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할

주요 역할은 경기 종료가 임박한 시점에 팀이 이기고 있을때 구원 등판해 마지막 27번째 아웃을 잡을 때까지 던지는 것으로, 주로 경기가 3점차 이내의 접전인 상황에서 팀의 승리를 최종적으로 지키기 위해 등판하는 것이다.


사실 투수의 보직 개념이 희박했던 초창기 야구에서 불펜 투수라는 것은 선발 투수가 되지 못한 2진급으로 선발 투수가 경기를 마치지 못했을 때 남은 이닝을 처리해주는 잔업처리반의 역할이 강했다. 어떤 시기 어떤 나라의 야구건 가장 잘하는 투수가 많은 이닝을 던지는 것이 당연한 만큼, 선발투수가 투수 운영의 중심이 되고 선발투수가 무너지는 상황, 즉 정해진 시기란 게 없이 선발이 빵꾸가 나면 투입되는 형식이다. 


야구가 점차 체계적으로 진화하고 타자들의 상향 평준화가 일어나면서 점점 선발 투수만으로 게임을 이끌어나가기 어렵게 되자 그때부터 경기 중반부터 마지막을 책임지는 전문 불펜투수라는 개념을 생각했고, 야구사 전문가인 빌 제임스는 현대 마무리 투수의 개념을 처음 정립한 투수로 워싱턴 세네터스의 퍼포 마버리라는 선수를 꼽으며, 1930년대 뉴욕 양키스의 쟈니 머피라는 투수를 최초의 전문 마무리 투수로 보고 있다.


이렇게 몇몇 팀이 시도하던 전문 마무리 투수 개념은 1940년대쯤부터는 모든 팀이 사용하는 전략이 되었고, 이들에 대한 관심과 체계적 관리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비공식적으로 1950년대부터 세이브라는 기록이 생겨났고, 1969년도에는 정식으로 MLB 공인 기록이 되면서 마무리 투수가 선발 투수와 다른 별도의 보직으로 독립했다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9회 세이브 요건이 충족될 때만 등판하지만 7회나 8회라도 긴급 위기 상황에서는 등판하기도 한다. 불펜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투수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출장시 2이닝, 투구수 기준으로는 30개 이상을 넘겨 던지는 경우는 별로 없다. 아니 그래서는 안된다. 이기는 경기라면 매번 출장 준비를 하는 마무리를 혹사시키면 언젠가는 탈이 나기 때문이라 정작 중요할 때 써먹지 못하기 때문이다. 단, 포스트시즌에서는 7~8회부터 굴리는 경우가 많기는 하다.


메이저리그에서도 세이브가 공식기록으로 인정받은 1969년 이후부터 1990년대 초반, KBO에서는 2000년대 초중반까지 중간계투가 약한 팀은 마무리를 7~8회 등 비교적 일찍 올리기도 했다.


롤리 핑거스, 구스 고시지, 브루스 수터같은 1970~1980년대의 전문 불펜투수도 그랬고, 1993년 이후 부상으로 선발투수 출전이 불가능했던 선동열의 경우 해태에서 마무리를 뛸 때 5회 넘으면 올라오곤 했다. 구대성이나 임창용 역시 중무리 투수로 자주 등판했다.


이는 프로야구의 수준이 낙후되어 A급 선수와 B,C급 선수들 실력격차가 컸던 1980, 1990년대에서나 가능한 거지. 점점 상향평준화되는 현대야구에서 마무리를 이렇게 쓰는 건 한두 해 던지게 하고 은퇴시키겠다는 이야기다. 진필중은 OB 베어스 시절 너무 혹사당해 전성기가 오래가지 못했다. 구대성, 임창용처럼 말도 안되는 연투 능력을 보여준 투수도 있긴 하지만 이들도 꾸준하게 1,2점대 압도적인 불펜투수였던 경우는 없었다. 천하의 선동열조차 결국 부상으로 푹 쉬고 나서 1이닝 마무리로 완전 전업했다.


따라서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동점인 경우도 아니고 1~3점차로 박빙으로 이기는 상황에서만 투입되는게 정석이다. 지고 있는 상황에서는 몸도 풀지 않는게 보통. 가끔 관리 차원에서 다른 불펜투수와 달리 투구감각 관리목적으로 등판시키는 사례도 많다. 그래서 '마무리 투수들은 치사하다. 동료들이 실컷 고생한 다음에 막타친다. 마무리 투수라는 보직은 필요없다'는 말도 나온다. 물론 그 뒤에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다만 모든 정석이 그렇듯이 저 정석에도 예외가 있다. 9회말이 시작되는 순간, 즉 9회초가 끝났을 때 홈팀이 비기거나 지고 있을 때는 더이상 그 경기에서 홈팀에게는 마무리 투수가 필요 없다. 자기들이 점수를 뽑아서 앞서는 순간 그대로 끝내기가 되므로. 따라서 9회말에 동점이 되어 경기가 연장으로 넘어가게 되면 홈팀의 마무리 투수는 그냥 한 명의 불펜 투수로 바뀌어 비기거나 지는 상황에서도 투입되는 것이 정상이다. 보통 이쯤되면 이미 불펜진의 소모가 커서 그 상황에서 올릴 수 있는 투수가 마무리밖에 없는 경우도 많고, 그게 아니라 하더라도 어설픈 불펜 올려서 실점하느니, 마무리를 올려서 일단 한 이닝을 확실하게 틀어막고, 뒤이은 말 공격에서 득점을 노리는 작전이 최상일 수도 있다. 이 경우에도 팀이나 투수의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은 마무리 투수에게 1이닝 정도만 막도록 한다. 하지만 오히려 메이저리그에서는 이때 마무리에게 2이닝 이상을 맡기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은 애당초 선수층이 두껍고 육성능력이 좋다보니 마무리 투수에 대한 위상이 낮다. 유망주때는 동일하게 선발 투수로 경쟁하다가 체력, 3rd피치등의 문제로 선발로는 좀 아닌 선수들을 전환하거나, 일부 유망주시절부터 전문 마무리였던 선수를 키워서 올리고 팀내에도 이런 기량의 선수들이 한두명 있는게 아니라 경쟁구도가 생기기 때문에 마무리 투수라고 무작정 귀족대우 받지 못한다. 그래도 MLB는 데니스 에커슬리가 MVP와 사이영상을 수상하고, 마리아노 리베라와 트레버 호프먼의 이름을 딴 상이 나올 정도. 하지만 호프먼이 명예의 전당 투표에서 첫 턴에 입성하지 못하면서 아직도 풀타임 구원투수에 대한 대우가 박한건 사실. 사이 영 상을 봐도 구원투수가 수상한 사례는 많지 않다. 그래도 이전보단 대우가 많이 높아진게 사실. 하지만 계투는 아직도 박하다.


반면 일본프로야구에선 '수호신'으로 불리며 마무리 투수의 위상이 높다. 단적으로 센트럴 리그 최고의 마무리 투수였던 후지카와 큐지나 이와세 히토키는 투수, 야수를 막론하고 4억엔이 넘는 세리그 최고 수준의 연봉을 받았고,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임창용도 한때 팀내 최고 연봉자였다. 또한 2013시즌 종료 후 삼성 라이온즈의 오승환이 2년 9억엔이라는 파격적인 대우로 한신 타이거스로 입단한 것도 NPB 내 특급 마무리의 위상을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예. 이는 2년 전 한국 최고의 타자였던 이대호가 오릭스 버팔로즈와 계약하면서 받은 2년 7억엔 대우를 아득히 뛰어넘는 것이다.


KBO리그는 일본보다도 선수층이 얕고 특히 근래 타고투저의 심화와 투수 양적 부족이 심각해져서 전체적으로 봤을때 불펜 위주의 투수운용임에도 하도 작가들이 많아서 찬밥 더운밥 가릴 것 없이 할 줄 알면 써먹고 봐야하기 때문에 마무리 투수라고 귀족 그런거 없다. 이때문에 마무리 아닌 상황에 마무리가 갈려나가거나 경기력 유지 실패로 부상이나 셋업강등을 당하는 등 마무리가 안정적이지 못하고 매년 마무리가 바뀌는 팀도 수두룩하다. 당장 하단에 언급된 2016년 각팀 클로저들 중에서 3년 연속 이상으로 두자리수 세이브를 올린 풀타임 마무리 투수가 손승락 고작 1명뿐이라는 점이 현시대 크보의 마무리 부재를 드러낸다. 


그래서 한국 야구에서 마무리 투수는 소위 롱런하기 힘든 보직이기도 하다. 그만큼 굴려지고, 또 분석을 당하기 때문에 수명이 짧다. 가장 오랫동안 마무리를 맡은 오승환 이외에는 1년 반짝하고 사라진 마무리 투수들이 수두룩하다. 심하면 롯데 자이언츠처럼 해마다 마무리가 갈리는 최악의 경우도 생긴다.(정대현,김사율,김성배,김승회 순으로 헤마다 갈렸다.)


