방으로 들어가니까 오른쪽에는 여객선 모형, 왼쪽에는 침낭이 있었다. 바닥에는 종이가 떨어져 있었다.

 

[세 가지 선택이 주어집니다. 첫 번째, 오른쪽에 있는 여객선 모형을 두 동강 내는 것.

두 번째, 왼쪽에 있는 침낭에 불을 붙일 것. 세 번째, 당신이 죽을 것.

첫 번째를 선택하면 출구에 가까워집니다. 당신과 왼쪽의 사람은 풀려나지만, 여객선의 승객은 죽습니다.

두 번째를 선택하면 출구에 가까워집니다. 대신 왼쪽에 있는 사람의 길은 끝입니다.

세 번째를 선택하면 왼쪽에 있는 사람은 풀려납니다. 축하합니다. 당신의 길은 끝입니다.]

여객선은 단순한 모형이었다. 일반적인 생각으로 이것을 부순다고 사람이 죽는 일은 없다.

하지만 그때 그 종이에 쓰여 있는 건 절대적인 사실이라고 생각했다.

이유 따윈 없다. 그냥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침낭 옆에 있던 작은 드럼통을 전부 비운 후, 준비되어 있던 성냥을 그어서 침낭에 던졌다.

침낭은 금세 불길에 휩싸였다.

나는 여객선 모형 앞에 서서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문이 열리길 기다렸다.

2분 정도 지났을까, 시간 감각 따윈 없었지만, 보통 사람이 죽을 정도의 시간이니까.

아마 2분 정도 걸릴 것이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다음 방에 들어가니까 이번에는 오른쪽에 지구본이 있고 왼쪽에는 또 침낭이 있었다.

나는 빠른 걸음으로 종이를 집어 들었다.

[세 가지 선택이 주어집니다. 첫 번째, 오른쪽에 있는 지구본을 부술 것.

두 번째, 왼쪽에 있는 침낭을 총으로 쏠 것. 세 번째, 당신이 죽을 것.

첫 번째를 선택하면 출구에 가까워집니다.

당신과 왼쪽에 있는 사람은 풀려나지만, 세계 어딘가에 핵이 떨어집니다.

두 번째를 선택하면 출구에 가까워집니다. 대신 왼쪽에 있는 사람의 길은 끝입니다.

세 번째를 선택하면 왼쪽에 있는 사람을 풀려납니다. 축하합니다. 당신의 길은 끝입니다.]

사고와 감정은 이미 완전히 마비된 상태였다.

나는 기계적으로 침낭 옆에 있던 권총을 주워서 침낭을 향해 쐈다.

빵.... 빵... 빵.. 빵. 총알이 발사될 때의 느낌이 짜릿했다.

생각보다 손쉬운 조작법이라 놀라웠다. 문은 이미 열려있었다.

침낭 속의 사람이 죽었는지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마지막 방은 아무것도 없는 방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출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조금 마음이 놓였다.

겨우 풀려난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러자 천장에서 또 소리가 들렸다.

[마지막 질문. 세 명의 인간과 이를 제외한 전 세계의 인간. 그리고 당신. 죽여야만 한다면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나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지금 왔던 길을 가리켰다. 그러자 또 머리 위에서 소리가 들렸다.

 

[축하합니다. 당신은 모순된 점 없이 길을 선택했습니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며 어느 누군가의 행복 뒤에는 어느 누군가의 불행이.. 그리고 누군가의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누군가의 죽음이 필요합니다. 하나의 생명은 지구 상의 모든 생명보다 중요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그것을 증명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생명의 중요함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하나하나의 생명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느끼도록... 출구는 열렸습니다. 축하. 축하.]

나는 그 소리를 듣고 안도감과 허탈감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온몸에 힘이 빠졌다.

나는 비틀거리면서 마지막 문을 열었다.

