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는 오랫동안 사냥과 목축, 경비 등의 목적으로 길러져 왔다. 오늘날에도 전통적인 목적에 따른 품종이 길러지고 훈육되고 있다. 사냥개는 사냥의 대상에 따라 수렵견조렵견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사냥 습성에 따라 시각형 하운드와 후각형 하운드로 구분된다. 눈으로 추적물을 쫓는 시각형 하운드로는 그레이하운드가 대표적이고, 후각형 하운드로는 비글이 대표적이다. 목축견으로는 올드 잉글리시 쉽독이나, 콜리가 대표적이며. 일본종인 아키타도 목축견이다. 수레나 썰매를 끄는 일을 하는 사역견으로는 시베리안허스키로트바일러마스티프 등이 있고, 경비견으로는 불테리어미니어쳐슈나우저진도개와 같은 개가 쓰이며, 군견이나 경찰견으로는 저먼 셰퍼드도베르만핀셔와 같은 개들이 쓰인다. 세인트 버나드는 인명구조견으로 유명하다. 모든 품종의 개들이 애완견으로 길러지고 있으나, 특히 애완용으로 품종이 육종 된 것에는 푸들치와와시추와 같은 것이 있다.

최근에는 개의 역할이 더 넓어져, 시각장애인을 인도하는 맹인인도견이나, 사람들의 건강 회복을 돕는 치료견과 같은 역할을 하는 개들도 있다.


반려견

오늘날 반려견은 가족의 일원으로 여겨진다. 반려견에 대한 이러한 시각 변화는 크게 보아 두 종류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 내었다. 하나는 개를 독립적인 주체로 여기고 개의 개성과 습관등을 파악하며 소통하려는 흐름이고, 다른 하나는 가족의 일원으로서 개다운 개를 기르기 위해 매일 규칙적인 훈련을 시키는 경우이다.개는 아주 오래전부터 사람들과 친화적인 관계를 맺어왔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이 애완 동물로서 널리 퍼지게 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이다. 오늘날 애완견 대다수가 집 안에서 사람과 함께 사는 것과 달리 1950년대에서 1960년대까지만 해도 마당에 개집을 따로 만들어 키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1980년대에 들어 애완견의 반려 동물 역할이 더 부각되면서 개를 집안으로 들여 키우는 경우가 많아졌다.

개가 가족의 중요한 구성원으로 인식되면서 관련 상품 역시 광범위한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 사료와 급수기 같은 생필품뿐만 아니라, 향수, 의상 등의 상품이 팔리고 있으며, 미용, 치료, 훈련과 같은 서비스 시장의 규모 역시 광대하다. 2013년 대한민국의 애견 시장 규모는 2조원 정도로 추산된다.

애견협회에서는 애완견을 목적으로 개량된 작은 품종의 개들을 특히 토이종으로 분류한다. 그러나, 최근에는 모든 품종의 개들이 애완견으로 길러지고 있다. 원래는 사냥개로서 개량된 품종의 개들을 애완견으로 기르는 경우엔 훈련과 사육에 애를 먹는 경우도 있다. 집안에서 기르기 어렵다는 이유로 비글미니어쳐슈나우저코카스파니엘을 3대 악마견이라 부르기도 한다.

애완견을 기르다 버리는 일이 사회 문제가 되기도 한다. 대한민국의 경우 가장 많이 버려지는 품종은 몰티즈, 시추, 요크셔테리어 등이며 대형견으로는 진돗개가 많이 버려진다.

사역견

개는 여러 가지 일에 이용된다. 전통적으로 이용되었던 사냥이나 운반과 같은 일은 오늘날 대부분의 지역에서 산업적 의미를 잃었지만 스포츠로 변형되어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다. 캐나다 유콘 준주의 화이트호스에서 미국 알래스카 주 패어뱅크까지의 1,600 km 거리를 달리는 눈썰매 경주가 해마다 열리고 있다. 눈썰매를 끄는 품종으로는 시베리안허스키가 대표적이다.