외국인 선수제 도입후 가끔 전문 마무리 투수가 용병으로 오긴 했지만, 용병제도 개편 및 리그 환경으로 인해 2010년도 이후부터는 마무리 용병투수의 대는 끊어졌고, 만약 들여온대도 욕을 바가지로 쳐먹고 시즌 운용할 생각 있냐는 비아냥을 듣기 쉽다.대표적인 예가 바로 14시즌의 하이로 어센시오. 불펜이 뒤에서 1, 2위를 다투는 기아였지만, 어센시오 영입 당시 많은 이들이 왜 선발이 아닌 마무리를 데려오느냐는 불평이 많았다.


평가 기준


세이버메트릭스가 아닌 기존 전통적인 가치관에서 본다면, 마무리 투수들은 일단 경기 마무리라는 확실한 목적이 있기 때문에 세이브의 수가 많고, 블론세이브가 적어야 되는게 가장 중요하다. 비율 스탯이 나쁘더라도 일단 세이브가 많고 블론 세이브가 적으면 그럭저럭 양호한 마무리 투수로 평가한다. 하지만 비율스탯이 나쁘면서 세이브가 많고 블론 세이브가 적다는 이야기는 경기 운영도 운영이지만 운이 따라줘야 하는 이야기이고, 보통 비율스탯도 평균자책점이 2.5 이하, WHIP이 1.20 이하라면 훌륭한 마무리 투수로 평가한다. 


세이버메트릭스적 관점에서 본다면, 사실 '세이브'는 매우 객관적이지 않은 스탯이기에 이걸로 마무리투수를 평가하는 건 의미가 없다. 스코어 2:1 상황에서 나온 마무리 투수가 삼진 두 개를 잡아놓고도 솔로포를 맞아 1점을 허용해서 경기가 연장으로 흘러간다면 세이브는 사라진다. 하지만 3:0 상황에서 나온 투수가 솔로포 두 방을 맞고 2점을 허용하고 안타, 볼넷, 볼넷을 허용해 무사 만루까지 만들어도 운좋게 삼중살 하나를 만들어 내 이닝을 마무리짓는다면 세이브는 올라간다. 물론 이는 극단적인 비교이긴 하지만, 그만큼 세이브가 투수의 능력을 세밀하고 객관적으로 볼 때에 적절한 스탯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는 선발 투수의 승패 기록과도 똑같다.


세이버 관점에서 본다면 뛰어난 마무리 투수의 조건은 사실 뛰어난 선발투수와 크게 다를 게 없다. 많이 던질수 있고 삼진 많이 잡고, 볼넷 적게 주고, 홈런 적게 맞으면 된다. 다만 1이닝만 던지는 투수이기 때문에 6~7이닝을 던지는 선발 투수에게 요구되는 것보다 절대적인 기준 자체는 높다. 단적인 예로 2013년 메이저리그 기준 뛰어난 마무리 투수들은 평균자책점이나 FIP나 모두 1점대였다. 또한 포스트시즌같은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지치지 않고 던질수 있는 체력을 가진 마무리라면 초특급으로 분류할 수 있다.


마무리로서는 어떤 상황에서건 아웃을 잡아야 하기 때문에 높은 탈삼진 능력이 요구되고, 특히 실력도 실력이지만 보통 2사 만루와 같은 절체절명의 위기에서도 상대 타선을 막아내야하는 보직이므로 중압감 따위 씹어먹는 강심장이 필수. 더불어 한 경기를 시원하게 말아먹더라도 다음 경기에 다시 나와서 팀의 승리를 지키는 보직이므로 오만에 가까울 정도의 자기 신뢰 역시 필수로 아무나 맡을 수 없는 포지션이다. 잘하면 수호신, 못하면 방화범이라고 불리며 추앙과 추락은 종이 한 장 차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다시 말하지만, 다른 어떤 보직보다도 강철멘탈이 아주아주 중요하며 어찌보면 야구는 멘탈 스포츠라는 것을 가장 여실히 보여주는 포지션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셋업맨과 추격조가 받는 부담감의 차이보다 마무리와 셋업맨 간의 부담감 차이가 훨씬 더 크다고 한다.


그렇다보니 필승조에서 잘 던지던 투수, 구위를 앞세워 좋은 성적을 올리는 투수를 마무리로 낙점했는데 그 중압감을 견디지 못하고 성적이 바닥을 치는 경우도 종종 있다.그렇다고 해도 최고의 프라이머리 셋업맨이 마무리 투수로 정착하는 경우가 더 많다. 라이언 매드슨의 경우는 브래드 릿지가 부상으로 빠진 2011년 시즌 임시로 마무리를 맡아 괜찮게 막아냈다. 역대 최고의 마무리투수로 칭송받는는 마리아노 리베라 역시 마무리를 맡기 전 셋업맨으로 뛰었다.


마무리 투수는 현대 야구의 특성성 한 시즌에 50여 경기를 나와서 60이닝 내외를 소화하는게 일반적이며, 관리만 잘 해주면 한 명의 구원 투수만으로 충분하다. 거의 이런저런 이유때문에 9회만 맡기는 전담 마무리 투수를 두는 게 보통이다.


과거와 현재


과거에는 전성기가 지난 베테랑 선발이 마무리로 뛰다가 은퇴하는 형태였지만, 1990년대 중후반부터는 아예 데뷔 초부터 마무리로만 뛰는 투수들도 늘었다.


9회 마지막 한 이닝만 맡는 1이닝 마무리 개념을 최초로 정착시킨 사람은 토니 라 루사 감독이다.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에서 선발투수로 뛰다가 부상을 당해 불펜으로 간 데니스 에커슬리가 최초의 현대적 마무리 투수였는데, 토니 라 루사 감독은 선발 투수로써의 효용가치를 잃은 에커슬리를 마지막 이닝에 승리를 확정짓는 투수로 등판시키는 기용을 최초로 시도하여 루비콘 강을 건넜지만, 당시 사람들은 '다 이긴 게임 한 이닝만 등판해서 돈 받는 먹튀 투수' 라고 비꼬았다. 이건 팬들 뿐만이 아니라 타 구단 선수와 감독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언제나 처음은 힘든 것이지만 이 선택이 에커슬리의 사이영-MVP 독식으로 성공임이 입증되며 결국 너도나도 전문 1이닝 마무리 투수를 운용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여전히 메이저리그 기준으로는 상대적으로 야수나 선발투수에 비해 중요도가 떨어지는 불펜 투수에 불과함을 부정할 수 없다. 냉정히 말해 현대 메이저리그에서 불펜 투수는 선발 투수가 되려던 유망주가 선발 부적격 판정을 받고 향하게 되는 길이며, 마무리 투수는 개중 좀 나은 놈 일 뿐이다. 대학 야구나 마이너리그에서부터 불펜 내지는 마무리를 뛰고 처음부터 불펜으로 시작하는 유망주는 선발 투수가 되지 못하는 하자가 한 군데는 있는 선수다.


마무리 투수가 메이저리그에서 받는 대우를 명확히 보여주는 것은 역시 연봉. 2013년 기준 최고의 마무리 투수는 연봉이 1000~1100만불 선에 보통 2년, 길어야 3년 계약이다. 역사상 최고의 마무리 투수라는 마리아노 리베라 역시 3년 4,500만 불 정도의 계약을 따내는 정도였다. 뭐 조나단 파펠본에게 4년 4,800만 불 계약을 해 준 돌마로 같은 단장도 있긴 하지만 2013년 기준 메이저리그 평균 연봉 최고액은 클레이튼 커쇼의 연평균 3,000만 불이며, 소득 상위 125명의 평균 연봉은 1,410만 불인데, 마무리 투수는 올타임 넘버원이 되어야만 간신히 이 금액을 넘기게 되는 셈이다.


이렇게 메이저리그에서 마무리 - 정확히는 불펜이 - 천대받는 데에는 압도적인 인재풀에 기인한 감이 없지 않아 있다. 불펜 따위야 선발했다가 안 되는 유망주로 때워도 된다는 것. 그래서인지 메이저리그에는 '마무리 투수는 잘 나갈 때 팔아라' 라는 말까지 존재한다.


세이버메트릭스로 살펴본 마무리 투수의 중요성 역시 타 포지션에 비해 상당히 떨어진다. 2013년 기준 마무리 투수 중 WAR가 가장 높은 선수는 우에하라 고지의 3.3 이었으며, 2012년 역시 크레이그 킴브렐의 3.3 로 최고의, 정말 리그 원탑의 마무리 투수는 보통 이 정도의 승리 기여도를 기록하는데 이때 리그 최고의 선발 투수는 6.5~7.5 사이의 WAR 를, 최고의 야수는 8.0 수준의 WAR 를 기록한다. 때문에 세이머메트릭스나 비즈니스에 철저한 단장들일 수록 마무리 투수나 불펜에는 절대 큰 돈을 쓰지 않고 그때 그때 유망주로 때우거나 적당히 주워서 기용한다.


때문에 최상위권 라운드에서 전문 마무리 투수를 뽑는 팀은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다며 두고두고 까임거리가 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일단 선발로 키워보고, 안 되면 불펜으로 돌리고 그 중에서 잘하면 마무리로 승격시켜주는 게 훨씬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도 웬만한 1라운드 클로저 지명은 다른 선수들의 계약금에 더 쓰려는 의도가 아닌 이상 일단은 팬들이나 전문가들이나 까고 봤으며, 2009년 역사적인 1픽 스티븐 스트라스버그의 계약금을 마련하기 위해 다른 픽들은 계약금을 후려쳐야 했기에 10순위라는 역시 최상위권인 픽을 드류 스토렌에게 쓴 워싱턴 내셔널스 정도만이 1라운드에서 마무리를 고르고도 드래프트의 승자로 취급받은 바 있다.