빛이 쏟아지는 눈부신 방을 향해 한 걸음 내딛는데 뭔가가 발에 걸렸다.

영정이 세 개 있었다.

그것은 아버지와 어머니와 동생의 영정이었다.

이제 끝.. 친구의 이야기가 끝났을 때, 우리는 침도 삼킬 수 없을 정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녀석의 이야기는 과연 뭘까. 이루 말할 수 없는 박력은 무엇일까.

자리에 있는 모두가 무시무시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나는 맥주를 그대로 들이키며 말했다.

[..... 그런 무서운 이야기는 그만해라. 거짓말 이야기를 하라고!]

그러자 친구는 나를 향해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그 표정에서 전신의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오는 전율 같은 두려움을 느꼈다.

그리고 친구가 입을 열었다.

카르마: 업보. 전생에서 저지른 행동으로 인하여 현세에서 받게 되는 응보


저와 아내는 어떤 결혼상담소를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이용하는 분들의 생각은 다양하겠지만, 저는 단순히 35살이 지난 독신으로 삶에 고독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부모님은 이혼했고 제가 성인이 되자 각자 재혼했습니다.

돌아갈 집도 없어서 어떤 계기로든 결혼하면 좋겠다는 생각에 등록했습니다.
하지만 기대는 하지 않았습니다.
결혼상담소를 기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저는 저 자신에게 전혀 자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학력도 그렇지만, 당시 가장 자신이 없었던 것이 직장이었어요.
고향에 본사가 있는 어떤 업체의 매장 판매원을 희망해서 지원했지만, 도쿄로 발령받았습니다.

정규직이지만, 특기와 자격이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라서
솔직히 언제 그만두게 되더라도 어쩔 수 없다는 심정이었습니다.

또 도쿄에서 취직했는데, 이쪽에 친구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매우 외로운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휴일에는 경마와 파칭코 등으로 시간을 보내고 저축은 하지 않았습니다.

솔직히 나는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 하는 불안에 휩싸였습니다.
이런 상태로 결혼상담소에 소개되면, 여성분들에게 무시를 받겠지요.
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계시는 많은 여성분의 눈은 매우 정확해서 (스스로 말하는 것도 한심하네요)
저에게 만남을 요청하는 여성분의 데이터는 거의 없었습니다.
그리고 운 좋게도 요청이 들어와도 실제로 만나기 전에 상담소에서 거절의 통지가 날라왔습니다.
물론 제가 만남을 요청한 여성분들도 모두 거절했습니다. 한 명을 제외하고는 말이죠.
그 한 사람이 나중의 제 아내입니다. 


아내는 저보다 나은 이력의 소유자였습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안 계시는 것 외에는 특별한 결점은 없었습니다.

실제로 만나봐도 아무런 특징이 없는 그런 여자였습니다.
남자의 입장에서 보면 재미는 없지만, 지극히 온후하고 오히려 가정적인 인상의 여자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녀에게 아무런 나쁜 인상은 없었습니다만,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건대,

아내도 아마 절 거절할 것으로 생각해서 적극적인 대화도 하지 않고 그날은 참으로 담담하게 헤어졌어요. 
그런데 며칠 후, 결혼상담소에서 그녀가 다시 만남을 희망한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저는 매우 놀랐습니다. 기쁜 마음은 물론 있었지만, 동시에 당황했습니다.

왜 나 같은 사람에게? 저는 그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나를 포함해서 몇 사람을 저울질 하는 건가? 아니면 사기나 다른 목적으로?
아니, 내가 돈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확실히 사기는 아니겠지.

그런 혼자만의 생각으로 저 자신을 부정했지만, 마음은 이미 끌리고 있었습니다. 

결국, 몇 차례 만난 후에 그녀는 이런 말을 꺼냈습니다.
"저는 친구도 없고 이런 것에 흥미도 없네요. 당신만 괜찮다면, 결혼식은 안 올려도 될까요?

