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전쟁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한민국을 침공하여 발발한 전쟁이다. 유엔군 중국인민지원군 등이 참전하여 제3차 세계 대전으로 비화될 뻔 하였으나, 1953년 7월 27일에 체결된 한국휴전협정에 따라 일단락되었다. 휴전 이후로도 현재까지 양측의 유무형적 갈등은 지속되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공산·반공 양강 진영으로 대립하게 된 세계의 냉전적 갈등이 열전으로 폭발한 대표적 사례로, 냉전(冷戰)인 동시에 실전(實戰)이었으며, 국부전(局部戰)인 동시에 전면전(全面戰)이라는 복잡한 성격을 가졌다. 이는 국제연합군과 의료진을 비롯해 중화인민공화국 소련까지 관여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최대의 국제전이다.

미리 중화인민공화국 마오쩌둥 소비에트 연방 스탈린의 협조와 지지를 얻은 김일성 남로당의 대한민국 내 활동과 우방인 소련의 지지에 고무되어 1950년 6월 25일 38도선과 동해안 연선(沿線) 등 11개소에서 경계를 넘어 38선 이남으로 진격하였다. 이는 때마침 냉전으로 긴장되어 있는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친 바, 파문은 참으로 전에 없던 것이었다. 조선인민군의 대공세에 유엔 미국을 주축으로 바로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 제82호를 의결하고 이 전쟁에서 한국을 원조하기로 결정하고 파병하였다. 하여 7월 7일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유엔군이 조직되었다. 인민군은 무방비 상태였던 중부지방과 호남지방을 삽시간에 휩쓸었다. 연합군은 낙동강방어선에서 배수진의 결전을 전개하였다.

연합군은 더글러스 맥아더 인천 상륙 작전을 시작으로 대대적인 반격을 개시하여 평양에 이어 압록강 부근까지 이르렀으나, 중국인민지원군이 개입하여 전세가 다시 뒤집히게 되었으며, 그 와중에 남로당의 남한 내부 전복을 위한 활동과 이를 제압하려는 대한민국 정부의 충돌로 거창 양민학살 사건, 국민 방위군 사건 등의 사건이 일어났다. 이후 3년 간 지속된 전투로 수많은 군인 및 민간인이 사상하였고, 대부분의 산업 시설들이 파괴되는 등 양측 모두가 큰 피해를 입었으며, 이념적인 이유로 민간인들의 학살이 자행되고 지주들의 처벌과 그 보복이 반복되면서 남·북 간의 적대적인 골이 깊어지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1953년 7월 27일에 체결된 한국휴전협정으로 인하여 설정된 한반도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휴전하였다. 현재까지 서류상으로 휴전 상태로, 협정의 체결 이후에도 쌍방 간에 크고 작은 군사적 분쟁이 발생하고 있다.

1945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5년 전, 일본으로부터 해방을 맞은 한반도는 해방 직후 타의에 의해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다. 미국 소련의 군정이 끝나고 한반도에는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북한은 소련과 중화인민공화국을 설득하여 한반도를 적화 통일하려는 계획을 수립하고 준비를 해 나갔다. 소련은 소련군이 한반도 38선 이북에 진주한 이래, 아시아 공산화를 목적으로 북한에 소련을 대리할 수 있는 공산정권을 세우고, 한반도의 통일을 방해하면서 침략의 기회를 엿보아 왔다.중국 공산당은 1949년에 중화민국을 대륙에서 몰아내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하였다. 반면에, 미국은 주한미군이 철수를 완료(1949년 6월) 하고, 미국의 극동방위선이 타이완의 동쪽 즉, 일본 오키나와와 필리핀을 연결하는 선이라고 선언(애치슨 선언, 1950년 1월) 을 하는 등 대한민국에 대한 군사원조를 최소화해 나갔다. 이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지 얼마되지 않은 시기였기에, 미국은 소련 공산권과의 직접적인 군사 충돌이 제3차 세계대전을 야기할 수도 있다는 국제적인 정세를 고려하였으며, 소련 역시 그러한 이유로 북한에 대한 공개적인 지원을 중단하였다. 그러나 국내적으로는 정치 혼란 속에 이승만은 북진통일론을 주장하였고, 38도선 주변에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분쟁도 간헐적으로 벌어졌다.

북한군 상황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에서 한국전쟁은 김일성 박헌영의 주도로 이루어졌으며, 김책, 김무정도 적극적으로 찬성하였다. 리승엽 등 남로당 계열의 인사들도 찬성하였고, 군사지도자들인 강건, 김웅, 김광협, 방호산, 이권무, 김창덕, 유경수 등은 남쪽과의 일전을 고대하였고 승리를 확신하였다. 이에 비해 최용건은 적극적으로 반대하였고, 김두봉, 홍명희, 장시우 등은 반대 또는 소극적 찬성을 하였다. 김일성은 수 차례 소련의 지배자인 스탈린 중화인민공화국의 통치자인 마오쩌둥을 만나 무려 48회나 남침 허락 내지는 전쟁 지원을 요청하였다. 공개된 구 소련의 문서에 의하면 애초에 스탈린은 북한군이 절대적 우위를 확보하지 못하는 한 공격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인민군의 실력이 미국과 대한민국을 상대로 아직은 단독으로 전쟁을 치를 만한 실력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미국과의 직접적 마찰을 두려워하여 무력 행사를 기피하였다. 그럼에도 김일성은 수 차례 스탈린을 설득하였고, 일부 역사 연구자들이 옛 소련의 문서들을 근거로 주장하는 이론에 의하면, 스탈린은 미국을 시험하고 미국의 관심을 유럽에서 아시아로 돌리기 위해 중화인민공화국이 전쟁에 대한 원조를 북한에 하는 조건으로 김일성의 남침을 승낙하게 된다. 이리하여 스탈린은 북한에 강력한 군사적 원조로서, 소련의 무기들을 대량으로 북한으로 제공하였다.

김일성 조선로동당의 일당독재를 기반으로 반대파(민족주의자, 종교인 특히 북한 수립 이전 융성하던 개신교, 지주, 마름, 기업가, 기술자 등을 포함한 상당수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에 대한 철저한 숙청을 통하여 자국 내 정치적 입지를 강하게 다지고 있었다. 또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최고인민회의 간부회의를 통하여 통일을 위하여 점령군의 즉각적인 철수를 요구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둔 소련군은 1948년 12월 시베리아로 철수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소련 정부는 모스크바에서 비밀리에 군수뇌회담을 개최하여 철군이후의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하고 '특별군사사절단'을 통해서 집행하기로 하였다. 이 회의에는 김일성 등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고위 군부 대표도 참석하였다. 모스크바 계획이라고 불리는 전쟁준비 계획은 만주에 있던 조선인 의용군 부대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귀국시켜 5개 사단을 갖게 하고 이외에 8개의 전방사단과 우수한 장비를 보유한 8개의 예비사단, 그리고 500대의 탱크를 보유하는 2개의 기갑사단을 갖게 하는 것이었다.

