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의 역사


한국과 독일은 1883년 조선전권대사인 민영목과 주(駐) 일본 총영사인 자페 간의 '한독 수호통상조약' 을 통해 공식적으로 외교관계를 맺었으며 1884년 한양에 한옥으로 된 주(駐)조선 독일 총영사관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외교관계가 단절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중화민국 상하이에 있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일본 제국 이하 나치 독일, 이탈리아 왕국 등 추축국에 선전포고하면서 잠시 적대관계가 되기도 했다.


종전 후 연합국에 의해 독일은 동서(東西)로, 한국은 남북(南北)으로 분단되면서, 1949년에는 북한이 동독과, 1955년에는 대한민국이 서독과 외교관계를 맺었다. 1990년 10월에 동서독이 통일되자, 통일 독일은 대한민국과는 외교관계를 지속하였으나 북한은 일반대표급으로 격하시켰다가 2001년에 외교관계를 복원했다.


역사적 비교


적지 않은 한국인들이 이념 대립으로 인한 분단의 비극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독일의 역사에 동질감을 느끼곤 한다. 그러나 한국과 독일이 비슷한 점은 현대사, 그것도 타의에 의한 분단이라는 사실 하나뿐이며, 기실 양국은 분단의 원인은 물론 역사적인 맥락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서 안티테제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상반되는 면모를 보인다. 굳이 한국을 유럽 국가에 대입한다면, 폴란드나 아일랜드 공화국과 유사점이 더 많은 편이다.


구조적으로 봤을 때, 한국과 독일이 비슷한 점은 제조업이 강하고 수출 지향적이며 저출산 고령화라는 도전을 안고 있는 점 등을 꼽을 수 있다.


한편, 위의 서술에 대한 추가 의견으로 현대사에서 한국과 독일은 많은 지정학적 동질성을 공유하고 있다. 각각 동아시아와 유럽에서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이 만나는 관문에 위치했으며, 이 때문에 냉전시기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병존하는 분단의 역사를 공유하게 된 것이다. 

또한 둘 모두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끝과 서쪽끝에서 역사적으로 나름의 생존 능력을 발휘하면서 하나의 독특한 세력권과 문화를 갖춘 국가의 모습으로 살아남았고, 단일 민족에 대한 자긍심(비록 환상이지만)을 지니고 살고 있다.

더불어 두 민족 모두 전통적으로는 기록을 중시한 민족이라는 점, 현대에 와서는 제조업을 국가의 핵심 산업으로 생각한다는 점도 상당히 닮은 점이다.

더 나아가 바다로 나가는 길목을 왕이 다스리는 섬나라들이 막고 있으며, 속한 지역의 자본시장 역시 그 섬나라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는 점도 닮았다. 반대로 대륙으로 나가는 길은 공산주의 세력에 의해 막혀있다.


여담으로 근대사적 상처를 하나 더 공유하고 있는데 바로 중앙아시아 이주민 문제다. 각각 고려인과 볼가 독일인으로 불리는 이주민들은 정치적 문제로 소련 정부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이주되어 척박한 토지를 개간하거나 농사를 짓는 노동력으로 이용되었다. 현재는 각각 50만명, 80만명 정도가 러시아 중부,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지에서 각자의 문화에 러시아 문화가 혼합된 문화를 보존하며 살고 있다.


한국인이 보는 독일은?


일반적으로 한국인들은 독일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를 자동차, 맥주, 베토벤이나 바흐, 환경 등을 얘기하고, 독일의 덕목으로 근면성, 효율성, 강한 조직을 꼽는다.


한국이 과거사 문제로 옆나라와 끊임없는 갈등을 빚고 있어서인지, 한국인들은 대체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잘못된 행적을 분명히 인식하는 독일의 태도에 매우 호의적이다. 때문에 많은 한국인들이 일본더러 독일을 반만 닮아보라고 충고를 빙자한 욕설을하기도 한다.


그러나 보편적인 인식과는 달리, 독일의 과거사 반성은 주로 나치 독일 시절의 침략전쟁 및 전쟁범죄에만 국한되어 있으며, 일본이나 다른 유럽 식민제국들처럼 식민지에 대한 수탈을 나몰라라 하는 것은 크게 다를 바 없다. 심지어 그 전쟁범죄조차도 미국을 등에 업은 이스라엘의 주류 민족인 유대인 대상 홀로코스트, 그리고 폴란드나 러시아 등 외교관계를 관리할 필요가 있는 국가들에 한하여 배상하고 있을 뿐, 동유럽의 약소국이나 나라 없는 집시들의 피해에 대해서는 알지도,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순전히 식민지 문제만 놓고 보면, 그나마 무라야마 담화나 고노 담화처럼 여러 차례 사과를 표명했었고 한일기본조약으로 공식적인 배상까지 했던 일본이 차라리 나아 보일 정도이다. 국제사회가 철저히 힘의 논리에 따라 움직인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동서분단 시절에는 남북분단으로 있는 한국과 동병상련이었기 때문에 서로 비슷해보였다. 독일인은 그리 생각지 않았겠지만 광부, 간호사 파견 등에서 보듯 한국은 독일의 경제성취(이른바 "라인강의 기적")를 부러워했고, 자국의 성취를 "한강의 기적"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동서로 갈라졌으면서도 유학생이 많았기 때문에 1960년대 1970년대를 전후해 북한과 접촉이 많아 납북, 망명, 간첩사건도 많았고 또 그를 이용해 독재정권을 공고하게 하려는 고문조작 간첩 사건(동백림 사건 등)도 많았다.