아니면 일단 어머니에게 인사라도 드릴래요?"

이런 말을 여자 쪽에서 먼저 말하게 하다니. 한심한 녀석이라고 생각하는 당신의 비판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이제까지 만나면서 결혼에 관해서 구체적인 이야기를 가진 것도 아니라서

저는 눈알이 튀어나올 만큼 당황했어요.

그녀는 그런 뉘앙스를 마구 풍기고 있었는데 저는 전혀 몰랐다고 말하면 그만이지만,
솔직히 지금까지의 만남은 극히 표면적인 느낌으로 좋은 분위기가 된 기억도 없었고

지금 생각해보면 아내도 마치 무슨 상담을 받는 느낌의 만남이었습니다.
그래도 애초에 결혼을 생각하고 만남을 가진 저였습니다.

그녀에게 먼저 결혼하자는 말을 꺼내지 않은 것을 사과하고

다음 휴일에 당장 그녀의 집으로 인사를 드리러 갔습니다.

그녀의 어머니(현재의 장모)도 아내처럼 매우 온화한 인상을 한 분이었습니다.
저에게 인사를 받은 뒤에 "딸을 부탁합니다"라고 말씀하실 때, 저는 여우에게 홀린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혼인 신고를 하고 제가 살던 맨션에서 살기 시작했습니다.
아파트라고 해도 원룸식이었고 게다가 전세였습니다.

알게 모르게 단순히 동거하는 느낌이 들었지만, 아내는 전혀 불만스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쨌든 결혼 생활은 유지 되었고 저는 계속해서 제가 다니던 곳으로 출근했습니다.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예상대로 직장에서 인원 감축이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상사에게 불려가서 해고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저 말고도 몇 명 있었습니다.

다음 직장을 구할 때까지 다녀도 좋다는 조건이었지만, 저는 절망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걱정을 끼치기 싫어서 아내에게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어요.
당시에는 평일에 쉬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아내가 출근하면

몰래 구인 잡지를 보거나 직업소개소에 드나들거나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입니다. 아내가 저녁 식사 후에, 갑자기 말을 꺼냈습니다.
"일하기 힘드시죠. 만약 아이가 태어나면 당신이 평일에 쉬기 때문에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없어서 저도 외롭네요.

그래서 사무소의 구인광고를 봤는데, 이런 곳에 근무하면 저도 안심될 거 같아요..."
그리고 아내는 구인 광고를 내밀었습니다. 교과서 관련 편집 사무소였습니다.

내가 구인 잡지를 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군.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한 번 읽어 봤지만, 나이 제한도 빠듯하고 제 분야와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컴퓨터는 취미로 하고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취미일 뿐이지 실무적인 능력은 없습니다.
그런 곳에 취직이 가능할 리 없다는 게, 그때의 제 기분이었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절대 입사가 불가능한 직장이었습니다.

하지만 제 어리석은 자존심을 상처 입지 않게 우회적으로 이야기해준 아내의 마음을 이해했고
무엇보다 저 자신이 다급한 상황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실대로 모두 털어놓았습니다.

그래서 아내가 추천한 그 회사에 이력서를 보내기로 했습니다.
결과부터 말하면 제가 스스로 지원한 회사는 모두 거절당했고

아내가 추천한 회사만이 저를 잡아 준 것입니다. 아내는 아주 기뻐했습니다.

저는 전문 분야가 아닌 업무를 커버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직장 동료들도 지금까지 제가 접한 적이 없는 개성적이고 재미있는 사람뿐이었습니다.