1949년 2월 스탈린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 후 처음으로 김일성 박헌영을 모스크바로 불러 소련군의 철수로 인한 군사력 공백과 한반도 정세를 논의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뇌부는 방문 기간인 3월 17일에 유럽에서 일반적으로 체결하던 '우호 방위조약'이 아닌 '조·소 경제·문화협정'을 체결하였다. 이는 앞선 미군 철수 발표에 대한 소련의 대응으로 앞으로 있을 한국전쟁의 책임을 모면하기 위한 계획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러한 이유로 한국 전쟁 당시 소련은 공개적으로 북한을 돕지 않는다고 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을 통해 전쟁 물자 공급을 지속한다.

1949년 8월 12일, 김일성 박헌영은 대한민국이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의 평화적 통일안을 거부하고 있으므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대남공격을 준비할 수밖에 없으며 그렇게 되면 대한민국에서는 이승만 정권에 대한 대규모 민중봉기가 분명히 뒤따를 것이라고 언급했다. 김일성과 박헌영은 만약 대남공격을 하지 않는다면 인민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들은, 이승만 대통령이 많은 친북 ‘민족인사’들을 투옥시켰지만 북한은 아직도 대한민국에서의 봉기를 조직할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는 1949년 남조선로동당 등의 대한민국 내부의 공산주의자들이 반공정권이었던 이승만 정권의 공산주의 탄압에 의해 대대적으로 검거되었다는 것을 대한민국에서 온 공산주의자들의 허위보고로 생각한 까닭이었다.1949년 8월 27일, 북한 주재 소련 대사 스티코프는 8월 12~14일의 김일성과의 면담내용을 스탈린에게 보고하고 다음과 같은 이유로 북한의 대남공격이 불가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1. 현재 한반도에는 두 나라가 존재하며 그중 대한민국은 미국 및 기타 국가에 의해 승인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격시 미국은 대한민국을 무기탄약 공급뿐 아니라 일본군의 파견을 통해 지원할 가능성이 있음. 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남공격은 미국이 대소련 모함∙선전에 이용할 수 있음. 3. 정치적 측면에서 북의 공격은 남북한 인민 대다수의 지지를 얻을 수 있으나 군사적 측면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아직 대한민국에 대해 압도적 군사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음. 4. 대한민국은 이미 상당수 강한 군대와 경찰력을 창설하였음에도 소련의 지원하에 있는 조선인민군에 비하여 약세에 있었다.(스티코프는 김일성이 제의한 강원도 지역의 '해방구역' 창설계획에는 찬성하고 또한 인민군에 의한 옹진점령계획도 군사적으로 타당하다고 보고했으나 남한의 반격시 이 작전이 지구전이 돼버릴 수 있다고 언급)  스탈린에게 제출한 9월 15일자 보고서에서, 스티코프는 “김일성 박헌영은 현 정세하에서는 평화통일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북이 남한 정부를 무력공격하면 남북양쪽의 인민들이 이를 지지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리고 지금 무력통일을 안하면 통일이 연기될 뿐이고 그동안 남한 정권은 좌익세력을 탄압하면서 북진할 수 있는 강력한 군대를 만들어 통일은 물거품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김일성은 남진을 시작할 때 소련과 중공이 원조해줄 것을 기대하는 듯하다.”고 썼다. 그의 견해는 남북의 내전은 북에 유리하나 북한군이 남한 공격을 개시하면 소련이 국제적 비난을 받게 되며 미국이 끼어들 것은 물론 남한을 적극 지원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또, 물론 북한이 남한에서 빨치산 활동을 강화하는 것은 좋다. 옹진작전은 유리한 상황하에서는 실시 가능하고, 이를 위해 38선 지역에서 남쪽의 도발을 이용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소련 공산당 정치국 중앙위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남침이 시기적으로 적절하지 못하다는 지시문을 스티코프를 경유하여, 김일성에게 전달하였다.(1949년 9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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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버워치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가 개발하고 배급하는 다중 사용자 1인칭 슈팅 게임이다. 2016년 5월 24일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플레이스테이션 4, 엑스박스 원으로 출시하였고, Wii U 출시할 예정이다.

오버워치에서 플레이어는 각 여섯 명으로 구성된 두 팀 중 하나에 속하며, 각 플레이어는 특별한 능력과 기술을 가진 다수의 특정한 영웅 캐릭터 중 한 명을 고른다. 이 영웅들은 공격, 수비, 돌격, 지원의 네 역할로 나뉜다. 플레이어들은 함께 협동하여 전장의 거점을 차지하기 위해 싸우거나, 전장을 가로지르는 화물을 제한 시간 안에 목표 지점까지 호위한다. 플레이어들은 경기를 계속 플레이하면 캐릭터 스킨과 승리 포즈와 같이 게임플레이에 영향을 주지 않는 외관 보상을 얻는다. 블리자드가 출시 한 달 후 경쟁전 플레이를 추가했지만, 이 게임은 근본적으로 캐주얼 플레이를 지향한다. 블리자드는 모든 오버워치 업데이트는 무료로 진행될 것이며, 플레이어가 부가 요금을 내는 경우는 오직 추가적인 외관 보상을 구입할 때 뿐이라고 발표했다.

오버워치는 블리자드의 네 번째 프랜차이즈로, 2014년 다중 접속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 《타이탄》의 개발이 취소되면서 만들어졌다. 타이탄 팀의 일부는 팀 포트리스와 같은 팀 기반의 1인칭 슈팅과 멀티플레이어 온라인 배틀 아레나의 높아지는 인기, 팀워크를 강조하는 영웅 기반의 슈터 창작을 기반으로 오버워치의 컨셉을 구상하였다. 오버워치의 일부 요소들은 취소된 타이탄 프로젝트의 설정과 구상들을 빌려왔다. 세계적 위기 이후 가까운 미래의 낙관적인 지구 설정의 이야기를 정립시킨 이후, 개발자들은 이 설정의 일부로 폭넓은 성별과 인종을 가진 다양한 영웅을 제작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캐릭터 간의 밸런스를 조정하는 것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새로운 플레이어가 계속해서 재미를 느낄 수 있도록 만든 한편, 숙련된 플레이어는 비슷한 실력을 가진 플레이어에게 힘겨운 도전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오버워치는 2014년 블리즈컨에서 완전히 플레이 가능한 상태로 공개되었으며, 2015년 후반부터 2016년 초반까지 클로즈 베타를 진행했다. 2016년 5월 오픈 베타에는 970만 명 이상의 플레이어가 참여하였다. 게임의 출시는 줄거리와 각 캐릭터를 소개하는 단편 애니메이션 영상을 통해 홍보하였다. 공식 출시 이후, 오버워치는 비평가들로부터 전반적인 호평을 받았으며, 특히 게임의 접근성과 재미있는 게임플레이에서 좋은 점수를 받았다.