한편, 경비견이나 탐지견으로 이용되는 것은 꾸준히 이어지고 있어 대한민국의 경우 2013년 기준으로 71마리의 마약탐지견이 세관에서 운용되고 있다. 마약탐지견으로는 주로 래브라도레트리버 종이 이용된다. 레트리버는 맹인인도견으로도 적합한 품종이다. 2010년 기준으로 대한민국에는 63 마리의 안내견이 맹인과 함께 생활하고 있으며, 연간 10 마리 정도가 새로 안내견이 되고 있다. 미국의 경우는 연간 610 - 630 마리 정도의 안내견이 새로 배출된다.

개고기

세계의 소수 여러 문화에서 개고기를 먹는다. 중국은 고대에서부터 개고기를 주요 식육의 하나로 다루었다. 고대 중국 유적인 앙소·용안 유적에서는 돼지뼈와 함께 개뼈가 다른 동물의 뼈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이 발굴되었다. 논어에도 제사 때 개고기를 올린다는 구절이 있다. 그러나, 한나라 말기부터 개고기를 꺼리기 시작하여 오늘날에는 광둥 성 지역을 중심으로한 일부에서만 개고기를 먹는다.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 베트남필리핀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지역에선 오래전부터 개고기를 먹었다. 개고기는 아시아뿐만 아니라 베르베르족이 사는 아프리카 마그레브 지역이나, 스페인과 스위스의 일부 지역에서도 먹었다.

한국에서 개고기는 오랫동안 즐겨왔던 음식이다. 특히 조선시대에 이르러 면서 개고기 식용이 활발해져 음식디미방, 산림경, 규합총서 등 여러 책에 다양한 요리법이 소개되었다.

반면, 개고기에 강한 터부를 갖는 문화도 있는데, 조로아스터교는 개를 신성한 동물로 여겼고, 조로아스터교를 믿던 고대 페르시아는 개고기를 엄금하였다.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는 새로 편입된 아프리카 지역에 개고기 금지를 포고하기도 하였다 오늘날 영국과 프랑스 등의 서구 유럽에서는 개고기를 먹는 것에 매우 비판적이다. 이때문에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한국의 개고기 문화가 비난 받기도 하였다.

최근 전통적으로 개고기를 먹던 문화권에서도 개를 반려 동물로 여기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개고기를 반대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개고기를 즐기는 사람들은 전통적인 음식문화를 비난하는 것은 옮지 않다고 주장한다. 대한민국에서는 개를 가축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어 식용을 목적으로한 개 도살은 원칙적으로 불법의 소지가 있다. 식육용 개를 사육하는 쪽에서는 이 때문에 도축과 조리 과정에 위생을 위한 규제를 만들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지만, 개고기를 반대하는 쪽에서는 개를 가축으로 인정할 경우 애완견이나 유기견에 대한 광범위한 도살이 있을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한겨레의 보도와 국정감사

2016년 9월 20일 한겨레신문은 재벌들이 출연해 만들어진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에 최순실이 관여했다고 보도했다. 

10월 18일 경향신문은 최순실이 독일에 설립한 비밀회사 비덱을 세웠다는 사실을 밝혀내어 이에 대한 내용을 보도하고, 19일에는 최순실이 대한민국내에 비밀 회사 더블루K를 세웠다고 이에 대한 내용을 보도했다.

10월 19일 밤 JTBC 뉴스룸은 최순실 씨가 박근혜 대통령의 연설문을 손보는 일을 즐겼다는 최순실의 측근 고영태의 증언을 보도했다. 이에 이원종 대통령비서실장은 국회에서 "봉건시대에도 있을 수 없는 얘기가 어떻게 밖으로 회자되는지 개탄스럽다"라며 연설문 수정 의혹이 사실이 아니라는 취지로 발언하였다. 이후 JTBC보도 등을 통해 최순실이 연설문을 수정한 사실이 확인되자, 이원종 대통령비서실장은 사실관계(최순실이 연설문에 개입한 사실)를 몰랐으며 봉건시대에도 있을 수 없는 얘기라는 신념은 변함이 없다고 해명하고 10월 30일에 사직한다.