그래도 세이버매트리션의 등장과 더불어 낮아지고 있는 마무리투수의 가치와 달리 시장가치는 굉장히 높은 역할이다. 매년 꾸준히 3선발급 성적을 찍는 선수가 분명 마무리 투수보다 가치가 높지만 8이닝 무실점으로 막은 투수도 못하는 경기를 마무리 하는 세레머니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팀이 우승할 때 마지막 공을 던지는건 팀의 에이스가 아닌 마무리 투수고, 포수와 맨 처음으로 껴안는 것도 마무리투수다. 그래서인지 선수의 절대적인 가치와는 달리 마무리투수가 팀의 상징적인 존재가 되거나 팀의 정신적 지주가 된다거나 하는 일은 꽤나 많다.


그래서인지 일본 프로야구에서는 사정이 약간 다르다. 일본 프로야구에서는 마무리 투수를 '수호신'이라 칭하며 수준급 마무리를 얻는데에 큰 돈을 들이길 마다하지 않는데, 엄밀히 말하자면 일본다운 비합리로 점철된 관습이다. 분명 2005년의 후지카와 큐지처럼 세이버메트릭스 기준으로도 마무리 투수가 웬만한 수준급 선발 투수 이상의 활약을 하는 비정상적인 일이 일본에서는 가끔 벌어진다. 하지만 그런 일이 자주 벌어지는 것은 아니며 애초에 후지카와 큐지부터가 2005년, 2006년을 제외하면 그런 초월적인 활약을 보여주진 못한다. 거기에 2005년의 활약은 사실 칭찬만 받을 게 아닌 게 등판 게임이 80경기에 소화 이닝이 92이닝이었다. 거기에 이런 예외를 제외하면 세이버메트릭스로 따져본 마무리 투수의 중요성은 일본 야구에서도 크게 다를 게 없다.

KBO에서는 MLB에 비해 경기수가 적고 선수층이 얇으며, 선수 육성에서 보직에 대한 개념이 미약하기 때문에 전문 마무리 투수, 아니 전문 선발 투수나 불펜 투수를 찾기가 어렵다. 이틀 전 선발로 던졌어도 나가랄 때는 나가는 것이 투수의 숙명이다 대부분의 성공적 전문 마무리는 선발 투수가 불가능한 투수다. 그래서 충분히 오래 던질 수 있는 선발타입의 투수임에도 불구하고 3선발급 투수에게 마무리 보직을 주는 경우가 더 많다. 기량이 좋은데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전업 마무리 또는 불펜으로 시작하는 경우는 공을 많이 던질수록 구속이나 구위가 떨어져서 선발로는 쓸 수 없는 경우가 보통이다.


좌타에 비교적 약한 언더핸드 및 사이드암 투수나 경험이 많지만 체력적인 문제로 오랜 이닝을 던지지 못하는 경우에도 마무리를 맡긴다. 단 좌투수 마무리가 거의 없는 만큼 이쪽도 위험성 때문에 롱런하기 힘들다. 애초에 좌투에 구위가 위력적이라면 웬만한 경우가 아니라면 당장 선발로 먼저 돌리는 게 정상이다는 모 돌감독은 마무리로 돌린다. 


특징


마무리 투수에게 요구되는 최고의 덕목 중 하나는 높은 삼진율, 낮은 인플레이 유도다. 아무리 땅볼 유도, 플라이볼 유도를 잘하는 투수의 공이라 할 지라도 타자가 공을 인플레이시키면 공은 둥글어 어디로 날아갈지 모르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변수가 늘어난다. 제대로 유도했다고 한 타구가 행운의 안타가 될 수도 있고, 에러가 나올 수도 있고, 내야 안타가 나올 수도 있다. BABIP이라는 스탯을 알게 되면 더더욱 이 이야기가 잘 와닿는다. 때문에 한 이닝을 확실히 책임져야 하는 마무리 투수는 변수를 최대한 없애기 위해 삼진을 많이 잡는 게 최고의 미덕이다. 


그래서 제구력이 좋거나 다양한 변화구를 던질 수 있는 투수(Finesse Pitcher)보다는 오래 던지지는 못하고 보유 구종이 적더라도 강력한 구위를 가지고 있는 투수(Power Pitcher)가 많다. 가지고 있는 구종이 적으면 확실히 다음 타순일 때 타자들이 쉽게 공략을 하기 때문에 맞아나가겠지만, 마무리는 타순이 한바퀴 이상 돌일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돌면 끝장이다


때문에 강력한 구위의 패스트볼을 가진 파이어볼러의 비율이 높고, 마무리 투수라 하면 흔히들 강력한 강속구를 가진 선수를 떠올리기 마련이다. 활동하고 있는 선수들을 봐도 한국 야구에서는 오승환, 손승락 등이 그렇고 메이저리그 역시 크레이그 킴브럴, 아롤디스 채프먼, 켄리 잰슨 등 파이어볼러 마무리들이 많다.


강속구 투수는 아니더라도 뛰어난 구위나 무브먼트를 가진 결정구가 있다면 마무리로써 맹활약 할 수 있다. 쩔어주는 역회전으로 인한 무브먼트로 구속을 메꾸는 평속 89 마일의 패스트볼과 스플리터를 구사하며 보스턴의 수호신으로 활약한 우에하라 고지, 무시무시한 각도의 슬라이더로 87마일 구속의 패스트볼을 가지고 있음에도 샌프란시스코의 뒷문을 걸어잠그는 서지오 로모, 어깨 수술 이후 강속구를 잃어버렸지만 특유의 팜볼 체인지업으로 타자들을 요리했던 트레버 호프만, 패스트 볼 구속은 86마일 대지만 패스트볼 제구와 뛰어난 구위의 체인지업, 슬라이더를 바탕으로 2004년 보스턴의 우승에도 기여한 키스 폴크, 2015년 한국 프로야구 최강의 마무리로 불리는 정우람 등이 그 예. 이런 투수들은 비록 구속은 느려도 심판의 스트라이크 존을 파고드는 칼같은 제구력과 상대의 헛스윙을 유도하는 위력적 결정구를 무기로 높은 삼진율을 기록하니 피네스 피처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피네스 타입의 마무리가 없었던 건 아니다. 한미일, 대만의 야구리그를 모두 경험한 타카츠 신고가 그 예. 타카츠는 메이저리그에서도 비록 한 시즌 뿐이지만 화이트삭스의 마무리를 했었는데 이 때에도 삼진율이 높은 편은 아니었다.


비록 마무리 보직을 오래 맡았던 것은 아니지만 브랜든 리그, 하비 게라, 짐 존슨과 같이 삼진율이 높지 않은 땅볼 유도형 투수들이 마무리를 보게 되는 경우가 2010년대 메이저리그에서 가끔 생겨나고 있다. 하지만 이 중 짐 존슨을 제외하면 나머지 둘은 결국 마무리를 보다가 팀에서 트레이드 되거나 다른 선수에게 자리를 빼앗겼으며 짐 존슨도 2년 연속 50 세이브를 돌파하긴 했지만 낮지 않았던 블론 세이브 숫자, 낮은 평균 자책점에 비해 낮지 않은 FIP 등을 이유로 볼티모어 오리올스에서 트레이드 됐다. 


메이저리그에서 유망주를 평가할 때, 패스트볼의 구위가 뛰어나지만 구종이 단조롭고 체력이 떨어지는 선수를 불펜 투수로 간주하며 이 중 뛰어난 선수가 프라이머리 셋업맨을 거치다 마무리 투수로 정착하는 것이 일상적이다. 가끔씩 마이너에서 선발 투수로 활동하다가 메이저로 올라가기 직전 불펜 투수로 전업하는 사례도 있는데, 팀 사정도 있지만 대체로 위의 이유로 선발 부적격 판정을 받는 경우가 많다. 마리아노 리베라를 비롯해 꽤 많은 선수들이 이런 식으로 선발에서 불펜으로 전업했다.


또한 위와 비슷한 이유로 마무리 투수는 우완 정통파를 선호한다. 좌완 투수나 언더핸드/사이드암 투수는 우완 정통파보다 좋은 구위의 투수를 찾기 어려우며, 좌투수 킬러 우타거포, 혹은 사이드암 킬러 좌타자등 대타 작전을 통한 스나이핑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마무리


일부 세이버메트리션들은 3점차로 앞서고 있는 9회에 불펜의 가장 강력한 투수를 투입하는 것 보다 7회나 8회쯤 1~2점 차의 박빙일때 마무리 투수를 일찍 투입하고, 9회에 불펜에서 2~3번째로 강력한 투수를 투입하여 마무리를 짓는것이 더 의미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따라서 7회나 8회 승부처에 가장 강력한 불펜을 투입하고 9회에는 그날그날 컨디션 좋은 투수가 던지게 하는 '집단 마무리 체제'를 도입하는 팀이 있다. 실제로 컨텐더급 팀이라면, 클로저에 못지 않은 최고의 기량을 가진 불펜투수가 중간에서 이닝을 많이 먹어주는게 매우 중요하다. 후술할 오승환과 손승락의 앞에서 뛰던 안지만과 조상우같은 선수가 1이닝을 무실점으로 막는다면, 실제로 경기내의 공헌도는 절대 클로저에 못지 않은 중요한 성과이다. 