오버워치는 각각 여섯 명의 플레이어로 구성된 두 팀 간의 분대 단위 전투를 기본으로 한다. 플레이어는 저마다의 독특한 능력과 역할을 가진 영웅 캐릭터 중 한 명을 선택한다. 캐릭터의 역할은 총 네 가지다. 공격 영웅들은 빠른 속도와 공격을 가졌으나 방어가 낮으며, 수비 영웅들은 조임목에서 적의 돌격을 막고, 돌격 영웅은 적의 공격을 견뎌내는 방어구와 생명력을 갖추고 팀의 공격을 주도하며, 지원 영웅은 아군과 적군 각각에 대한 강화와 약화(치료나 속도 변화 등)를 부여한다. 경기에 들어가기 전 영웅 선택 화면에서, 팀의 플레이어는 수비 영웅이 부족할 때처럼 팀의 밸런스가 맞지 않을 경우 조언을 받으며, 플레이어는 경기 전에 다른 영웅으로 변경하여 밸런스를 맞춘 뒤 팀을 시작할 수 있다. 경기 도중에 플레이어는 캐릭터가 죽거나 본진으로 돌아가면 다른 영웅으로 변경할 수 있으며, 게임의 전체적인 설계에서 이를 권장하고 있다.

각 영웅은 주요한 공격이나 기술을 가지고 있고,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는 적어도 두 가지의 추가 기술을 가지고 있으며, 대다수는 재사용 대기시간이 있어 일정 시간이 지나야 다시 사용할 수 있다. 더 나아가, 각 플레이어는 천천히 쌓이는 게이지를 모두 채우면 캐릭터의 궁극기를 한 번 사용할 수 있다. 이 계량기는 시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차오르나 적을 공격하거나 팀에게 이로운 활동을 수행할 경우 더 빠르게 채울 수 있다. 한 번 준비가 되면, 플레이어는 이 기술을 어느 때든지 사용할 수 있다. 기술은 몇 초동안 지속되는 방식(공격력이나 방어력 상승 등)이거나 강력한 단일 행동(가까이 있는 팀원을 부활)이며, 사용 후에는 게이지가 다시 찰 때까지 기다려야만 한다. 상대 플레이어는 궁극기를 사용하는 캐릭터의 대사를 통해 궁극기 사용을 경고 받게 된다. 예를 들어, 총잡이 맥크리는 플레이어가 시야의 모든 적을 대상으로 치명적인 대미지를 입히는 궁극기를 사용하면서 "석양이 진다" 라는 대사를 하게 되는데 이 대사를 들으면서 궁극기를 무력화하거나 응수할 수 있는 잠깐의 기회를 가지게 된다.

두 번째 계량기는 플레이어가 처치나 처치를 도울 때, 방어나 치료를 할 때, 임무에 기여할 때 득점하는 포인트이다. 일정량에 도달하면, 플레이어 캐릭터의 아이콘이 불타는 상태가 되며, 캐릭터가 위협적인 상태임을 보여주나, 그밖에 게임플레이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

각 경기가 끝나면, 게임 서버가 짧은 시간에 많은 적을 죽이거나 효과적으로 팀을 치료했을 때와 같이 고득점의 플레이를 한 특정 유저의 하이라이트 장면을 결정하고, 이것을 "최고의 플레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플레이어가 짧은 시간동안 영상으로 감상한다. 각 팀에서 가장 뛰어난 활약을 펼친 네 명의 플레이어가 표시되고, 플레이어는 그 중 한 명에게 투표한 뒤 경기를 평가한다. 이전 게임에서 "최고의 플레이"를 달성하거나 가장 많은 투표를 받으면 다음 게임을 위한 경험치를 받게 된다.

플레이어는 경기에서 승리했는가 패배했는가, 캐릭터의 주요 능력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사용했는가, 많은 범주의 개인 달성 기록 등 몇가지 요소를 바탕으로 경험 레벨을 쌓을 수 있는 경험치를 얻는다. 경험치는 게임의 빠른 대전 모드와 경쟁전 모드, 아케이드 모드에서 플레이했을 때만 얻을 수 있으며, 사용자 지정 게임에서는 불가능하다. 경험 레벨을 쌓으면, 플레이어는 특정 영웅 전용의 승리 포즈, 페인트 스프레이, 스킨, 음성 대사와 같은 많은 외관용 수집품이 들어있는 수집품 상자를 얻을 수 있다. 이 상자에서 게임 화폐인 크레딧도 얻을 수 있으며, 크레딧을 사용해 특정한 외관용 수집품을 직접 구입할 수 있다. 중복되는 아이템이 보상으로 나오면 크레딧을 함께 얻는다. 플레이어는 실제 세계의 화폐를 사용해 직접 수집품 상자를 구입할 수도 있다.

게임의 전장은 실제 세계의 장소에서 영감을 받았는데, 처음에 공개된 세 전장("왕의 길", "하나무라", "아누비스 신전")은 각각 런던, 일본, 고대 이집트 유적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게임모드

오버워치의 게임 방법으로는 컴퓨터가 조종하는 적들과 싸우는 튜토리얼과 훈련장, 다른 플레이어와 함께 인공지능과 싸우는 인공지능 상대, 플레이어끼리 전투가 펼쳐지는 빠른 대전, 주간 난투, 사용자 지정 게임, 경쟁전이 있다.

빠른 대전은 플레이어가 혼자 또는 같은 그룹에 있는 친구와 함께 무작위로 선택된 다른 상대와 경기를 벌인다. 이 모드에서는 게임 서버가 레벨을 바탕으로 팀과 상대를 찾으며, 상대할 플레이어를 찾는 시간이 길어지면 검색 범위가 넓어지게 된다그리고 빠른대전 또한 영웅 선택이 중복이 돼지 않는다 블리자드는 이 대전 상대 찾기 시스템이 비슷한 실력을 가진 사람을 확실하게 찾아 경기할 수 있도록 조정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를 위해, 블리자드는 2016년 6월 플레이어가 특정한 상대를 피할 수 있는 설정을 제거했는데, 이 설정은 훼방을 놓는 사람을 피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지만, 숙련된 플레이어가 기피 목록에 올라가 그들이 자신과 맞는 경기를 찾기 어렵거나 실력이 낮은 플레이어와 경기하는 문제점이 있었다.

주간 난투는 하스스톤: 워크래프트의 영웅들의 선술집 난투에서 영감을 받은 모드이다. 이 경기는 플레이어가 특정한 영웅, 또는 특정한 역할의 영웅만 고를 수 있거나, 부활할 때 무작위로 영웅이 바뀌는 등 독특한 규칙을 특징으로 가지며, 모드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난투 규칙이 주 단위로 바뀐다.

기간 한정 행사의 일부가 되기도 하는데, 2016년 하계 올림픽동안에는 3대3 축구 형태의 경기가 추가되었다. 2106 크리스마스 이벤트때에는 메이의 신나는 눈사움 대작전이 추가되었고 또한 2017 닭의 해 신년 이벤트 동안에는 아케이드 모드에 깃발 뺏기 모드가 추가되었다.

사용자 지정 게임은 플레이어가 경기 시간, 전장, 영웅 선택 제한, 재사용 대기시간 조정 등 다양한 설정을 조정하여 공개 또는 비공개로 경기를 진행할 수 있다. 플레이어는 빠른 대전, 경쟁전, 주간 난투와 다르게 사용자 지정 게임을 통해서는 어떠한 경험치도 얻을 수 없다.