이후 통일이 되면서 한국에게 독일식 통일 모델은 가장 이상적이고도 전형적인 모델로 여겨졌다. 그러나 동서독 국경은 유럽의 휴전선이었으며, 동독은 자유 진영에 대한 공산권의 광고판이나 다름없었기에 소련으로부터 막대한 지원을 받았다. 게다가 공산주의의 발원지다운 사상적 배경과 양차대전을 일으켰을 정도의 국력이 합쳐졌기에, 적어도 아무것도 없었던 데다가 그나마 남아있던 공업단지도 자업자득이지만 한국전쟁으로 다 날려먹고 막장 독재자가 권력을 장악한 북한에 비하면 인권/경제 사정이 훨씬 나았다. 때문에 90년대와 2000년대 흡수통일의 후폭풍이 널리 보도되자, 서독과 동독의 차이에 비해서도 넘사벽인 경제적 부담 때문에 통일을 반대하는 분위기도 등장하였다. 


한편 현대 독일이 유럽의 정치·경제적 중심지인데다가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선진국이다 보니, 한국의 여러 문제점들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독일의 선진성을 농반진반으로 찬양하는 모습도 보인다. 여기에는 1인당 GDP, 인간개발지수, 민주주의지수, 부패인식지수, 언론자유지수 등 각종 통계에서 어지간한 선진국들마저 압도하는 독일의 위엄이나, 프로이센 시절부터 나치 독일을 거쳐 이어져오는 왠지 모를 기술 강국의 이미지, 그리고 프랑스나 영국 등 주변국들에 비해 여행객들에게 대체로 깔끔하고 잘 정돈된 듯한 느낌을 주는 거리 등 복합적인 요소가 작용하는 듯하다. 물론 어느 나라나 그렇듯이 빛이 있으면 어둠도 있는 법이니 좋은 건 보고 배우되 맹신할 필요는 없다. 


법학과, 행정학과 소속 교수들 중에는 독일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들어온 경우가 적지 않다. 심지어는 슈파이어 국립 행정대학원에서 박사를 받고 들어온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책에서 독일어가 많이 나오는 편이고, 책 정보-제목 등도 독일어로 기록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국내 과학계에서도 아무래도 미국 출신들이 대세이기는 하지만 20세기 과학의 성지답게 독일에서 유학한 연구자들이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한다. 특히 독일이 현대 유럽의 중심이니만큼, 입자물리학처럼 미국과 유럽이 경쟁하는 분야들에서는 독일의 지분이 상상외로 크다.


독일인이 보는 한국은?


19세기 말에는 서로 외교적인 접촉은 있었지만, 양국간의 국민적 인식은 거의 전무한 수준이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당시 독일(프로이센)은 보오전쟁, 보불전쟁 등을 거치며 이제야 통일 국가가 들어선 상황이었고, 조선은 각종 내우외환에 시달리느라 한반도에 별로 간섭할 의지도 능력도 없는 머나먼 유럽 국가에 관심을 둘 겨를이 없었다. 


특이사항으로는 1899년 하인리히 친왕이 대한제국을 방문하기도 했고, 독일 제국의 빌헬름 2세가 대한제국의 고종 황제를 Kaiser von Korea라 칭해 주었던 기록이 있지만, 그래봐야 외교적 수사에도 미치지 못하는, 그냥 그랬다더라 하는 수준의 이야기일 뿐, 구한말의 정세에 독일이 실질적으로 관여하지는 않았다. 당시 독일인들의 조선에 대한 인식은, 비유하자면 현대 한국인들이 저 멀리 아프리카나 남미의 별로 유명하지 않은 수교국 A에 대해 가지는 인식 정도였을 것이다.


정치인들을 제외한다면 독일에서 대중적으로 알려진 첫 한국인은 아마도 1936 베를린 올림픽 당시 한국인 금메달리스트였던 손기정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당시 한반도는 일제강점기를 겪고 있었기 때문에, 손기정의 소속은 일본 제국(정확히는 일본령(領) 조선)이었으며 세계인들도 당연히 한국인이 아닌 일본인으로 인식했을 것이다. 광복 후 한 공무원(혹은 의원)이 독일의 손기정 기념비에 기록된 국적을 바꾸려 시도하기도 했으나, 그런다고 공식 기록이 바뀌진 않았고 훼손죄로 처벌을 받았다. 현재 IOC 기록에선 일단 일본 선수로 기록하고, 손기정 선수에 대한 당시 조선의 상황 설명을 첨부하는 수준이다.