하지만 야구는 사람이 하는 스포츠인지라 실제로 9회에 등판하는 투수가 받는 심리적인 중압감 및 스트레스는 상상을 초월한다. 때문에 연습할때는 차이가 안나도 박빙의 9회에서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투수는 흔치 않다. 또한 이때문에 내가 만약 털리더라도 더 잘하는 불펜투수가 뒤에 있다는걸 믿고 전력투구한다는 자신감때문에라도 중간계투와 클로저의 마인드 차이는 어느정도 존재한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문제는 돈이다. 특히 대다수의 불펜투수들이 한해 한해 먹고사는 비정규직인데 반해 메이저리그에서 마무리 투수는 불펜 투수들 중에서도 이기는 상황에만 등판하며 팀의 투수진 플랜에 들어가 이닝및 휴식일 관리를 받는 유일한 정규직이기 때문에, 마무리 투수가 되느냐 마느냐는 아무리 뛰어난 투수라도 자신의 선수 생명과 고액 연봉에 중요한 기로가 된다. 그래서 아무리 구위 좋은 특급 계투들이 즐비해서 서열을 정하기 힘들더라도 계투들의 동기 부여를 위해 마무리 투수를 확정하는 경우가 많다.


상대적으로 미국야구에 비해 보류조항이 강력하고, 감독과 코치의 권위가 현장에서 중시되며 미국야구처럼 손쉽게 전문 불펜투수를 구하기 힘든 환경인 동양 야구가 집단 마무리 시스템을 쓰기가 좋은 편. 일본의 경우는 더욱 독특한 환경이라 9회 등판하는 클로저와 상관없이 수호신으로 인정받는 계투가 따로 있는 경우도 많다. JFK시절의 후지카와 큐지, 2011년 센트럴리그 MVP인 아사오 타쿠야의 경우는 클로저가 아님에도 팀내 위상이 클로저보다 높았던 특이 케이스. 반면 MLB에서 집단 마무리 체제는 팀 내에 확실한 마무리 투수가 없을 때 어쩔 수 없이 도입하는 경우가 많고 현대 야구의 투수 분업화 시스템은 집단 마무리의 개념을 상당부분 차용하고 있다. 2004년의 오클랜드 어슬레틱스(옥타비오 도텔, 짐 메시어, 채드 브래드포드)나 2005년의 시카고 화이트삭스(바비 젱크스, 더스틴 허만슨, 네이트 코츠 등)이 대표적인 경우다.


더블 스토퍼 체제라 하여 믿을만한 마무리 투수가 없는 팀에서는 두 명의 마무리 투수를 두는 경우가 있다. 상황에 따라 둘 중 한 명을 세이브 상황에 투입하는 체제로, 레너드 코퍼드는 <야구란 무엇인가>(The New Thinking Fan's Guide to Baseball)라는 책에서 좌완/우완 두 명의 마무리 투수를 대기시키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말한다. 마무리급 좌완 투수가 흔하지 않은 현실상 KBO는 물론, MLB나 NPB에서도 흔하지 않은 투수 운용이다. 실제로 이게 가능한 팀은 정반대로 특급 마무리가 좌/우 둘이라서 가능한 케이스 예를 들면 앤드류 밀러와 코디 앨런 두명의 특급 불펜 좌우 원투펀치로 밀어붙였던 2016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가 그렇다.


KBO에서는 불펜이 약한 팀에서 더블 스토퍼 체제를 쓰는 경우가 있다. 프라이머리 셋업맨과 클로저의 구분 없이 위기상황이 생기면 7, 8회라도 아웃 카운트 한 두 개를 잡기 위해 릴리프 에이스를 먼저 투입하고 다른 한 명에게 9회를 맡기는 경우가 있으며, 릴리프 에이스가 너무 자주 등판하거나 하면 또 다른 한 명이 대신 9회에 투입하고 게임이 연장까지 이어질 경우 다른 한 명이 대비하고 있는 것이다.


졸판왕?


어느 리그나 마무리 투수가 불펜 에이스 취급받는건 당연하지만, 한국은 일본리그 영향+리그의 환경때문에 세이브 상황이 아니라도 언제든지 위기 때 구원등판해서 무실점으로 막아주는 것을 마무리의 덕목으로 꼽는다. 실제로 투수 분업이 되어있는 현대 야구에서 마무리 투수는 마지막 이닝 세이브 상황 때 등판하여 안정적으로 경기를 끝내는 것을 의미하지만 이상하게도 한국의 야구팬들은 그것을 용납치 않는다. 대표적으로 2011, 2012시즌 때 오승환이 세이브 상황이 아닐 때는 등판을 하지 않는다 하여 '졸렬한 끝판왕'이라 하여 졸판왕이라고 조롱을 해 댔다.


그 때문에 2012년 시즌 기준으로 50경기 55⅔이닝 2승 1패 37세이브 평균자책점 1.94의 오승환보다 53경기 50⅓이닝 3승 2패 33세이브 평균자책점 2.15의 손승락이 야구팬들에게서 더 높은 평가를 받는 일도 생겼다. 손승락은 당시 넥센 히어로즈의 열악한 불펜 사정상 세이브 상황이 아닌 박빙의 동점 상황에서도 등판하는 일이 있었고, 불펜이 튼튼한 삼성 라이온즈는 정말 어지간히 중요한 경기가 아닌 이상에는 굳이 오승환을 올릴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오승환은 그대로 벤치에서 대기 중이었던 장면이 많이 잡혔다. 이 때문에 '야갤'에서는 손승락이 동점 상황에 등판할 때마다 '역시 팀을 생각하는 갓승락니뮤ㅠㅠ 졸판왕과는 차원이 다름!' 이라고 후빨을 하는 지경이었다.


야갤 구성원의 대다수는 야빠, 그것도 이미 라이트 팬의 수준은 넘어선 이들이 대부분이며, 당연히 적어도 2012년의 오승환과 손승락 중 누가 더 나은 마무리 투수인가 정도는 다들 알고 있다. 그러니까 진심으로 손승락이 오승환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우승팀의 클로저인 오승환을 까기 위해서 억지로 손승락을 찬양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기록상으로도 드러나듯 출전 경기수도 달랑 3경기 차이에, 오승환이 더 많은 이닝을 던졌고 기록도 더 좋다.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실제로 전문 마무리 투수는 '공무원급 야구선수'라는 조롱과는 달리 육체적, 정신적 스트레스가 매우 심한 보직 중 하나다. 9회 이기는 경기 3점차 내 등판이라는게 다른 중간계투보다는 정규직에 가까운 환경일 뿐, 마무리 투수도 언제 자기가 등판할지 모르는 비정규직인건 다를바 없다. 심하면 1주일에 6경기 모두 등판을 해야 할 수도 있고, 1주일간 공 한번 못만져보고 퇴근 할 수도 있다. 또한, 마무리 투수라고 컨디션 기복이란게 없는 기계일리가 없다. 몸상태 좋고 촥촥 긁힐때 나올 기회가 없어서 좋은 컨디션을 날리는가 하면, 감기몸살로 몸상태가 말이 아닌데 믿을맨이 자기 혼자 뿐이면 하늘이 노래보여도 나가서 상대타자를 맞닥트려야 한다. 


분명히 알아둬야 할 점은 마무리 투수라는 선수가 그렇게 마구잡이로 올라오는 건 결국 ' 우리팀 불펜 매우 약함 ㅋ 그래서 얘까지 막 올려야 함 ㅋ '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일반 야구팬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장면만을 기억하니 졸판왕 졸판왕 할 수밖에 없다. 졸판왕 소리 듣던 오승환의 소속팀인 삼성 라이온즈는 '당시 불펜이 튼튼했기에 굳이 오승환까지 마구잡이로 올려야 할 필요가 거의 없었고', 팀을 위한다는 손승락은 사실 말이 좋아 팀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었지, 정확히 보면 제 몸을 갉아먹어가며 무리해서 등판을 했던 것이다. 즉, 선수들의 희생정신이 누군 투철하고 누군 아니었던 것이 아니라 삼성 라이온즈의 불펜은 오승환까지 마구잡이로 올릴 필요가 없는 안정된 불펜이었던 반면 넥센 히어로즈의 불펜은 손승락까지 마구잡이로 올려야만 겨우 이어갈 수 있는 약한 불펜이었다는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이는 스케줄이 한국보다 훨씬 타이트한 미국도 마찬가지여서, 역사상 최고의 클로저로 명성이 높던 마리아노 리베라도 절대 정규시즌에는 2이닝 마무리를 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불펜 혹사로 악명이 높은 조 토레감독 밑에서 활동했을때도, 정규시즌에는 최대한 8회 등판을 자제했고 1이닝으로 끊었다. 그렇게 정규시즌에 체력을 관리한 다음 단기전에 돌입해서야 봉인을 풀고 2이닝씩 던지는 철벽 마무리로 군림했던 것. 오승환 역시도 정규시즌에는 최대 1.2이닝을 절대 초과하지 않았고 대부분 9회에만 등판했으나 2013년 한국시리즈 2차전에선 4이닝을 던지고 이틀 후에 1점차 세이브를 거두는가 하면 2014년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도 세이브를 거둔 다음날 3이닝을 던졌다.