아케이드 모드는 1대1, 3대3, 6대6(영웅 중복 가능), 주간난투 로 이루어져있는 모드 모음집이다. 주간난투에서는 그동안의 난투들중 랜덤으로 플레이할 수 있다.(이벤트 기간중 한정 난투 제외)


스토리

오버워치의 배경 이야기는 단편 애니메이션과 블리자드가 게임 홍보를 위해 배포한 다른 미디어를 통해 설명되고 있다.

오버워치는 지금으로부터 60년 후, 30년 전의 '옴닉 사태'가 해결된 후인 가상의 미래 지구를 배경으로 한다. 옴닉 사태 이전에 인류는 과학 기술 발전과 번영으로 황금기를 맞이했다. 인간은 인공지능을 가진 로봇 '옴닉'을 개발하고, 그들을 전세계에 자동화된 '옴니움'으로 생산하며, 이들을 이용해 경제적 평등을 이룩했다. 옴닉 사태는 옴니움이 인류를 상대로 일련의 살상 로봇을 생산하면서 시작되었다. 국제 연합은 옴닉의 위협에 대항하고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국제 특수기동 부대인 '오버워치'를 결성하였다.

두 명의 노련한 유전자 강화 군인인 가브리엘 레예스와 잭 모리슨이 오버워치를 책임지게 되었다. 오버워치는 로봇들의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하고 재능이 있는 많은 사람들을 중요한 위치로 끌어올렸지만, 레예스와 모리슨 간의 불화가 발생하게 되고, 모리슨은 사실상 오버워치의 수장이 된 반면 레예스는 오버워치가 공개적으로 수행할 수 없을 만큼 더러운 비밀 작전을 수행하는 블랙워치를 떠맡게 되었다. 오버워치는 '오버워치 세대'라고 부르는 몇 십년간 세계를 종횡무진하며 평화를 유지하였으나, 모리슨과 레예스의 불화는 더욱 깊어만 갔다. 범죄와 실패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오버워치로 향하고, 오버워치에 대한 대중의 강력한 항의와 요원들 간의 내전이 발생함에 따라, 유엔은 즉시 상황에 대한 조사에 착수하였다. 이때, 오버워치의 본부가 폭발로 파괴되고, 이로 인해 모리슨과 레예스가 사망한 것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유엔은 오버워치를 해체하고 그들의 활동을 금하는 페트라스 법을 통과시킨다.

오버워치의 본격적인 배경은 페트라스 법이 시행된 몇 년 후이다. 오버워치가 사라지자, 기업들이 역할을 이어받기 시작했다. 싸움과 테러가 세계 곳곳에서 발생했고, 러시아에서 제2의 옴닉 사태의 신호가 나타났다. 그리고, 런던 '왕의 길'에서 옴닉 수도사가 범죄 조직 탈론의 암살자 위도우메이커에게 암살당하고, 이 사태로 인해 윈스턴은 오버워치 재결성을 결정한다. 오버워치의 옛 요원들은 페트라스 법에도 불구하고 오버워치로 다시 모이기로 결심하여, 오랜 친구들을 소집하고 새로운 동맹을 모아 싸움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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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 또는 말련 동남아시아에 있는 연방제 입헌 군주국이다. 말레이시아는 13개의 주와 3개의 연방 직할구로 구성되어 있고, 남중국해로 나뉜 말레이 반도 지역과 보르네오 섬 지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타이, 인도네시아, 브루나이와 국경을 맞대고 있고, 해상국경은 싱가포르 베트남, 필리핀과 맞대고 있다. 수도는 쿠알라룸푸르이지만, 연방정부는 푸트라자야에 있다.

말레이시아의 역사는 18세기부터 대영 제국의 식민지가 된 말레이 왕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처음 영국의 식민지가 된 곳은 해협식민지로 불리었고, 다른 곳들은 보호령이 되었다. 1946년 말레이 반도의 주들이 연합하여 말라야 연합을 세웠고, 1948년 연합을 재편성하여 말라야 연방이 설립되었다. 1957년 8월 31일 영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을 하게 되었으며, 1963년 9월 16일 말라야 연방 사바, 사라왁, 싱가포르와 연합하면서 Malaya란 이름에 si를 추가해 Malaysia가 되었다. 그러나 2년도 채 지나지 않은 1965년, 싱가포르는 정부와의 마찰로 연방에서 탈퇴하게 되었다. 말레이시아는 독립 이후 아시아에서 최고의 경제적인 기록을 가지고 있는데, 거의 50년동안의 GDP 성장률이 평균 6.5%라는 것이다. 말레이시아의 경제는 전통적으로 천연 자원에 거의 의존하고 있었으나, 최근에 과학, 관광, 무역, 의료관광 등의 산업이 성장하고 있다.

말레이시아는 입헌군주국이며, 국가 원수는 군주로, 9개 주가 5년에 한 번씩(단, 궐위가 있을 경우에는 예외) 술탄이 임명한다. 군주의 칭호는 양디-퍼르투안 아공이며, 지금 군주는 무하마드 5세이다. 정부의 장은 수상이다. 정부체제는 웨스트민스터 체제에 가깝고, 법체계는 영국의 법에 기초한다. 말레이시아는 민족과 문화가 다양하고 그 다양성이 정치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국교 이슬람교이지만, 헌법상 종교의 자유는 인정되고 있다.

말레이시아에는 유라시아의 최남단 지역인 탄중피아이가 있고 적도 근처에 위치하고 있어 열대 기후의 국가이다. 다양한 동식물군이 있어 생물 다양성이 큰 국가이다. ASEAN, 이슬람 회의 기구의 창립멤버이며, APEC, 영국연방, 비동맹 운동의 회원국이다.

2013년을 기점으로 말레이시아의 구매력 평가는 1인당 $17,674로 평가되었다.


식민지 이전

약 4만년 전 지금의 말레이시아 땅에 인류의 거주지들이 형성된 기록이 있다. 이는 말레이시아가 고로 신생국가가 아님을 증명한다. 현재 서말레이시아에 해당되는 말레이 반도의 첫 정착민은 검은 피부를 가진 네그리토로 추정된다. 기원후 시대 초기 인도양과 남중국해 사이의 말레이 반도는 동서양 무역상 및 여행객들의 장소였는데, 2~3세기경 그들은 이곳에 무역항과 해안 마을을 건설했다. 그 결과 인도 및 중국 문화가 현지 문화에 강한 영향을 끼쳤고, 사람들은 이들로부터 유입된 힌두교와 불교를 믿기 시작했다. 4~5세기경 산스크리트어로 된 것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2세기 무렵 말레이 반도 북부의 랑카수카 왕국이 번창하기 시작했으며 15세기까지 존속했다. 7~13세기 말레이 반도 남부 해안 지역은 스리비자야 제국의 일부였다. 스리비자야 제국의 멸망 이후 등장한 마자파힛 제국은 말레이 반도와 말레이 제도 일대에 큰 영향력을 끼쳤다. 14세기 무렵 아랍 상인들이 이슬람교를 소개하면서 전국적으로 퍼지기 시작했고, 이것이 말레이시아가 이슬람 국가가 되는 시초가 되었다. 15세기 초 구 스리비자야 제국의 왕자였던 파라메스와라가 지금의 말라카 지역에 말레이 반도 최초의 독립 국가로 간주되는 말라카 술탄국을 건설했다. 지리적, 경제적, 군사적으로 말라카는 당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으며, 국제적인 무역항으로써 매우 크게 번영했다.