또한 2차 대전 패전 이후 서독에서는 1946년에 출판된 작가 이미륵의 소설 '압록강은 흐린다'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교과서에도 수록될 정도로 독일인들에게 호평을 받았다.


이후 축구선수 차범근이 분데스리가에 진출, 맹활약하며 독일 내에서 한국에 대한 인지도를 상당히 상승시켰다. 차붐의 등장으로 인해 한국이란 나라를 처음 알게 되었다는 반응이 대다수. 갈색 폭격기 차붐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던 차범근은 이후 분데스리가 전설의 반열에 오른다. 이런 차범근의 업적은 이후 한국 선수들의 독일 진출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실제로 그의 독일 내 위상은 말하면 입 아픈 수준이다. 항목 참조.


독일인들 가운데는 남북간의 분쟁이나 북한이 국제사회에 끼치는 악영향을 쌍방과실로 인지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는 동서독이 실제로 남북한과는 달리 냉전기에도 제법 상당히 활발하게 교류하였으며 동방정책으로 대표되는 관개개선 시도를 여러 차례 했던 전적이 있기 때문에, 남북한이 서로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상황이나 북한의 극한도발→남한의 강경반응→더 강한 도발로 이어지는 구조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쯤 보면 알겠지만 동독 입장에서 북한은 통계상으로 나타나는 경제력부터 지도층의 정신상태에 이르기까지 비교되는 것조차 실례인 국가이므로, 남북관계의 문제를 쌍방과실로 인지하는 건 양국의 서로 다른 역사적 경험에 기인한 오해에 가깝다고 봐야 한다. 


BBC 국가 영향 평가 여론조사에 따르면 한국이 세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가장 좋지 않은 평가를 내린 나라는 독일이라고 한다. 특히 다른 나라까지 와서 사업하면서 야근을 밥먹듯 시키는 한국의 골때리는 기업문화를 그들이 이해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위와 같은 이유도 있고 해서 혐한 수준이라고 보긴 어렵다. 최근 들어 삼성, LG 같은 한국 기업들의 성공적인 국외 마케팅과 함께 두각을 나타내는 예술계 인사 등으로 “한국을 세계에 알리는 기회의 폭이 아주 넓어졌기 때문"이다. 실제 2005년에는 프랑크푸르트 국제 도서전에서 한국이 주빈국으로 행사를 성공리에 치렀고, 2004년 베를린 영화제에선 김기덕 감독이 사마리아로 감독상을 수상했다. 2007년 박찬욱 감독의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는 알프레드 바우어상을 수상하면서 독일뿐 아니라 유럽 전역에 한국영화를 알렸다. 2012년에는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대박을 치면서 일본을 제외한 여느 나라에서나 그렇듯 독일에서도 관심을 보였다. 싸이는 EMA에서 공연을 가진 뒤 최고의 권위를 가진 상인 EMA 베스트 비디오 상을 타기도 했다.


한편 한국은 1990년대 후반부터 독일 비자 발급이 용이해지기 시작했으며, 2000년대가 돼서는 비노동 비자일 경우 독일 비자를 찍어주는 기간이 최소 소지 금액에 비해서 길어졌다. 쉽게 말해 한국인이 독일에서 불법 체류할 가능성이 적다고 판단했다는 의미로, 한국의 경제적 성장을 어느 정도 반영했음을 알 수 있다. 독일어를 알아야 가지 이미 1972년부터 한독간 사증면제협정에 따라 독일로의 무비자 입국 및 90일간의 체류가 가능했으며 장기체류 허가 또한 현지에서 직접 받을 수 있는데, 참고로 독일에 무비자 입국이 가능한 비 EU 국가들은 한국, 미국, 캐나다, 일본, 호주, 뉴질랜드, 이스라엘 뿐이라 한국이 독일 정부로부터 불법체류 가능성이 낮은 국가로 대우를 받는다고 할 수 있다.


협력 및 진출

2016년 3월 7일 국방부는 독일 국방부와 '한-독 군수협력에 관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하고 양국 간 군수협력회의 정례화 등 군수협력 강화 방안을 논의했다. 양해각서에 따라 한독 양국은 군수협력회의를 정례화하고 지금까지 유지해 온 우호협력관계를 심화, 발전시키고 군수혁신 경험 등을 공유하기로 합의한다. 
또한 국제평화유지군(PKO) 활동이나 재난구조 등의 분야에서 군수협력을 강화해 나갈 가기로 했다. 군 관계자는 “이로써 우리 군은 국제평화유지군(PKO) 활동 등 독일과 공동으로 참여하게 될 다양한 군사작전 분야에서 군수지원능력을 향상시켜 작전역량을 높이고 안정적인 임무수행을 기대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국방부는 지금까지 미국, 호주 등 15개 국가와 상호 군수협력을 위한 양해각서를 체결해 시행 중이다. 또한 향후 우방국들과의 군수협력을 지속적으로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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