최순실 파일

2016년 10월 24일, JTBC 뉴스룸은 최순실이 버리고 간 태블릿 컴퓨터자료를 근거로 최순실이 44개의 대통령 연설문을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발표하기 전에 받았다고 단독 보도했다. 그 중에서 가장 문제된 것은 지난 2014년 3월 28일 박 대통령이 독일 드레스덴을 방문하면서 발표한 드레스덴 선언의 내용을 담은 한글 파일 형식의 연설문 파일이었다. 당시에는 극도의 보안 속에서 준비된 연설문이었다고 전해졌다. 그러나 JTBC 취재팀이 확인한 결과, 박 대통령의 연설이 시작된 건 한국 시각으로 3월 28일 오후 6시 40분경이었으나 최 씨가 파일 형태로 전달된 원고를 열어본 건 3월 27일 오후 7시 20분으로 하루가 빨라, 최순실은 박 대통령의 연설이 있기 하루 전에 드레스덴 연설문의 사전 원고를 읽어본 것으로 드러났다. 또 마지막으로 수정한 날짜가 2014년 3월 27일 오후 6시 33분으로 드러나 수정된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최 씨가 열어본 것으로 추정됐다. 더구나 최 씨가 받아본 총 13페이지 분량의 연설문 중 30여 단락에서 붉은색 글씨가 발견됐는데, 이들 문단을 들어내도 문맥이 이어지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 붉은 단락과 실제 연설문을 비교하면 대략 20여 군데가 다르며, 어미나 표현이 바뀌었거나 실제로는 언급되지 않은 단락도 붉은색으로 표기되어 있었다.박근혜 대통령 취임식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오방낭 시안 파일이 발견됐는데 실제 취임식에 쓰인 오방낭과 같이 오방색배치가 잘못되어 있었다.

이에 대해 최순실은 10월 27일 세계일보와의 단독인터뷰에서 25일 박근혜 대통령이 사과한 정도의 내용만 인정하며 태블릿이 자기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으나, 해당 태블릿에서 최순실의 셀카가 발견된 점 때문에 신빙성에 의심이 간다는 시각이 많았다.

이 사실이 드러난 이후 검색엔진 네이버의 실시간 검색어에 탄핵과 하야가 오르는 등 퇴진 요구가 일어났다. 보도가 나오기 전에는 정치권 차원의 탄핵과 하야 요구는 금기시되었었다. 또한 수 많은 대학생들과 국민들이 박근혜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한편 이 사건으로 이원종 비서실장과 수석비서관 전원이 사표를 제출하였고 10월 30일에 청와대는 이원종 비서실장과 우병우 민정수석비서관, 문고리 3인방으로 불린 이재만 총무비서관, 정호성 부속비서관, 안봉근 국정홍보비서관의 사표를 수리한다.

검찰 조사

최순실은 10월 30일 귀국하여 10월 31일 검찰 조사를 받았다. 검찰은 10월 31일 태블릿 컴퓨터에 최순실 본인만 찍힌 셀카 이외에도 최순실과 최순실의 지인 여러명이 찍힌 사진을 발견하고 '최순실이 태블릿 PC를 사용했다'는 결론을 내리는 한편 최순실에게 거짓말한 이유를 추궁했다. 수사가 진행되어 박근혜 대통령이 검찰에 조사를 받게 되었고 박근혜 대통령은 유영하를 변호사로 선임했다. 11월 20일 검찰은 최순실 등을 기소했고 박근혜도 공범이라고 밝혔다. 삼성, SK, 부영에 대한 내용은 공소장에 적시되지 않아 추가 수사가 진행될 것으로 보이고 있다. 공소장이 나온 이후 헌법학자 대부분은 드러난 사실은 탄핵사유가 된다는 입장을 밝혔다. 

탄핵 소추

정치권에서 박근혜 탄핵 추진에 들어갔다.