지금까지의 역사


한국과 독일은 1883년 조선전권대사인 민영목과 주(駐) 일본 총영사인 자페 간의 '한독 수호통상조약' 을 통해 공식적으로 외교관계를 맺었으며 1884년 한양에 한옥으로 된 주(駐)조선 독일 총영사관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외교관계가 단절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중화민국 상하이에 있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일본 제국 이하 나치 독일, 이탈리아 왕국 등 추축국에 선전포고하면서 잠시 적대관계가 되기도 했다.


종전 후 연합국에 의해 독일은 동서(東西)로, 한국은 남북(南北)으로 분단되면서, 1949년에는 북한이 동독과, 1955년에는 대한민국이 서독과 외교관계를 맺었다. 1990년 10월에 동서독이 통일되자, 통일 독일은 대한민국과는 외교관계를 지속하였으나 북한은 일반대표급으로 격하시켰다가 2001년에 외교관계를 복원했다.


역사적 비교


적지 않은 한국인들이 이념 대립으로 인한 분단의 비극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독일의 역사에 동질감을 느끼곤 한다. 그러나 한국과 독일이 비슷한 점은 현대사, 그것도 타의에 의한 분단이라는 사실 하나뿐이며, 기실 양국은 분단의 원인은 물론 역사적인 맥락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서 안티테제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상반되는 면모를 보인다. 굳이 한국을 유럽 국가에 대입한다면, 폴란드나 아일랜드 공화국과 유사점이 더 많은 편이다.


구조적으로 봤을 때, 한국과 독일이 비슷한 점은 제조업이 강하고 수출 지향적이며 저출산 고령화라는 도전을 안고 있는 점 등을 꼽을 수 있다.


한편, 위의 서술에 대한 추가 의견으로 현대사에서 한국과 독일은 많은 지정학적 동질성을 공유하고 있다. 각각 동아시아와 유럽에서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이 만나는 관문에 위치했으며, 이 때문에 냉전시기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병존하는 분단의 역사를 공유하게 된 것이다. 

또한 둘 모두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끝과 서쪽끝에서 역사적으로 나름의 생존 능력을 발휘하면서 하나의 독특한 세력권과 문화를 갖춘 국가의 모습으로 살아남았고, 단일 민족에 대한 자긍심(비록 환상이지만)을 지니고 살고 있다.

더불어 두 민족 모두 전통적으로는 기록을 중시한 민족이라는 점, 현대에 와서는 제조업을 국가의 핵심 산업으로 생각한다는 점도 상당히 닮은 점이다.

더 나아가 바다로 나가는 길목을 왕이 다스리는 섬나라들이 막고 있으며, 속한 지역의 자본시장 역시 그 섬나라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는 점도 닮았다. 반대로 대륙으로 나가는 길은 공산주의 세력에 의해 막혀있다.


여담으로 근대사적 상처를 하나 더 공유하고 있는데 바로 중앙아시아 이주민 문제다. 각각 고려인과 볼가 독일인으로 불리는 이주민들은 정치적 문제로 소련 정부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이주되어 척박한 토지를 개간하거나 농사를 짓는 노동력으로 이용되었다. 현재는 각각 50만명, 80만명 정도가 러시아 중부,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지에서 각자의 문화에 러시아 문화가 혼합된 문화를 보존하며 살고 있다.


한국인이 보는 독일은?


일반적으로 한국인들은 독일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를 자동차, 맥주, 베토벤이나 바흐, 환경 등을 얘기하고, 독일의 덕목으로 근면성, 효율성, 강한 조직을 꼽는다.


한국이 과거사 문제로 옆나라와 끊임없는 갈등을 빚고 있어서인지, 한국인들은 대체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잘못된 행적을 분명히 인식하는 독일의 태도에 매우 호의적이다. 때문에 많은 한국인들이 일본더러 독일을 반만 닮아보라고 충고를 빙자한 욕설을하기도 한다.


그러나 보편적인 인식과는 달리, 독일의 과거사 반성은 주로 나치 독일 시절의 침략전쟁 및 전쟁범죄에만 국한되어 있으며, 일본이나 다른 유럽 식민제국들처럼 식민지에 대한 수탈을 나몰라라 하는 것은 크게 다를 바 없다. 심지어 그 전쟁범죄조차도 미국을 등에 업은 이스라엘의 주류 민족인 유대인 대상 홀로코스트, 그리고 폴란드나 러시아 등 외교관계를 관리할 필요가 있는 국가들에 한하여 배상하고 있을 뿐, 동유럽의 약소국이나 나라 없는 집시들의 피해에 대해서는 알지도,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순전히 식민지 문제만 놓고 보면, 그나마 무라야마 담화나 고노 담화처럼 여러 차례 사과를 표명했었고 한일기본조약으로 공식적인 배상까지 했던 일본이 차라리 나아 보일 정도이다. 국제사회가 철저히 힘의 논리에 따라 움직인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동서분단 시절에는 남북분단으로 있는 한국과 동병상련이었기 때문에 서로 비슷해보였다. 독일인은 그리 생각지 않았겠지만 광부, 간호사 파견 등에서 보듯 한국은 독일의 경제성취(이른바 "라인강의 기적")를 부러워했고, 자국의 성취를 "한강의 기적"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동서로 갈라졌으면서도 유학생이 많았기 때문에 1960년대 1970년대를 전후해 북한과 접촉이 많아 납북, 망명, 간첩사건도 많았고 또 그를 이용해 독재정권을 공고하게 하려는 고문조작 간첩 사건(동백림 사건 등)도 많았다.


이후 통일이 되면서 한국에게 독일식 통일 모델은 가장 이상적이고도 전형적인 모델로 여겨졌다. 그러나 동서독 국경은 유럽의 휴전선이었으며, 동독은 자유 진영에 대한 공산권의 광고판이나 다름없었기에 소련으로부터 막대한 지원을 받았다. 게다가 공산주의의 발원지다운 사상적 배경과 양차대전을 일으켰을 정도의 국력이 합쳐졌기에, 적어도 아무것도 없었던 데다가 그나마 남아있던 공업단지도 자업자득이지만 한국전쟁으로 다 날려먹고 막장 독재자가 권력을 장악한 북한에 비하면 인권/경제 사정이 훨씬 나았다. 때문에 90년대와 2000년대 흡수통일의 후폭풍이 널리 보도되자, 서독과 동독의 차이에 비해서도 넘사벽인 경제적 부담 때문에 통일을 반대하는 분위기도 등장하였다. 


한편 현대 독일이 유럽의 정치·경제적 중심지인데다가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선진국이다 보니, 한국의 여러 문제점들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독일의 선진성을 농반진반으로 찬양하는 모습도 보인다. 여기에는 1인당 GDP, 인간개발지수, 민주주의지수, 부패인식지수, 언론자유지수 등 각종 통계에서 어지간한 선진국들마저 압도하는 독일의 위엄이나, 프로이센 시절부터 나치 독일을 거쳐 이어져오는 왠지 모를 기술 강국의 이미지, 그리고 프랑스나 영국 등 주변국들에 비해 여행객들에게 대체로 깔끔하고 잘 정돈된 듯한 느낌을 주는 거리 등 복합적인 요소가 작용하는 듯하다. 물론 어느 나라나 그렇듯이 빛이 있으면 어둠도 있는 법이니 좋은 건 보고 배우되 맹신할 필요는 없다. 


법학과, 행정학과 소속 교수들 중에는 독일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들어온 경우가 적지 않다. 심지어는 슈파이어 국립 행정대학원에서 박사를 받고 들어온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책에서 독일어가 많이 나오는 편이고, 책 정보-제목 등도 독일어로 기록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국내 과학계에서도 아무래도 미국 출신들이 대세이기는 하지만 20세기 과학의 성지답게 독일에서 유학한 연구자들이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한다. 특히 독일이 현대 유럽의 중심이니만큼, 입자물리학처럼 미국과 유럽이 경쟁하는 분야들에서는 독일의 지분이 상상외로 크다.


독일인이 보는 한국은?


19세기 말에는 서로 외교적인 접촉은 있었지만, 양국간의 국민적 인식은 거의 전무한 수준이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당시 독일(프로이센)은 보오전쟁, 보불전쟁 등을 거치며 이제야 통일 국가가 들어선 상황이었고, 조선은 각종 내우외환에 시달리느라 한반도에 별로 간섭할 의지도 능력도 없는 머나먼 유럽 국가에 관심을 둘 겨를이 없었다. 


특이사항으로는 1899년 하인리히 친왕이 대한제국을 방문하기도 했고, 독일 제국의 빌헬름 2세가 대한제국의 고종 황제를 Kaiser von Korea라 칭해 주었던 기록이 있지만, 그래봐야 외교적 수사에도 미치지 못하는, 그냥 그랬다더라 하는 수준의 이야기일 뿐, 구한말의 정세에 독일이 실질적으로 관여하지는 않았다. 당시 독일인들의 조선에 대한 인식은, 비유하자면 현대 한국인들이 저 멀리 아프리카나 남미의 별로 유명하지 않은 수교국 A에 대해 가지는 인식 정도였을 것이다.