하지만 이 번영의 말라카도 1511년 포르투갈의 침공과 함께 몰락했다. 포르투갈이 침공한 궁극적인 목표는 경제권을 확장하는 한편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말라카 주민들은 포르투갈의 통치에 강력하게 저항했으며, 1641년 이 지역을 노린 네덜란드의 침공으로 포르투갈의 지배도 끝이 났다. 이어 네덜란드의 지배가 시작되었으나, 1786년 크다의 술탄이 피낭을 영국령 동인도 회사에 양도하면서 대영제국의 지배가 시작되었다. 영국은 1819년 싱가포르를 획득했고, 이후 기존에 말라야를 지배하던 네덜란드와 마찰이 발생하자 1824년 영국-네덜란드 협정을 맺어 세력범위를 확정했다. 이 협정에 따라 영국은 싱가포르를 중심으로 해서 북부는 영국이, 남부는 네덜란드가 지배하도록 했는데 말라카는 영국이 가져가는 대신 자신들이 지배하던 벤쿨렌(방카훌루)을 네덜란드에 양도했다. 이후 영국의 세력범위는 영국령 말라야라 하여 오늘날의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가 되었고 네덜란드의 세력범위는 네덜란드령 인도라 하여 오늘날의 인도네시아가 되었다.

1826년 영국은 피낭, 말라카, 싱가포르, 라부안을 직접적으로 지배하기 시작했는데 이 지역에 직할식민지의 일종인 해협 식민지를 건설했다. 20세기 무렵 파항, 슬랑오르, 페락, 느그리슴빌란으로 구성된 연합 말레이 주에 영국이 눌러앉기 시작했는데 각 주의 말레이 지도자들이 자신들과의 협정을 거부할 것이 확실해지자 그들을 조언해 영국 지도부를 임명하게 했다. 나머지 5개 주는 비연합 말레이 주라 하여 영국이 직접 통치하지 않았는데 20세기 영국인 조언자가 있게끔 전환되었다. 19세기까지 말레이 반도와 보르네오의 발전은 대개 큰 관련이 없었다. 영국은 지배 기간 동안 중국과 인도에서 수입된 노동자들의 이민을 장려했다.

현재 사바 주에 해당되는 지역은 1877년부터 1878년 사이 브루나이와 술루의 술탄이 통치권을 영국에 양도하면서 영국령 북보르네오가 되었다. 지금의 사라왁 주에 해당되는 지역은 영국 모험가인 제임스 브룩(James Brooke)이 1842년 브루나이 술탄으로부터 양도받은 뒤 사라왁 왕국이 되었으며, 1946년 직할식민지로 개편될 때까지 백인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이 말라야, 북보르네오, 사라왁, 싱가포르를 점령했으며, 1945년 항복할 때까지 3년간 통치했다. 비록 3년으로 말레이시아를 지배한 그 어떠한 나라보다도 짧게 통치했지만, 더 잔인했으며, 특히 중국에 대한 반감을 갖고 있던 일본은 이 지역의 중국인들까지 무자비하게 살해했다. 중국인뿐 아니라 청년들은 태국을 거쳐 미얀마까지 이어지는 철로를 건설하는 데 동원되었는데, 많은 이들이 막노동에 영양 실조 등으로 희생되어 이 철로는 '죽음의 철로'라고 불리게 되었다. 또한 교육을 제대로 실시하지 않았으며 식량이 제대로 보급되지 않음으로써 경제난에 시달렸다. 이 무렵 공산주의자들의 산악전이 시작되었고, 한편으로는 인종적 긴장 상태 및 민족주의가 성장하였다. 민중의 항의가 이어졌으며, 1945년 일본의 항복으로 독립을 쟁취했으나 영국이 재점령했다. 이에 민족주의가 더 크게 성장하기 시작했고, 독립을 위한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소말리아에 대하여

예로부터 소말리아는 고대 세계 상업 중심지였다. 고대 이집트, 페니키아, 미케네에서 유향, 몰약, 향신료는 귀중품으로 여겨졌는데, 소말리아의 선원과 상인들은 교역을 통하여 이를 공급하였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고대 소말리아 땅에 고대 푼트 왕국이 있었다고 한다. 고대 푼트인들은 파라오 사후레 하트셉수트 시대에 이집트와 밀접한 관련을 맺었다. 소말리아에 있는 피라미드 건물, 신전, 돌로 지은 가옥도 이 시대의 것이라고 한다. 고전기에 사바 왕국과 경쟁하던 오포네(Opone), 모실론(Mosyllon), 말라오(Malao)같은 고대 도시국가와 파르티아, 악숨은 부유한 인도-그리스-로마간의 교역으로 소말리아에서 번성하였다.

소말리아에서 홍해 너머 아랍에서 이슬람이 발흥하면서 아라비아 반도에 살던 소말리아 상인, 선원, 거류민들이 점차 교역 상대인 아랍인 무슬림을 통하여 새 종교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이슬람이 발생하고 수백 년 동안 이슬람 세계에서 소말리아로 무슬림이 이주하고, 이후 소말리아의 무슬림 학자가 소말리아 사람을 평화적으로 개종시키면서, 고대 도시국가는 이슬람화되어 베르베리(Berberi) 문명의 일부를 이룬 모가디슈 ,베르베라, 제일라, 바라와, 메르카가 되었다. 모가디슈 시는 "이슬람의 도시"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수백 년간 동아프리카의 황금 무역을 장악하였다. 중세 시대에 여러 강력한 소말리아 제국들은 지역 교역을 지배하였는데, 수로 공학 요새 건축이 뛰어났던 아주란 왕국(Ajuuraan State)  아흐메드 구레이(Ahmed Gurey) 장군이 에티오피아 제국을 정복하면서 아프리카에서 처음으로 대포를 쓴 바 있는 압달 술탄국, 소말리아인 술탄 아흐메드 유수프에 공물을 바쳐 라무(Lamu) 시 북쪽 오마니 제국을 군사적으로 지배한 겔레디 술탄국 등이 바로 그러하였다. 19세기 말 베를린 회의가 끝나자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은 아프리카의 뿔로 항해하여 군대를 이끌고 왔다. 소말리아에 제국주의의 기운이 엄습하면서 데르비시 지도자 무함마드 압둘라 하산은 위기를 느끼고 아프리카의 뿔 지역의 소말리아 병사를 모아 기나긴 반식민 투쟁을 전개하였다.

소말리아는 공식적으로 식민지화된 적이 없다. 데르비시 국가는 대영 제국을 네 번이나 격퇴하여 해안 지역에서 철수하게 하였다. 데르비시 국가는 중동 유럽에서 명성을 얻어 오스만 제국 독일 제국의 동맹이 되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중 아프리카 대륙에서 유일하게 독립한 무슬림 국가로 남았다. 영국이 만(灣)을 점령한 지 25년 만에 1920년 영국이 아프리카에서 최초로 비행기를 이용하여 데르비시의 수도 탈레흐(Taleh) 폭격하여 결국 데르비쉬를 패퇴시켰다. 이 폭격으로 과거 데르비시 영토는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다. 이탈리아도 영국처럼 소말리아 술탄과 군대의 저항에 부딪혔는데 1927년 말 파쇼 정권이 집권하고 나서야 오늘날 소말리아 땅의 일부 지역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의 점령은 1941년까지 지속되었으며, 이후 영국의 군정하로 넘어갔다. 남부 소말리아가 신탁 통치를 받을 때 북부 소말리아 보호령 상태였다. 1960년 두 지역이 통합하여 소말리아 민주 공화국이 탄생하였다.