업무적인 부분도 자신 있다고 생각하고 지원한 건 아닙니다만,
뜻밖에도 흥미로웠고 충실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이곳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시간이 많이 흐른 후에 이제는 괜찮겠지라는 마음에

당시의 상사에게 왜 그때 저를 채용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답은 간단했습니다. "지원한 사람이 너뿐이었기 때문에."
그 당시에는 지금 만큼은 아니지만, 고용시장에 찬바람이 불었고
저같은 사람뿐만 아니라 유능한 인재들도 위기에 놓여 있었습니다.
타이밍이 좋아서 그런 거라고 말하면 그만이지만, 저에게는 (아마 상사에게도) 정말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한 가지 에피소드를 이야기했지만, 이 일 이외에도 아내의 도움으로 우리 가족이 재난을 극복한 사례는

몇 차례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부 이야기하면 너무 길어지기 때문에 생략하겠습니다.

저도 이런 제가 신기했습니다. 이런 느낌은 저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저의 어머니 (재혼은 했지만, 가끔 얼굴을 뵈러 갑니다.)는 어쩌다 갑자기

"너, 며느리랑 함께 뭐라도 했니? 옛날의 너와는 다르구나."라고 가끔 말했습니다.

우리는 일남 일녀를 낳았습니다.

일 탓도 있겠지만, 원래 게으름뱅이라서 아내와의 즐거운 추억은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래도 좋다고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아내에게 일체의 불평도 듣지 않았고 육아도 모두 아내에게 맡겼습니다.
아이들은 어긋나는 일 없이 둘 다 남들만큼 자랐습니다.
딸은 올해 사회인이 되었고 아들은 대학에 재학 중입니다.


이런 시기에 아내가 집에서 쓰러졌습니다.
귀가한 아들이 발견하고 구급차를 불렀습니다.

제가 병원으로 달려갔을 때는 엄청난 튜브에 연결되어 얼굴이 빨갛게 퉁퉁 부어 있었습니다.
결국, 한 번도 의식이 돌아오지 않은 채로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사후의 여러 잡일은 생략하겠습니다.


아내가 떠난 후, 한 달인가? 두 달 인가...

딸이 아내의 방을 정리하고 있을 때, 쪽지를 하나 찾아냈어요.
딸은 이미 읽은 상태였습니다. 울어서 눈이 퉁퉁 부은 눈으로 저에게 쪽지를 내밀었습니다.
"아빠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몇 번이나 할머니에게서 들었어.
나도 엄마의 도움으로 여러 가지 신기한 일이 있었어.
아빠.. 쪽지 읽어 보는 게 좋을 거야.
이 쪽지가 엄마에게 유일하게 허용된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쪽지의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나는 자신의 카르마를 자각했다."

"나는 현세를 방황하며 나의 파편을 찾을 수밖에 없다."

"나는 드디어 나의 조각을 발견했다. 아마 그일 거라고 생각한다."

"어머니를 설득했다. 울면서 반대했지만, 아버지도 이해해주셨으리라. 어쩔 수 없다. 지금은 알아주고 있다."

"나의 결핍을 보완하면서 나는 지금의 그를 도와야 한다. 그럼으로써 나에게 나의 조각이 돌아온다."

"이 사람의 인생을 평범하게 보내게 하는 것이 나에게 주어진 과제이다."

"현세는 응보의 세상이다."

평소의 아내와는 거의 동떨어진 느낌의 문장에 한동안 무슨 의미인지 몰랐어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떠오르는 것을 쪽지에 적었던 것일까. 그렇게도 생각했습니다.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다시 읽고 나서야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깨달았습니다.

"나는 전생에 큰 죄를 지어 현세에서는 완전한 모습으로 태어나지 못했다.
현세는 그 응보의 업으로 태어난 것이다. 나는 행복을 추구할 수 없다.

나의 영혼 일부가 더 불완전하게 태어났고 그것을 찾아내어 모든 도움을 주어야 한다.
그것은 나의 남편이 되는 것이고, 나는 이승에서 그것을 도와야 한다.

현세에서는 허용되는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그것을 포함한 완전한 형태로 태어나고 싶다.