정치인들을 제외한다면 독일에서 대중적으로 알려진 첫 한국인은 아마도 1936 베를린 올림픽 당시 한국인 금메달리스트였던 손기정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당시 한반도는 일제강점기를 겪고 있었기 때문에, 손기정의 소속은 일본 제국(정확히는 일본령(領) 조선)이었으며 세계인들도 당연히 한국인이 아닌 일본인으로 인식했을 것이다. 광복 후 한 공무원(혹은 의원)이 독일의 손기정 기념비에 기록된 국적을 바꾸려 시도하기도 했으나, 그런다고 공식 기록이 바뀌진 않았고 훼손죄로 처벌을 받았다. 현재 IOC 기록에선 일단 일본 선수로 기록하고, 손기정 선수에 대한 당시 조선의 상황 설명을 첨부하는 수준이다.


또한 2차 대전 패전 이후 서독에서는 1946년에 출판된 작가 이미륵의 소설 '압록강은 흐린다'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교과서에도 수록될 정도로 독일인들에게 호평을 받았다.


이후 축구선수 차범근이 분데스리가에 진출, 맹활약하며 독일 내에서 한국에 대한 인지도를 상당히 상승시켰다. 차붐의 등장으로 인해 한국이란 나라를 처음 알게 되었다는 반응이 대다수. 갈색 폭격기 차붐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던 차범근은 이후 분데스리가 전설의 반열에 오른다. 이런 차범근의 업적은 이후 한국 선수들의 독일 진출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실제로 그의 독일 내 위상은 말하면 입 아픈 수준이다. 항목 참조.


독일인들 가운데는 남북간의 분쟁이나 북한이 국제사회에 끼치는 악영향을 쌍방과실로 인지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는 동서독이 실제로 남북한과는 달리 냉전기에도 제법 상당히 활발하게 교류하였으며 동방정책으로 대표되는 관개개선 시도를 여러 차례 했던 전적이 있기 때문에, 남북한이 서로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상황이나 북한의 극한도발→남한의 강경반응→더 강한 도발로 이어지는 구조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쯤 보면 알겠지만 동독 입장에서 북한은 통계상으로 나타나는 경제력부터 지도층의 정신상태에 이르기까지 비교되는 것조차 실례인 국가이므로, 남북관계의 문제를 쌍방과실로 인지하는 건 양국의 서로 다른 역사적 경험에 기인한 오해에 가깝다고 봐야 한다. 


BBC 국가 영향 평가 여론조사에 따르면 한국이 세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가장 좋지 않은 평가를 내린 나라는 독일이라고 한다. 특히 다른 나라까지 와서 사업하면서 야근을 밥먹듯 시키는 한국의 골때리는 기업문화를 그들이 이해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위와 같은 이유도 있고 해서 혐한 수준이라고 보긴 어렵다. 최근 들어 삼성, LG 같은 한국 기업들의 성공적인 국외 마케팅과 함께 두각을 나타내는 예술계 인사 등으로 “한국을 세계에 알리는 기회의 폭이 아주 넓어졌기 때문"이다. 실제 2005년에는 프랑크푸르트 국제 도서전에서 한국이 주빈국으로 행사를 성공리에 치렀고, 2004년 베를린 영화제에선 김기덕 감독이 사마리아로 감독상을 수상했다. 2007년 박찬욱 감독의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는 알프레드 바우어상을 수상하면서 독일뿐 아니라 유럽 전역에 한국영화를 알렸다. 2012년에는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대박을 치면서 일본을 제외한 여느 나라에서나 그렇듯 독일에서도 관심을 보였다. 싸이는 EMA에서 공연을 가진 뒤 최고의 권위를 가진 상인 EMA 베스트 비디오 상을 타기도 했다.


한편 한국은 1990년대 후반부터 독일 비자 발급이 용이해지기 시작했으며, 2000년대가 돼서는 비노동 비자일 경우 독일 비자를 찍어주는 기간이 최소 소지 금액에 비해서 길어졌다. 쉽게 말해 한국인이 독일에서 불법 체류할 가능성이 적다고 판단했다는 의미로, 한국의 경제적 성장을 어느 정도 반영했음을 알 수 있다. 독일어를 알아야 가지 이미 1972년부터 한독간 사증면제협정에 따라 독일로의 무비자 입국 및 90일간의 체류가 가능했으며 장기체류 허가 또한 현지에서 직접 받을 수 있는데, 참고로 독일에 무비자 입국이 가능한 비 EU 국가들은 한국, 미국, 캐나다, 일본, 호주, 뉴질랜드, 이스라엘 뿐이라 한국이 독일 정부로부터 불법체류 가능성이 낮은 국가로 대우를 받는다고 할 수 있다.


협력 및 진출

2016년 3월 7일 국방부는 독일 국방부와 '한-독 군수협력에 관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하고 양국 간 군수협력회의 정례화 등 군수협력 강화 방안을 논의했다. 양해각서에 따라 한독 양국은 군수협력회의를 정례화하고 지금까지 유지해 온 우호협력관계를 심화, 발전시키고 군수혁신 경험 등을 공유하기로 합의한다. 
또한 국제평화유지군(PKO) 활동이나 재난구조 등의 분야에서 군수협력을 강화해 나갈 가기로 했다. 군 관계자는 “이로써 우리 군은 국제평화유지군(PKO) 활동 등 독일과 공동으로 참여하게 될 다양한 군사작전 분야에서 군수지원능력을 향상시켜 작전역량을 높이고 안정적인 임무수행을 기대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국방부는 지금까지 미국, 호주 등 15개 국가와 상호 군수협력을 위한 양해각서를 체결해 시행 중이다. 또한 향후 우방국들과의 군수협력을 지속적으로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현대자동차는 ?

현대자동차그룹의 중심이 되는 회사이다. 현대그룹을 창업한 故 정주영 회장이 일제강점기인 1940년 3월에 인수하여 서울 마포구 아현동에서 운영했던 아도서비스라는 자동차 정비공장을 그 근원으로 볼 수 있다. 정주영 회장은 빨리, 완벽하게 고치고 수리비는 많이 받는 방침으로 사업 성공의 토대를 닦았다. 1940~1942년 당시에는 자동차 보급률이 매우 낮았다. 그 때문에 자동차를 빨리 수리해야 고객층을 유지할 수 있었다. 다른 수리공장에서는 수리비를 더 받으려고 자주 늑장을 부렸다. 그러나, 정주영 회장은 '자동차가 고장나면, 차주인이 발이 묶여 힘들어 한다. 그러므로, 빨리 차를 고치는 게 고객을 위한 길이다.'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보통 밤 12시까지 작업소에 머물면서, 고객들 차를 빨리 빨리 수리했다. 이처럼 "빨리 빨리"와 "빠르고, 정확하고, 납기 준수" 철학이 있었기 때문에, 경영은 순조로워 수익을 많이 냈다. 그러나 이후 공장이 불타 없어지고 전쟁까지 일어나자, 사업이 어려웠다. 결국 일제는 기업 통제정책인 ‘기업정비령’을 실시했다. 이 과정에, 종로 5가에 있는 '일진공작회'로 정 회장이 소유하던 아도서비스가 강제 흡수·합병 되었다. 정 회장은 어쩔 수 없이 자동차 수리업을 그만두었다. 이후 아도서비스를 정리한 자금으로 트럭을 구입하여 석탄운반업을 하였으며, 해방 이후 아도서비스를 반환받아 1946년에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설립한다. 설립 직후에는 미군 병기창에서 하청을 주로 받았으나 점점 수요가 늘었고, 이 회사를 현대토건사가 흡수해서 현대건설로 변모한다.


현대자동차의 공식적인 역사는 1967년 자동차 제조업에 뛰어들면서부터 시작한다. 1967년 12월 정주영 동생 정세영이 정식으로 회사를 설립하여 당시 자동차 최강국인 미국의 포드와 기술계약을 채결하고 기술을 도입했다. 초기에는 포드 코티나를 조립, 생산하면서 자동차 생산 기술을 배웠다. 또한 70년대 중후반에는 메르세데스-벤츠와 기술제휴를 맺고 버스 생산 및 승용차 수입에 들어갔다. 


포드의 모델을 대한민국에 조립생산 방식으로 들여와서 판매하다가 1973년 기술이전 문제로 포드와 갈라섰다. 그리고 1980년대 중반엔 메르세데스-벤츠와 갈라선다. 이후 독자적인 모델을 생산하려고 자체개발을 시작하였으며, 일본의 미쓰비시와 기술계약을 새로 체결했다. 한때 세계에서 자동차 산업이 가장 컸지만, 영국병과 잦은 노사 불화로 몰락한 당시 영국 최대 자동차 회사, 브리티시 레일랜드 부사장이었던 '조지 턴불'을 영입하여 엔진, 엑셀러레이터, 트랜스미션 같은 주요 부품 제작 기술 계약을 체결하였다. 