범야권 의원과 탄핵에 찬성하며 새누리당을 탈당한 김용태 의원을 합치면 172명으로, 탄핵이 가결되려면 새누리당 내에서 28명의 추가 찬성이 필요한 상황이다. 중앙일보는 김용태 의원이 탈당하기 전 129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했는데 122명 응답에 30명(비박 26명ㆍ범친박 4명) 찬성ㆍ49명(비박 12명ㆍ범친박 37명)은 고민중 또는 노코멘트 나머지 30명(비박 2명ㆍ친박 28명)반대로 나왔다.  KBS에서 새누리당 의원 128명 전원의 의견을 전화로 조사한 결과 탄핵 찬성 27명, 반대 20명, 유보적 입장 30명, 무응답 51명으로 나왔다. 현재는 12월 9일 불참 1 찬성 234표 반대 56표 무효 7표 기권 2표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 소추의결서는 정세균 국회의장의 발언으로 탄핵은 의결되었다.


정치권

정의당은 박근혜 퇴진을 당론으로 정했다. 11월 1일 안철수 국민의당 전 대표가 박근혜의 하야를 요구했고 국민의당 문병호 전 의원은 국민의당의 박근혜 대통령 하야 당론 채택을 요구했다. 더불어민주당의 문재인은 박근혜 퇴진을 요구하는 국민의 민심에 공감하지만 정치적인 해법을 찾고자 한다면서 거국중립내각 구성을 거부한 11월 초 박근혜대통령의 개각안에 반대하며, 사태 해결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면 비상한 결단을 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탄핵이나 하야 요구에 박근혜 대통령이 응하지 않자 2016년 11월 중순에 제3의 임기단축 조기대선 방안으로 개헌에 의한 임기단축안도 나와서, 정치권에서는 탄핵·하야·개헌의 3가지 방안으로 대통령 조기퇴진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2016년 11월 14일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문희상은 개헌안 부칙을 통해 조기대선을 치러서 임기를 단축시키자고 제안했다. 서울신문은 이경형 주필의 11월 17일자 칼럼에서, 문화일보는 11월 15일자 사설에서 대통령이 퇴진을 선언하게 만든 뒤에 개헌을 통해 사임시키고, 대통령이 이 안을 따르기를 거부한다면 탄핵시키자고 주장했다.새누리당 정진석 대표는 야권의 하야 요구에 반대하며 국민이 동의하면 개헌을 통한 임기단축을 하겠다고 밝힌다.하지만 단순히 개헌에 의한 임기단축은 대통령에 대해 면죄부를 준다는 비판이 있다.[53] 심상정은 국회 탄핵의 형태로 박근혜 퇴진을 추진해야하지만 여의치 않을 경우 원포인트개헌(한가지 조항만 수정하거나 집어넣는 개헌)에 의한 국민탄핵을 통해서라도 퇴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규식은 누구인가?

언더우드 목사 비서, 경신학교 교수와 학감 등을 지내고 미국에 유학하였다. 1918년 파리강화회의 신한청년당,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로 파견되어 이후 10여년간 외교 무대에서 종횡무진으로 활약하며 한국의 독립운동이 국제 승인을 받도록 하기 위하여 심혈을 기울였다.

파리 강화 회의 참가 중 1919년 3.1 만세 운동을 기획하였고, 파리 강화 회의에 참여하여 한국의 독립을 승인해줄 것을 국제사회에 알리려 노력하였으나 좌절당하였다. 1919년 3월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이후 각지에서 세워진 임시정부로부터 전권대사와 외무부서장에 임명되었다. 4월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외무 총장에 임명되고 파리대표부를 조직하고 위원장이 됐으며,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장, 부위원장, 학무총장 등으로 활동하다가 1921년 임시정부의 창조파와 개조파를 놓고 갈등할 때는 창조파의 입장에 서기도 했다. 그 뒤 만주에서 대한독립군단의 지휘관으로도 활약하였고, 임정을 떠나 독립운동단체의 통합노력과 교육 활동 등을 하다가 1930년 다시 임시정부에 재입각, 1935년 민족혁명당 결성을 주도하고 당 주석직에 올랐으며, 좌우합작의 일환으로 임정에 다시 참여, 1940년부터 1947년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부주석을 지냈으며 주로 외교활동을 전개해나갔다.