나의 영혼의 일부가 나의 전생의 업보로 인한 죄가 미치지 않도록 전력을 다할 것이지만,

나에게는 시간이 얼마 남아 있지 않은 것 같다. 나의 죄가 씻겨 나갈지는 미지수다."


제가 이 쪽지에서 받은 인상은 "기막히다." "바보 같다." "불쌍하다." "화가 난다." 이런 감정이 생겨서 아내를

다른 인간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구나." 하고 간단히 동의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아내에게 없는 일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냥 그 자체로 저 자신이 아내였던 것 같아요.

말로는 잘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저 단순히 연약한 남편의 변명이겠지요.

확실히 그런 면도 있겠죠. 아내와의 첫 만남과 이직하기까지의 일들은 하나의 에피소드에 불과하지만,

어느새 아내가 정해주는 방향으로 향해가던 저의 지난 생애를 생각해보니 쪽지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아내는 저를 남자로서 사랑한 적은 아마도 한 번도 없었을 겁니다.
저도 여자로서 아내를 열렬히 사랑했는지 물으신다면 말문이 막히는 것이 사실이네요.
하지만 결코 사이가 냉랭한 것은 아니었고 서로가 다투거나 싸웠던 일도 없었습니다.
아내는 저를 끌고 가려고 한 것 아니라 오히려 저를 가치 있는 인간으로 만들어보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결코, 성공한 인생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평범한 인생의 길을 걸어왔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현세에서 카르마를 지고 태어난다." 이 말은 흔히들 하는 말이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업보를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이 대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내가 왜 이런 생각에 이르렀는지 전혀 모릅니다. 자칫하면 미치광이의 헛소리로 들릴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저는 확실히 믿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저에게 주어진 카르마라는 것임을 말이죠.

그리고 앞으로 남은 삶을 생각하면, 아내의 못다 이룬 업보를 도저히 풀어낼 자신이 없습니다.

현세의 카르마,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채로 다음 생애로 이어지는 것일까요.
 

꽤 긴 이야기. 아버지에게 여동생이 있었던 것 같다.

나한테는 이모인 셈이지만, 이모가 태어나서 몇 달 후에 갑자기 죽었다.

원인 불명. 그토록 바라던 딸이 죽자 할머니는 많이 우울해하셨다고.

보다 못한 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인형을 사줬고,

할머니는 그 인형에게 이모의 이름과 똑같이 아사다라고 지었다.

매일 옆에 가지고 다니면서 함께 잤다고 한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내 여동생이 태어났다.

여자가 태어나자 할머니는 정말 기뻐했다.

부모님은 맞벌이라서 할머니가 동생을 대신 돌봤다.

그래서 아사다는 할머니의 머리맡에서 불간으로 자리가 바뀌게 되었다.

불간은 조상님께 인사하려고 저녁 전에 향을 올리고 술을 따르는 곳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어둡고 매우 추운 불간이 있는 방에 가서 불단에 합장하고 향을 올렸다.

 

그때마다 누군가 뒤에 서 있는 느낌이 들었다.

돌아보면 아무도 없고 평소처럼 핑크 드레스를 차림의 아사다가 있을 뿐.

그 당시에는 묘하게 무서웠다.

그래서 무심코 [뭐야, 불만이라도 있는 거야!]라고 말하며 아사다를 놀렸다.

거실로 가서 가족에게 [아사다가 나를 훔쳐 봤어!]라고 말하자 할머니가 성을 내셨다.

그렇게 화가 난 모습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할머니와 아버지에게 많이 맞았다. 나는 엉엉 울면서 잘못을 빌었다.

하지만 문제가 일어난 건 며칠 후였다.

 

그날은 날이 밝았지만, 아직 불간은 어두운 상태였다.

그날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향을 올리려고 불간에 들어갔는데 아사다가 제자리에 없었다.

항상 놓여있는 선반에서 떨어진 상태였다. 그리고 아사다의 손목이 빠져 있었다.