1976년 대한민국 자동차공업의 자립화를 선언한 고유 모델인 포니를 시작으로 독자모델 생산을 시작하여 쏘나타를 기점으로 대한민국 최대 자동차 기업으로 떠올랐고, 아시아에서 2번째로, 독자 자동차 모델 생산국이 되었다. 당시 미국 정부는, 주한 미국 대사에게 정주영 회장이 자동차 독자 개발을 포기하도록 지시하기도 하였다. 1977년 당시 리처드 스나이더 주한 미국 대사가 정주영 전명예회장을 만나 “현대가 포니의 독자 개발을 포기하면 모든 힘을 다해 현대를 지원하겠다. 중동 건설에서도 현대자동차를 도와주겠다”고도 하였으나 정 회장은 이를 거절했다. 관련기사 아무래도 대한민국이 언젠가는 미국 자동차 산업을 위협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미국이나 일본은 자신들 국가의 대기업이 한국의 공업을 점유해서, 자신들 제품을 조립해주기만 하는 공장을 갖고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고자 정주영에게 압력을 많이 넣었다고 한다. 한국이 독자적인 엔진 기술을 개발해낸다면 자신들이 챙길 이익은 적어지고, 한국이 독자적인 차량, 상품 등을 만들 수 있기 때문. 정주영은 결국 모든 압력을 무시하고 독자개발을 밀어붙였다.


1976년 남미 에콰도르에 포니 5대를 수출한 것을 시작으로, 국산차를 해외 시장에 내놓았다. 1980년대 말 엑셀을 북미 지역으로 수출해서 북미 시장에 진출했다. 현재는 전 세계로 자동차를 수출하는 거대 기업으로 성장했다.


북미 시장 공략을 강화하기 위해 캐나다 퀘벡 주 몬트리올 인근의 브로몽에다가 현지공장을 1986년에 착공하여 1989년에 가동을 시작했으며, "현대모터캐나다"라는 캐나다 현지 법인을 세웠다. 브로몽 현지공장에서는 쏘나타를 생산하여 미국 등지에 공급했다. 하지만 당시 북미 승용차 시장에서 일본 메이커들이 미국 현지공장에서 생산하는 등 초과공급인 상태에서 현대자동차는 당시에 품질이 떨어진다는 나쁜 평가를 받아 실적이 부진했다. 연간 1만대~2만대 가량 생산하는 데 그쳐 손익분기점을 넘지 못하는 등 누적 적자가 가중되어 1993년 10월에 가동을 중단한 후, 1996년 2월 현대모터캐나다를 청산하기로 결정하면서 브로몽 현지공장은 매각되었다. 덧붙여서 브로몽 공장을 지었을 때 캐나다 정부로부터 받았던 보조금도 모두 상환했다. 브로몽 공장의 청산은 현대자동차에게 있어서 악몽이나 다름없는 흑역사였고, 정세영 前 사장도 북미 시장에 대한 충분한 조사를 하지 않고 브로몽에다가 공장을 지은 것을 후회한다고 언급했다.


1998년 10월 기아자동차와 아시아자동차를 인수하였고, 2000년 9월 현대그룹에 있는 다른 계열사 9개를 가지고, 현대그룹에서 독립해서, 지금 있는 현대자동차그룹을 형성하였다. 


정몽구가 그룹 회장에 취임했고, 현재 현대자동차그룹은 현대그룹에서 분리된 전혀 다른 기업 집단이다. 연간 차량 총 생산량 기준으로 기아자동차를 합치면 세계 5위의 자동차 생산 기업이며(2013년 기준 756만대) 현대차가 별도로 생산하는 차량도 세계 8위 수준이다. 2009년 정몽구의 아들인 정의선이 부회장에 임명되었다.


더 알아보면...

내수시장에서는 경쟁사 '대비' 저렴한 가격에 뛰어난 상품성과 동력성능을 자랑하며 넓은 실내공간이 특징이다. LPI엔진, 1.6~3.0리터 디젤엔진등 다양한 연료사용가능성과 염가패키지로 택시,렌터카,관공서등 플릿시장에서 또한 높은 시장지배력을 지니고 있다.


보쉬와 합자하여 케피코를 설립 했고(현재는 분리), 합자를 통한 기술 이전을 시도했으나 막상 보쉬의 보수적인 운영으로 큰 실효는 거두지 못했다는게 중론. 독자기술개발에 꾸준히 투자하여 현재는 유럽 및 일본의 자동차 기업과 비교하여 짧은 시간안에 상당한 수준까지 기술격차를 좁힌 상태이다. 그 뒤에는 보쉬가 있다 기술은 사오면 된다며 R&D와 엔지니어들을 천시하던 대우자동차의 행보 및 그 결말과 대비되는 모습이다


알파엔진의 개발성공과 엑센트가 나오기 이전까지는 미쓰비시 자동차와 기술협력관계를 통해 기술제공(엔진, 파워트레인 등)을 받아가는 기술종속적인 관계였으나 현재는 자체기술을 바탕으로 한 설계능력을 갖추고 일부기술은 외국경쟁업체에 팔기도하는 등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다. 현재 에쿠스는 자체개발 모델로 탈바꿈하고, 프라우디아는 닛산 후륜구동 세단 OEM으로 나오는 2013년 현재를 보면 참 묘하다. 과거 80년대 미쯔비시는 현대차가 독자적으로 엔진을 개발하는 것을 막기 위해 로열티를 깎아줄테니 엔진 개발 연구소를 폐쇄하라고 압력을 넣기도 했다. 당시 엔진 개발을 하던 연구원의 책상이 출장 다녀온 후 없어지는 등 그 고초는 엄청났다.


그러나 결국엔 자체적으로 엔진을 개발해 내고, 생산하고 자회사인 현대파워텍과 현대모비스를 통해 부품 및 소재까지도 서서히 자체적으로 생산, 소화해내면서 최근 10년간 독자적으로 개발해서 내놓는 자동차 관련 기술이나 시스템이 늘어나는 추세.


독자적으로 개발한 주행 시스템 중 대표적인 것이 AGCS(Active Geomatric Control Suspension, 능동제어 서스펜션 시스템)이 있다. 하지만 AGCS는 YF에서는 제외되었는데, 다른 4WS와 비슷하게 잊혀져 갈 듯 하다. 개발자 후문으로는 초기 적용차들에서 좌우 액튜에이터가 반대로 장착된 체 판매되었다고 하니, 초기 베타테스터들은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GDI는 에쿠스를 도입하면서 미쯔비시에서 같이 넘어왔지만, 당시에는 단점이 부각되어 GDI엔진을 MPI분사로 바꾸는등 엔진을 거의 새로만들어 시스템을 삭제했다.


2015년 6월 현재는 GDI 엔진을 4기통 1.6리터엔진부터 8기통 5.0리터 엔진까지 폭넓게 적용 중.


타우엔진과 H엔진, G엔진을 발표하면서 휘발유와 디젤엔진 모두 자체기술력으로 일반승용차량과 상용차량 범위에서 사용되는 모든 배기량의 엔진을 설계/생산하게 되었다. 엔진을 직접 개발한지는 20년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엔진 성능은 상당히 뛰어나며 고연비를 내고 있어[15] 대체적으로 평가가 좋은 듯. 참고로 에쿠스와 제네시스에 탑재된 타우 V8 엔진은 미국 Ward 선정 세계 10대 엔진에 내리 선정 되기도 했다.Ward는 다음과 같이 평했다 "the Tau continues to dazzle with its combination of silky, smooth power delivery, aggressive tip-in, satisfying exhaust note and admirable fuel economy." V8 타우엔진 말고도 아반떼에 들어가는 M16 GDI엔진도 세계 10대 엔진에 선정된적이 있다.


또한 2.4 GDI 엔진의 YF 쏘나타는 미국 EPA 측정 기준으로 고속도로에서 35 MPG의 연료 효율을 보이고 있으며, 이는 하이브리드급에 육박하는 동급 최고의 연비이며, 출시 당시 중형세단 중에서는 혼다 어코드와 도요타 캠리등 이를 상대할 자가 없었다) 또한 미국인 드라이버 중에는 2.4엔진의 YF 쏘나타로 66 MPG 까지 달성했던 드라이버도 있었으니 #[17] 다만 위의 연비는 미국에서 뻥연비로 지적되어 소송걸렸었고, 깔끔히 털렸다...


또한 디젤엔진 기술에 있어 일본 업체 대비 경쟁력이 높지만, 디젤의 종주국 유럽 업체와 비교하면 연비를 비롯한 전체적인 성능면에서 다소 열세에 있으나 대중자동차 시장에선 큰 격차를 보이지 않는다.


Fast follower 측면에서 보면 2001년에 발매된 BMW의 밸브트로닉과 동일하게 스로틀 대신 흡기 밸브의 개방량을 통해 출력을 제어하는 CVVL 을 2012년에 판매하고, 벤츠나 포르쉐 카이엔과 동일한 하이브리드 시스템을 바로 다음해에 판매하고 있다. CVVL은 상당한 시일이 소요됐지만, 하이브리드는 발매 바로 다음해에 쏘나타 하이브리드가 나와 Follower 로 보긴 어렵다.