광복 후에는 김구 등과 함께 임정 환국 제1진으로 귀국하여 신탁통치 반대운동에 나섰으나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은 임시정부 수립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견해를 수정, 여운형과 함께 좌우합작운동에 앞장섰다. 3상결정 부분 지지와 미소공위, 좌우합작 당시 테러에 시달려야 했다. 1948년 2월 남한의 단독 총선거에 반대하여 김구(金九), 조소앙 등과 함께 북한으로 건너가 4월 남북협상에 참여하였다.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였으나 1948년 5월 귀환 후, 불반대 불참가로 입장을 바꾸고 민족자주연맹 당원들에게 초대 제헌의원 선거와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출마할 것을 권고하기도 했다. 1950년 한국 전쟁 중 납북되어 병으로 사망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으로는 1919년 4월 임시의정원 의원, 외무총장, 파리위원장, 8월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장, 부위원장, 1920년 학무총장, 1930년 8월 학무장, 11월 국무위원, 1932년 11월 국무위원 등을 지내고 1940년부터는 대한민국임시정부 부주석이었다. 대중정치나 선동정치를 경멸하였고 정당활동을 기피하였으며, 정당활동으로는 민족혁명당 주석, 민중동맹 위원장, 민족자주연맹 위원장 등을 지내기도 했다.

교명(敎名)은 요한(Johann), 아호는 우사(尤史), 죽적(竹笛) 등이다. 본관은 청풍(淸風). 중국에서 활동할 당시의 가명은 '김성'(金成) · '김중문'(金仲文) · '김일민'(金一民) · '여일민'(余一民) · '왕개석'(王介石) 등이며, 별칭으로는 '변갑'이라는 이름도 있었다.노론 중신인 김상로, 김재로, 김치인, 김종수 등의 방계 후손이었다. 본적은 경상남도 동래군이나 부친이 관리로 집무하던 중 태어난 출생지는 강원도 홍천군이다.


1903년 가을 그는 미국 뉴저지 주 프린스턴 대학교(Princeton University) 대학원 석사과정에 입학, 1904년 프린스턴 대학교 대학원에서 영문학 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했다.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박사학위 과정을 장학생으로 선발하고 학비를 지원한다 하였으나 러일전쟁이 전개됨에 따라 그는 '고국의 독립을 위해서' 라며 거절하고 귀국하였다. 1904년 가을 그는 YMCA 청년회 교육부 간사에 임명되었다. 그 뒤 YMCA 이사회 이사 겸 서기를 거쳐 YMCA 교사로 임명되었다. 얼마 뒤에는 YMCA 중학교 교장에 임명됐다.

1905년 8월 미국 포츠머스에서 개최된 강화회의에 참석하고자 청나라 상하이까지 갔으나 실패하고, 11월 7일 귀국하였다. 그 해 만주 뤼순 항구가 일본에 함락되자 로노크 대학의 잡지에 여순항의 함락을 크림 전쟁에서의 세바스토폴의 함락과 비교한 '근대 세바스토폴의 함락'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교육과 신앙 활동

1904년 언더우드 목사의 비서가 되었다. 1905년 그는 상동교회를 찾아, 전덕기·이동녕 등과 교류하는 가운데 한민족의 나갈 길을 의논하였다. 1904년 윤치호와 함께 황성기독교청년회(皇城基督敎靑年會)의 이사로 선출되었다. 1904년부터 1913년까지 언더우드의 비서로 있으면서 YMCA학교 학생부 담당 겸 간사, YMCA 학교 교사, 경신학교 교사, 기독교 주일학교 교장, 배재전문학교영어강사, 연희전문학교 영어강사, 조선기독교 대학교 1학년 2개반 담당 교수 등을 지냈다. 배재학당에서 그는 영어 과목과 수사학 과목을 가르쳤다.