마치 나한테 무슨 짓이라도 하려고 그런 것 같았다.

무서워서 가족이 있는 거실로 가니까, 할머니가 있었다.

또 이런 말을 하면 혼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진심으로 무서워서 본 그대로 전부 말했다.

 

내 심상치 않은 모습을 보고 할머니도 걱정됐는지, 같이 불간으로 가보았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아사다가 제자리에 있었다. 손목도 그대로 붙어 있었다.

내가 거짓말을 한 것 같은 분위기가 돼서 변명하고 있는데

아버지가 와서 [아, 그건 내가 그런 거야. 화장실 갔다가 다시 원래대로 해놨어.]라고 말했다.

아버지가 범인인가! 나는 내가 잠시나마 범인으로 오해받은 것이 억울해서 울먹였고

아버지는 내 모습을 보고 웃기만 했다. 대신 할머니가 나를 위로해줬다.

 

하지만 그날 밤에 할머니가 자는 사이, 아버지가 내 방에 왔다.

[낮에 그 인형. 되돌려 놓은 건 나야. 하지만 떨어진 건 아니었어. 아니, 떨어질 수가 없어. 거짓말한 건 아니지?]

아버지의 이야기로는, 내가 큰 소리를 내면서 불간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무슨 일인가 싶어서 불간을 들여다보니, 아사다가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

하지만 이상했던 건, 손목 같은 건 떨어져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떻게 떨어지고 어떻게 달라붙은 건가. 나는 무서워서 그날 이후로 향 올리는 일을 게을리했다.

불간 입구에서 적당히 시간을 보내다가 거실로 갔다.

아마 반년 정도 그렇게 한 것 같다.

 

그리고 그 무렵, 동생이 죽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갈 새도 없이..

사인은 원인 불명의 고열. 갑자기 열이 나서 입원했는데..

나는 동생의 죽음이 내 잘못인 것만 같았다.

내가 불간에 가서 불단에 향을 올리지 않아서..

하지만 부모님과 할머니에게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야기를 들어보니, 여동생이 죽기 전에 [사다 쨩.. 사다 쨩..]이라며 울었다고 한다.

당시 여동생에게는 친구가 없었기 때문에 그나마 짐작 가는 거라면, 그 이상한 인형뿐이었다.

내가 전에 겪은 일도 있고, 동생이 죽어가며 했던 말도 있어서 어머니도 신경이 예민해져서

[그 인형 갔다 버려요!]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여동생의 장례식 동안 큰 소란이 있었다.

 

이 사건으로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이가 매우 나빠졌고, 어머니는 친정으로 돌아가 버렸다.

아버지는 조용히 일했고, 할머니는 매일 밤 아사다를 안고 울었다.

아버지는 직장에서 집으로 오지 않았고, 할머니는 울기만 했기 때문에 집안일은 내가 하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할머니의 치매가 시작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밥을 먹거나 혹은 방에 틀어박혀 인형만 끌어안고 울고, 울다 지쳐서 피곤하면 자고.

하루는 내가 밥 먹으라고 말하자, 할머니가 밥 먹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해서 할머니가 있는 곳에 가보니까 뭔가를 먹고 있었다.

 

[할머니, 뭐 먹고 있어?]라고 물으니까 밥이라고 말했다.

자세히 보니까 할머니의 입에서 금색 실이 나오고 있었다.

손에는 절반 정도 벗겨진 아사다가 있었다. 나는 그때가 가장 무서웠다.

재빨리 할머니를 토하게 시켰다. 어머니에게 연락해서 이 사실을 말해도 그런 사람 모른다며 무시로 일관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연락해서 병원에 데리고 가자고 말했지만, 일이 바쁘니까 알아서 해라는 말 뿐이었다.

그때 나는 아직 어린아이였다. 여동생이 죽고 나서, 우리 가족은 말 그대로 이상해졌다.