1960년 영국 이탈리아로부터 독립하였다. 하지만 1991년 내전 때문에 혼란이 발생하였고, 아프리카에서 가장 못 사는 나라가 되었으며 유엔 평화 유지군이 파견되기도 하였다. 1993년 대한민국이 평화유지군 파병으로 소말리아를 지원해 준 적도 있었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북부는 소말릴란드가 독립을 원하고 있으나, 국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또한 현재 유일한 합법 정권인 과도 정부와 반군 세력의 대립이 계속되고 있다.

2012년 8월 20일 과도 정부 체제를 끝내고 헌법과 의회제도를 도입하여 소말리아 연방 공화국으로 출범하였고, 9월 10일 하산 셰흐 마하무드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어 9월 16일 공식 취임하였다.

김정일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이다. 본관은 전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의 위원장이었으며 김일성과 김정숙 사이의 첫째 아들이다.


2011년 12월 17일에 급성 심근경색으로 사망한 그는 어린 시절 한국 전쟁 당시 평양을 떠나 간도 지역으로 은신하였으나 중국인민지원군의 참전으로 귀환했다. 김일성종합대학 정치경제학과를 졸업하였으며 1961년 7월 22일 조선로동당에 입당한 이후부터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과 비서 등에 임명되었다. 1970년대부터 김일성의 후계자로 주목되었으며 1980년 제6차 당 대회를 통해서 공식적인 후계자가 되었다. 1994년 김일성 국가 주석의 사망 이후에 권력을 세습해 공화국의 실권을 잡아 통치자가 되었고 경제적 상황이 매우 좋지 않았던 1993년부터 6년 동안 이른바 고난의 행군 시기를 거치면서 재정낭비 등으로 무능력한 지도자로 비판받았다. 김정일의 후계 자리는 왕정과 같이 그의 셋째 아들인 김정은에게 세습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조선로동당 총비서이시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위원장이시며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이신 우리 당과 우리 인민의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동지"(줄여서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동지")로 불렸다. 2012년 4월 11일 조선로동당 당대표자회의에서 조선로동당의 영원한 총비서로 추대되었으며 2012년 4월 13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제12기 제5차 회의에서 영원한 국방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김정일은 1954년 9월 평양제1중학교에 입학하여 1957년 8월 중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56년 5월에는 제1차5개년계획의 전망에 대한 사대주의, 교조주의에 물젖은 어느 노동당 간부를 강연에서 논박하기도 했다 한다. 1955년 4월 만경대와 칠골혁명사적지 참관을 조직하고 1956년 6월 5-14일에는 평양제1중학교 혁명전적지들에 대한 답사행군을 하였다. 그 뒤 1957년 9월 1일부터 평양제1중학교 고급반에 진학하여  1960년 평양남산고급중학교를 졸업했다. 남산고급중학교 재학 중에 이 학교의 교사로 재직함과 동시에, 교내 민주청년동맹 부위원장으로 활동했다. 1958년 6월 27일에는 종파주의자를 뿌리뽑자는 취지의 학교민청총회를 소집하기도 하였다. 이 시절의 김정일은 감수성이 풍부했고 감정적이었다고 한다.

고급반을 졸업한 1960년 9월부터는 김일성종합대학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하고, 1964년 4월에 졸업하였다. 젊은 시절에 그의 관심거리는 음악, 농업, 그리고 자동차 수리였다. 그는 학술 경쟁과 세미나를 조직하였을 뿐 아니라 야외 연구여행을 도와주기도 했다. 독서에 취미를 붙여 김일성의 고전적 로작들과 마르크스-레닌주의 저서들을 탐독하고 기계공학과 농학, 축산학과 같은 전문기술분야의 책들, 사회과학과 문학예술 분야의 책들을 읽기도 했다 한다.


김정일은 1957년 평양제1중학교를 졸업하고, 남산고급중학교를 거쳐 1963년 김일성종합대학에서 정치경제학과를 공부한 다음 문학, 교육, 예술, 언론 개혁, 그리고 천리마운동에 대해서 보다 과학적인 방법들을 주장 하였다고 한다. 감수성이 예민했던 그는 문학과 시에 빠지기도 했고, 다양한 책을 탐독하기도 했다. 또한 김일성  공산주의 사상을 찬양하는 시와 산문을 짓기도 했고, 가곡도 몇 편 작곡하기도 했으며, 직접 영화 대본과 희극 대본을 쓰기도 했다.

대학 재학 중 그는 소련 폴란드, 동독, 중화인민공화국 등을 두루 여행하였고, 비공식적으로는 미국 프랑스의 여행을 다니기도 했다.

조선로동당 활동

1969년 9월 조선로동당 조직지도부 부부장 및 선전선동부 부장을 지냈다. 이후 중앙당 문화예술부장, 중앙당 조직 및 선전비서, 정치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1972년 10월 조선로동당 당중앙위원회 제5기 제5차전원회의에서 당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73년 9월 조선로동당 당중앙위원회 제5기 제7차전원회의에서 당중앙위원회 비서로 선출되었다. 1974년 2월 당중앙위원회 제5기 제8차전원회의에서는 당 중앙위원회 비서에 유임되고, 겸임 당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86년 12월 29일 최고인민회의 특별회의에서 당 정치국 상무위원 겸 비서에 유임되었다.


김정일은 천리마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경제성장 운동에 동참했다. 1973년부터 전개된 3대혁명 소조운동을 조직, 직접 지도하였고 1970년대 말부터 3대 붉은 기 쟁취 운동을 벌여 근로자의 노동 능률을 높이는 데 노력했으며, 1980년 10월에 열린 조선노동당 제6차 당대회에서 후계자로서 지위가 확정되었다. 이 대회에서 김정일은 최초로 대중 앞에 자신의 모습을 공개적으로 드러냈다.1980년 10월 조선로동당 제6차대회에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 당 중앙위원회 비서,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82년 2월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제7기 대의원에 선출되었고, 이후 최고인민회의 제8기, 제9기, 제10기, 제11기 대의원에 연임되었다.

1984년 5월 18일에는 로작 남조선인민들의 반미자주화투쟁은 높은 단계의 애국투쟁이다를 발표하였다.


1994년 그의 아버지인 김일성이 사망하자 3년간의 유훈통치를 발표하였으나 사실상의 통치권자가 되었다. 김일성을 공화국의 영원한 주석으로 추대하면서 사실상 국가주석직을 폐지하고, 명목상의 국가원수직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맡게 하되, 김정일 본인은 군사권을 장악한 국방위원장으로 실권을 행사하였으며 2009년 4월 9일에야 헌법을 고쳐 헌법상의 국가원수에 취임하였다.