파워트레인에서 좋은 평가를 받으나 대중차시장 한정이고 6기통 8기통 가솔린엔진은 다운사이징 대응이 늦어지고 있다. 최신 엔진 기구 cvvl, gdi등 다양한 기술들을 엔진에 적용하고 있지만 세부적으로 들여다보면 이미 선진업체가 5~10년전에 적용한 한세대 이전 구조를 취하고 있으며 6기통이상 가솔린 엔진의 경우 10여년간 기존설계 엔진에서 보어업등 수정만 하다보니 독일업체의 엔진보다 연비가 많이 떨어지는 데서 비판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 사실 현대차가 대배기량 엔진을 개발한게 워낙 최근 일인 탓도 있다. 현대 에쿠스 2세대의 타우 4.6, 5.0 엔진이 나오기 이전엔 4L 이상 엔진은 버스, 트럭 엔진 뿐이었다. 1세대 에쿠스의 것은 미쓰비시 것에 가깝다.


변속기 대부분을 자체개발 하고 있다는 점은 선진 자동차 업계 후발주자로서 높이 평가받는 부분이다. 전 세계적으로 자체변속기를 개발하는 자동차 회사는 VW,GM,벤츠,토요타,닛산 등 외에는 거의 찾아보기 드물며 대부분 ZF나 자트코,아이신등 선진 변속기 전문 제조업체로 부터 변속기를 사와서 장착한다. 그나마도 토요타를 제외한 대부분의 회사는 일부차종에만 적용하고 생산규모가 떨어지는 후륜구동 변속기나 DCT는 서플라이어로부터 공급받는게 일반적이나 현대는 상용차 몇개 차종을 제외하면 소형 전륜, DCT, 대형 전륜,대형 후륜 등 전륜4속~후륜8속 모두 파워텍, 모비스, 다이모스, 위아 등 계열사로부터 자체공급받는다. 한편 한국GM은 미션을 국내에서 만들었다가 욕만 처먹고 망했다


크라이슬러에게 전륜6속 변속기를 공급하는등 경쟁사의 현대변속기 채용 사례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외국에서의 실패

2000년대를 기점으로 일본시장 진출을 전개했다. 클릭과 투싼, 쏘나타, 그랜저 네 모델을 투입[31]하였으나, 일본 제품과 성격이 겹치는 동시에 외산차 품질에 대한 신뢰가 극히 낮은 일본 소비자 성향을 파악하지 못했고 일본인들이 선호하는 차종이 아니어서 큰 인기를 끌지 못했다. 아줌마 부대를 타겟으로 배용준을 모델로 판촉에도 노력하였으나 결국 시장 철수를 하며 NF를 반값에 팔고 일본 시장을 떠났다. 승용부문 사업을 전부 철수한 후 현재는 대형버스인 유니버스 하나로만 일본에서 버티고 있다. 일본의 대형버스는 가격이 3억이 넘는 등 매우 고가이고 내구연한도 딱히 정해진 게 없어서(배기가스 규제에 걸릴 때 대개 대차) 대폐차 간격이 긴 편인데, 유니버스는 가격이 싸고 일본산 버스 대비 연비와 출력, 내구성에서 높은 평가를 받아 경쟁력이 있다고 한다. 관련기사 유니버스는 일본 내 수입 대형버스 시장에서 최고 판매량을 기록한 적이 있다.


2011년 현재 일본에 2리터급 터보 후륜구동 차량이 멸종하여 2리터 가솔린 터보 엔진을 장착한 후륜구동 스포츠 쿠페인 제네시스 쿠페가 일본에 일부 병행 수입되고 있는 상태. 토요타 86이 86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자체적인 개발이 아닌 계열사로 편입한 스바루의 BRZ를 바탕으로 빠르게 내놓은 것도 2L급 후륜구동 터보 쿠페 모델의 부재 속에 불어닥친 제네시스 쿠페의 병행수입 모델의 인기에 영향을 받았다는 의견도 있다.


2015년 헝가리와 노르웨이 법인을 철수하였다.

해당 국가 신차 시장규모가 작고 시장점유율사정이 좀처럼 나아 지지 않는 국가에 한해 현지국가 법인을 정리하고 근처유럽법인 소속으로 귀속시키는 경영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일이다. 사무실 법인이 철수 하는 것이지 시장에서 철수 한 것은 아니며 판매 채널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고는 하나 동유럽 일부국가와 북유럽 일부 국가에서 장기간 사정이 나아지지 않는 걸로 봐선 해당국가에서 단기간에 큰 성과를 내기는 어렵다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그 전에는 1989년 캐나다 퀘벡 주 브로몽에 현지공장을 세워 Y2를 만들었다가 부진으로 1993년에 가동을 중단하고 청산한 흑역사가 있다.


현대자동차에 입사하면?

취준생들이 꿈의 기업으로 손꼽는다. 현대자동차그룹 내에서도 기아자동차와 함께 완성차 분야 갑이기 때문에, 구직자들이 상당히 좋아한다. 연봉도 삼성그룹에 있는 어지간한 계열사들을 능가한다. 다만 대기업 중에서 군대문화로 대표되는 후진적/남성적 기업문화가 강하게 남아있는 회사기 때문에 단순히 연봉만 보고 갔다가 성격과 맞지 않아 퇴사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니 신중한 선택이 필요하다.


현대기아차그룹에서 중시하는 것은 기초질서 확보, 업무 시작 시간 준수 등이다. 조선비즈에 따르면, 점심시간 준수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11시 50분~12시 사이에 밥먹으러 가는 사람들은 카메라를 동원해 잡아낸다. 1층 커피숍은 7시 50분부터 9시까지는 영업을 하지 않는다. 아침 먹을 생각을 하지 말고 일을 하러 가라는 뜻이다.


기술직으로도 꿈의 기업이나 뽑는 인원이 엄청나게 적어 고졸 및 초대졸을 대상으로 하는 기술직 모집은 최근 약 8년여 만에 겨우 100여명 채용하였으며 생산공정 관리, 보전 등과 같이 플랜트를 담당하는 대졸 신입사원 또한 적은 인원을 채용하며 지역 출신을 좀 뽑는다. 공장 특성상 굉장히 시끄럽고 반복작업이며, 따라서 근속년수가 길어지면 근육통 / 요통 / 청력저하에 시달린다. 주간 연속 2교대 전에는 2조 2교대, 12시간 철야 근무를 하였으나 주간 연속 2교대 채택 이후로는 오전 06:45~오후 3:30인 1조(아침식사를 식당에서 판매한다) 와 오후 03:30 ~ 익일 새벽 00:30 (잔업포함)인 2조로 구분하여 운영하고 (이건 생산라인 기준이다 기술직은 근무시간이 다르긴 한데 공장이 12시 30분까지 계속 돌아가는 바람에 야근이 엄청나게 많다.) 각 조는 1시간 30분 근무, 10분 휴식의 반복 및 식사시간으로 구성되며 식사시간은 평일 40분 / 주말, 공휴일 특근의 경우 50분이었는데 주간연속 2교대가 되면서 40분으로 고정되었다. 주간연속 2교대의 도입으로 회식은 물건너가게 되었으며 1주일마다 주야근무가 바뀌는건 덤. 또한 공장 복불복도 있어서 바쁜 부서에 배치되면 공휴일과 토요일은 사라지게 된다당분간은 신입으로 뽑을 예정이 없겠지만 현대자동차 채용에서 자녀 가산점은 폐지된지 오래되었으며 출결과 관련경력을 많이 보므로 고딩때 출결이 좋지 않다면 깔끔하게 포기하길 바란다. -> 채용관련 팩트는 18년도까지는 사내하청에서 정규직으로 신규채용을 하기에 일반인은 채용을 안할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16년기준 향후 10년간 정년퇴직자가 13000여명이다.


울산에서는 유명한 아르바이트 장소이며 현대자동차 그룹의 위상이 올라가기 시작한 2000년대 초부터 인맥 없이는 들어갈 수 없는 꿈의 아르바이트로 불린다. IMF때 직원의 1/3이 해고되는 경험을 한 후 노동자들이 평생직장의 개념을 잃고 있을 때 최대한 뽑아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 안그래도 강성이였던 성향이 더욱 강해졌고 울산공장만 해도 직원이 3만명이 넘기 때문에 울산에서 작업복을 입은 사람을 보게 된다면 거의 현대자동차 근로자이며 (혹은 현대중공업) 타 공장까지 포함하면 4만명이 넘는 이 근로자의 힘과 IMF의 교훈을 바탕으로 현대자동차 노조는 국내 최대, 최강의 노조가 되었다. 기업문화는 현대계열사가 그렇듯 군대식이며 제조업 특성상 대부분이 남직원이다. (면접을 볼 때 여성에게 여기는 남자가 많은데 버틸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복지수준은 대기업 + 노조의 투쟁으로 높으며 근속년수에 따라 할인율이 달라지는 직원할인이라는 것이 존재하는데 직원할인이야말로 현대자동차를 다니는 이유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자사 자동차를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다. (물론 GM이나 르노삼성에도 동일한 제도가 있다) 여러 사람들이 할인가로 자동차를 사기 위해 현대자동차 직원에게 자동차 구매를 부탁하는 바람에 현재는 2년에 1번으로 직원할인을 제한하고 있다.


현대문화 + 공돌이를 생각하면 연구직의 근무환경은 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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