 

조상님께 향을 올리지 않았던 내 탓이라고 생각하니까 참을 수 없었다.

지금 우리 가족이 이렇게 된 건, 전부 내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원인은 앞서 말한 것 때문에.. 그래서 당시 중학교에 입학할 예정이었지만, 학교에 가지 않았다.

아사다는 할머니가 계속 만져서 너덜너덜해진 상태였다.

뭐, 그렇다고 해도 몇십 년이나 된 인형이니까..

머리는 다 빠지고, 옷은 다 벗겨진 상태.

그리고 더러운 얘기지만, 할머니의 배설물을 인형에 바르기도 했다.

이쯤 되면 불쌍한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할머니의 치매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평소에는 인형을 제대로 갖고 있다가 어느 순간 사라지고 없다.

찾아내는 장소는 주로 화장실 선반, 부모님 침실, 신발장 등.

그래서 할머니는 한밤중에 [아사다야.. 아사다야..]라며 찾아다녔다.

나는 보다 못해서 시험 삼아 내 방에 놔두기로 했다.

그리고 어느 날 새벽 3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할머니가 아사다를 찾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내 방은 위층에 있었고, 할머니는 치매가 온 이후로는 내 방에 올라온 적이 없었다.

나는 인형을 가져다주려고 아사다를 놔뒀던 옷장으로 가서 문을 열었다.

하지만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확실히 옷장 문을 닫아뒀는데..

너무 눈에 띄는 곳에 두면 기분 나빠 눈에 잘 안 보이는 곳을 고른 게 옷장 안이었다.

비닐까지 씌워서.. 하지만 인형은 없고 비닐만 그대로 떨어져 있었다.

위험하다.. 아사다가.. 나는 그대로 패닉에 빠졌다.

이불 속에서 폭포같이 땀을 흘렸다.

자는 척을 해야 하나 일어나서 찾아봐야 하나..

 

그러자 갑자기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무서워서 문 쪽을 볼 수 없었다.

그랬더니 갑자기 목소리가 들렸다. [아사다.. 이런 곳에 있는 거야?]

할머니였다. 할머니가 내 방으로 올라왔다?? 그런 생각을 하며 일어났다.

하지만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무서워서 그냥 자기로 했다.

기분 탓이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다음날 아사다와 할머니를 할머니 방에서 찾아냈다.

할머니는 죽어 있었다. 사인은 질식사.

할머니의 목에 아사다의 머리카락과 잘게 잘린 옷, 눈알이 들어가 있었다.

햇빛이 비치는 방 한가운데 그렇게 죽어 있었다.

얼굴은 행복한 표정이 아니라, 지옥 체험이라도 하는 것처럼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고

한 손에는 아사다의 몸통을 꽉 쥐고 있었다.

 

할머니의 장례는 화장으로 치러졌다. 아사다도 함께 불태웠다.

나중에 할머니의 유골을 우리 집안 무덤에 안치할 때 역대 조상의 이름이 쓰여 있는 위패를 보다가,

거기에 아사다 (진짜 이모)라고 쓰여 있는 위패를 보고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나중에 알게 된 이야기지만,

그러니까 나한테는 이모가 되는 아사다 이모의 사인은 원인 불명이 아니었다.

우리 할머니가 목 졸라 죽였다고 한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리고 이건 장례식에 온 친척의 이야기.

왜 할머니가 잡혀가지 않은 것인지 물으니까, 그런 사실을 집안에서 숨기고 은폐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할머니가 죽은 지, 올해로 4년이 흘렸다.

나는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됐지만,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할머니가 죽고 나서 어떠한 의지도 생기지 않는다.

이 글도 실은 2개월 전부터 써서 겨우 완성했다.

 

차라리 이대로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일이 전부 아사다 이모의 저주라면,

이런 내 상황도 그것 때문인지도..

내가 나를 이 세상에서 지워버릴 생각을 한다고 생각하니까, 조금 웃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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