1990년 베를린 장벽 붕괴와 1992년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를 목격한 그는 개방정책을 추진하기도 했다. 나진·선봉의 무역지구를 대폭 확대하였고, 개성직할시 내의 개성공단, 함경남도 원산 등의 무역항을 재정비하고 국외 상인들의 출입을 허용했다. 1998년 이후에는 중국 경제 특구제를 도입하여, 4개의 경제특구를 지정하였다. 사상적으로는, '주체사상의 최종적인 해석권은 수령과 그 계승자에게 있다는 정치적 특권'을 강조하여, 국가지도자 한 사람에게 불법적인 권력이 집중되는 북한의 현 제도를 이론적으로 확립시켰다.

1997년 6월 김정일은 일꾼들에게 '여운형선생 서거 50돐이 되는 계기에 모란봉극장에서 추모회를 조직하는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1997년 10월 조선로동당 총비서에 선출되었다. 1998년 11월 현대그룹 정주영 명예회장과 평양에서 회담을 가졌다. 1999년 1월초에는 신년사에서 새해를 '민족의 자주와 대단결의 해'라고 선언하였다.


김정일은 비날론, 주철, 옷감 등 산업현장을 시찰, 방문하여 직접 지도하였다. 1980년대에는 '남포갑문' 개발 사업을 직접 진두지휘하기도 했는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이를 그의 큰 치적으로 본다. 2009년 2월 21일 함경북도 김책제철연합기업소를 시찰하였고 2월 22일 함북의 7월7일연합기업소를 현지지도하였다.

2010년 3월 14일 북한노동당 황해북도위원회 책임비서 최룡해,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장 김경희장성택, 조선로동당 제1부부장 리제강리재일을 대동하고 새해영농전투에 진입한 사리원시 3중3대혁명붉은기 미곡협동농장을 현지지도하였다. 김정일은 먼저 농장책임일군들의 안내를 받아 새로 개건된 혁명사적관 우렝이양식장 등을 돌아본 뒤 '강성대국의 대문을 열어제끼는데서 가장 중요한 문제의 하나는 농업생산을 늘이는것이라고 하시면서 농장앞에 나서는 강령적인 과업들을 제시하시였다. 이어 그는 미곡협동농장에서 최근년간 농업생산을 급격히 늘일수 있은 기본요인은 종자혁명방침을 철저히 관철한데 있다고 하면서 일군들과 농업근로자들의 창발성을 적극 발양시켜 농장의 기후풍토에 맞는 우량품종을 도입하기 위한 사업을 계속 힘있게 추진시켜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1.까치에 대하여 알아보자.

까마귀과 까치속의 조류.머리가 아주 좋은데다 적응력이 강해서 어디에서나 잘 산다고 한다. 인간의 도시에서도 잘 살아가는 편. 참새, 비둘기, 제비와 함께 한국인에게 친숙한 새가 아닐까 싶다.
울음소리는 "꺅꺅"거린다. 한국 까치는 모든 까치 종을 통틀어서 가장 울음소리가 크다고 한다. 아침에 일어날때 알람용으로도 쓰인다.
굼뜨고 느긋한 닭둘기와는 달리 잽싸고 날렵하며 콩콩 뛰어다닌다. 이는 까치가 참새와 가까운 종류이기 때문, 참새의 또다른 친척인 까마귀는 걸어다니기도 하고 콩콩 뛰어다니기도 한다. 
까치는 비둘기보다 생태계에서 한단계 위에 있다. 그래서 닭둘기라고 해도 까치에게는 꼼짝도 못한다. 아니 애초에 움직임 자체부터가 차이가 나는데 개기는 것 자체가 성립이 안된다. 가끔 닭둘기들한테 빵쪼가리 같은 걸 던져주면 1차로 까치나 참새들이 귀신같이 날아와 잽싸게 쓸어담고 남은 걸 닭둘기들이 가져가는 경우가 많다.
식성도 좋은지라 벌레, 개구리, 나무열매에서부터 음식물 쓰레기, 물고기, 짐승의 사체까지 못먹는 것이 없다. 심지어  을 사냥하기까지 한다.
한반도에서는 까치밥이라고 해서 과일을 수확할 때, 다 따지 않고 한두 개씩 남겨 놓는 풍습도 있다. 이는 고수레와 같은 맥락. --현실은 한두 개씩 남겨 놓고 과일을 다 털어간다. 
물고기, 인간과 함께 이무기 주식이라는 말이 있으나 실제로는 이다.
민간 신앙에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온다거나, 헌 이를 주면 새 이를 가져다주는 이빨 요정의 역할도 해주는 등, 국내에서는 대표적인 길조로 소개된다. 거의 비공식 국조 취급. 행운와 희소식을 가져다 주는 전령사이기도 한다.
이 까치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전래동화 은혜갚은 까치가 있다.
최근에는 비둘기에 이어 지하철을 이용하는 사례도 있다. 경의중앙선같이 지상 플랫폼이 많은 경우, 한가한 시간대에 유유자적하게 열차에 올라타는 대담한 부류도 있는데다, 기가 막히게 자기가 내릴 만한 역에 잘만 내린다.




2.까치의 행동


여름철엔 단독생활을 하지만 겨울이 되면 떼로 몰려다닌다. 대량으로 무리를 짓기 때문에 맹금류도 쉽사리 손을 대지 못한다. 당당한 외모와는 달리 완벽한 스케빈져고 굼뜨기가 하늘의 나무늘보 수준인 독수리는 물론이거니와 꽤 많은 수의 맹금류가 까치 떼의 공격을 받아 다친다. 역시 쪽수는 못당한다. 이쪽도 가끔 잡아먹는 수준이지 다른 먹이가 있다면 까치보다는 다른 먹이를 노리는 편. 닭둘기라든지~~그리고 참매는 천연기념물 제323-1호다. 즉 도심에서 까치와 마주치는 일은 상당히 적다는 것. 참매보다 도심에 잘 적응해서 살고 있는 황조롱이들이 있긴 하지만 다소 소도시인 곳에 가면 황조롱이같은 맹금류가 이따금 보이는데 보이는 족족 십중팔구 까치에게 다구리당하는것을 쉽게 볼 수 있다. 
가끔 생태사진가들이나 새를 전문으로 찍는 사진사가 독수리를 공격하거나 갈매기를 다굴하는(아래 까마귀도 그렇지만, 갈매기도 보통 사납고 난폭한 새가 아니다.) 까치 사진을 올리는데, 보면 그 사나운 갈매기가 그렇게 불쌍해보일 수가 없다. 다만 생존에 위협을 느끼는 정도가 아니면 죽거나 크게 다치게 하진 않는다.
뱀과 싸우기도 한다. 아마 까치 새끼를 잡아먹어서 싸운 듯 하다. 까치 혼자 뱀이랑 싸워 이긴 것으로 보인다. 과연 전투조류. 그들은 종 따윈 신경쓰지 않는다네또 있다.관련 뉴스도 있다.


3.까치를 먹는다면?

맛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 피를 빼도 비린내가 꽤 있고 닭이나 오리고기보다 질기지만, 식감이 쫄깃쫄깃하고 고소하다. 닭/오리보다는 오히려 소고기에 가까운 맛이 나지만, 살점이 많이 없고 퍽퍽해 식용으로서의 가치는 떨어진다.
일단 도시의 까치는 닭둘기와 마찬가지로 각종 유해 중금속에 절어 있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웬만하면 먹지 말자.


4.까치는 착한동물일까?

아래에 설명된 전신주 문제도 있지만 과수 농가 입장에선 머리가 엄청나게 좋은 새 중의 하나며, 6살 정도 아이의 지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개나 원숭이보다 더 좋다. 그래서 허수아비 따위는 아무 소용도 없다. 게다가 성격도 엄청나게 난폭하고 호전적인 녀석들이라 사람 정도나 되어야 슬슬 피하지 독수리한테도 겁없이 달려들어 자기가 이기거나 지거나 말거나 공격한다. 물론 지상 한정으로는 거의 무조건 까치가 이기지만. 심지어 대부분 일부 종은 사람한테도 공격을 한다.

겨울철 비닐하우스 농가에 심대한 피해를 입힌다. 참새 등이 비닐하우스에 한 번 들어오면 출구를 못 찾아서 미친 듯 날뛰곤 하지만, 까치는 비닐을 살짝 들어올리고 들어와서 과일을 한입씩 다 쪼아 버리고는 들어온 곳으로 나간다. 특히 과일을 쪼아먹을 때 하나 먹고 하나 먹는게 아니라 과수원 과일 전부 한 번씩만 쪼아놓기 때문에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닐뿐더러 이 녀석들이 맛있는 과일은 귀신같이 알아차려서 맛난 과일부터 드시고 가주신다. 과수원 농가의 주적이며, 까치의 피해를 막을 수 있는 여러 대책들이 실시되고는 있다. 그런데 까치가 영악한 것은, 학습효과가 있어서 이런 것을 한 번 당하면 다음에는 잘 당하지 않는다. 

군 부대에서 가끔 두꺼운 비닐을 찢고 고기를 훔쳐먹는 모습도 보여주고 있다.

심지어는 인간을 상대로 협공 가하기도 한다. 이전에 동료 또는 자신이 비슷한 외모의 사람에게 당했던 경험이 있을 수도 있다.

북한에서도 예전부터 해로운 새로 여겨져서 보이는 까치들은 죄다 쏴죽여버렸고 식량난 때에 시달리던 1990년대 중후반에는 까치들을 보이는대로 죄다 잡아먹어 버렸다고 한다. ~~사실 얘네 현실을 보면 먹을 게 너무 없어서 쏴죽였다는 게 더 설득력이 있을 듯. 덕분에 길조로 여겨져서 많이 보이는 꿩과 달리 북한에서 까치가 진짜 안 보인다고 한다.

서양에서는 대표적인 흉조. 닐스의 모험에서도 까마귀들은 장난꾸러기인데 반해 까치는 새들의 알을 노리는 흉조로 나온다.

아무거나 가리지 않고 먹는데다가, 본디 나무에 둥지를 지어야할 것을 전신주나 엉뚱한데 지어놔서 인간의 생활에 피해를 주기 때문에 괜히 유해조류로 지정된 게 아니다. 그리고 이젠 몇몇 지역에선 아예 비둘기 뒤를 이은 새가 되기도 한다. 취한 사람이 토한 걸 비둘기랑 어울려 먹는 까치를 목격한 경우도 있다.근데 신기한건 그러고도 여전히 비둘기보다 훨씬 빠르다.




5. 까치의 집

바다 건너 일본이나 땅끝 유럽에서는 까마귀가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까마귀는 유독 한국에서만큼은 기를 못펴는데, 그 이유가 바로 까치 때문이라고 한다. 한국에서 까마귀 보기는 정말 힘들다. 까마귀는 원래 인간이 생활하는 곳에서 많이 발견되는 새인데, 한국에서 까마귀를 찾으려면 산골짜기로 들어가야 몇 마리 볼 수 있다. 까치에게 쳐발려서 그렇거니와 까마귀 소리가 재수없다고 여기던 인식 때문에 보이는 대로 사냥당하던 것도 많다.
하지만 최근에는 전체적으로 까치의 수도 줄어서인지 몇몇 지역에선 까마귀도 활개를 치고 있다. 서울시 성북구는 까마귀의 개체수가 제법 많다. 서울외에 경기 대도시에도 까마귀는 흔하게 볼 수 있다. 물론 까치보다는 적지만.
이웃나라인 일본은 우리와 반대로 까치보다 까마귀가 압도적으로 많이 서식한다. 특히나 까치는 현재 큐슈 지역에만 분포하고 다른 지역에선 찾아볼 수 없어 보호종으로 지정돼있다. 까마귀가 이미 터를 잡고 있었기 때문에 열도 점령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까치의 존재조차 모르는게 대부분.
현재 일본에 소수 남아 있는 까치는 한반도에서 유입됐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며 유입시기는 임진왜란이다. 알려진 이야기로는 당시 사가성 성주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동래포로 가기 전 새 한마리가 배에 올라타 카치카치하며 울길래 이 새는 우리에게 승리를 가져다 줄 것이라며 조선에서 잡아다가 데려가 번식시킨 것이 현재에 이르렀다고 한다.
일부 지리적으로 가까운 부산광역시에서 자연유입됐다고 주장한다고 하는데, 철새도 아닌 까치가 바다를 건너갔다고 보기엔 힘들어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야기. 
서울에선 산지를 끼고 있는 강서구 지역에서 까치의 개체수가 아주 많다. 이 때문에 지어진 역 중 하나가 까치산역이기도 하다. 산과 마을에서 자주 보이며, 나무에는 어딜가나 까치집이 있다. 서울치고는 이 지역에선 비둘기에 견줄만한 서식지와 세력을 가지고 있다.
대전광역시에서는 도시의 상징새로 인정되는 만큼 비둘기만큼 많이 굴러다니는 새다. 물론 광역시 중에서는 비교적 자연친화적인 관계로 까치 뿐 아니라 참새, 멧비둘기도 흔히 볼 수 있지만... 특히 모 대학 근처에 가면 정말 도심의 비둘기 수준으로 굴러다닌다고 할 정도로 많다.
포항시에도 서식하는 새 대부분이 까치이며, 어딜가나 까치집이 널린데다 모 대학의 캠퍼스에도 사계절 온통 까치들만 보인다.
반면 바로 옆 경주시에는 까치보다 까마귀가 많은데, 수천마리의 까마귀 무리가 까맣게 몰려다니는걸 흔하게 볼 수 있다. 
광주광역시에는 물까치가 까치만큼 많다. 까치보다 훨씬 호전적이고 여러 마리가 몰려다니는 특성상 영역다툼에서 훨씬 큰 까치가 밀리는 경우도 많다. 전남대학교 캠퍼스의 까치들은 여름쯤에 보면 대부분이 물까치한테 공격당해 깃털이 엉망이 되어 있다.
제주도에는 원래 없었으나 인간에 의해서 건너갔다. 감귤농사를 망치는 유해조류로 피해가 막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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