1906년 5월 21일에는 전 군수 조순환(趙淳煥)의 무남독녀인 조은수(趙恩受, 당시 16세)와 결혼하였다. YMCA청년회 학관의 학감으로 재직 중일 때는 양반 출신 학생들은 스포츠를 천히 여기고 그 시간을 거부했다 한다. 그러나 김규식 박사는 강제로 체조를 시키고 스포츠를 장려했다. 이 때문에 많은 학생들이 학교를 떠나는 소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선교와 사회단체 활동

1907년 장남 김진필(金鎭弼)이 출생했으나 6개월 만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1907년 2월 대한유학생회(大韓留學生會)의 초청연사로 초빙되어 강연하였다. 1909년 7월 한국문법 책을 펴냈고, 로노크 대학교 학보의 1909년 7월호에 실렸다. 1910년 경신학교 교감에 선임되었다.

종교 활동으로는 1907년 '제7회 세계기독학생연맹세계대회'가 일본 동경에서 열렸을 때 윤치호(尹致昊)·김정식 등과 함께 대회에 참석하였다. 새문안교회 집사로 교회 예배당 건설을 추진하였고 1910년 새문안교회 예배당 헌당과 함께 새문안교회 장로가 되었으며, 1910년 숭실중학교 교사로 출강하였다. 숭실중학교에서 그는 수사학(修辭學) 과목을 가르쳤다. 조병옥에 의하면 김규식은 수업 시간에 종종 영어시를 읊어주곤 하였다고 회고하였다. 셀리, 키이츠, 테니슨, 바이런 등의 시들을 잘 읽어 주었다. 조병옥 숭실중학교 편입생 시절, 가장 재미있게 청강한 과목으로 김규식이 가르치던 수사학이었다 고 회고하였다.

1911년 12월 경기·충청도장로교 연합회 서기로 뽑혔고, 1912년 2월 전국주일학교연합회 집행위원회 부위원장직을 맡기도 하였다. 1912년 9월 1일 김규식은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평양)에 영문(英文)으로 보고하였다.

1913년 봄 김규식은 조선총독부 학무국으로부터 장학금과 도쿄 외국어대학교 영어교수직, 도쿄 제국대학 동양학과 장학생 특별 입학(入學)을 제의받았으나 거절하였고, 조선총독부는 다시 사람을 보내 도쿄 제국대학교 동양학과의 장학금을 제의하였으나 거절하였다.

김규식은 재혼 후 보름 만에 김탕, 여운홍 등의 대표단을 이끌고 가명으로 중국인 여권을 발급받아 신분을 위장한 뒤 상하이를 출발하였다. 프랑스로 떠나는 김규식의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상하이에 있던 신한청년당원들은 자신이 갖고 있던 푼돈을 모두 김규식에게 희사하고, 독립운동가들 중 결혼 예복과 반지가 있는 지사들은 이를 팔아서 돈을 희사하였다. 신한청년당원과 전파통신으로 교신, 신한청년당원들은 로비에 필요한 자금을 모금하여 송금해주었다. 김규식의 파리강화회의 파견은 3.1 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의 계기를 마련한다. 여권을 얻지 못하던 그는 중국 쑨원 정부에서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려던 중화민국 대표단 중 정육수를 만났다. 그는 중국어와 한자에도 유창하였는데, 그들이 한국인이며 파리행을 계획한 것을 알아본 정육수 등은 자신들의 배표를 김규식 일행에게 건네주었다.

출국 전 김규식은 신한청년당 당원들에게 다음과 같이 독립 시위를 벌일 것을 주문하였다. 김규식의 독립 시위 주문은 3·1 운동이 벌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파리 강화회담

1919년 3월 17일 노령 대한국민의회로부터 외무총장 겸 파리강화회의 강화대사에 선임되었다. 이어 1919년 4월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자, 4월 10일 부재중 상하이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4월 11일 파리 현지에 체류 중 외무총장에 선출되고, 파리 현지 주재위원으로 임명되었다. 4월 13일 상해 임정으로부터 외무총장 임명장과 파리강화회의 전권대사 신임장을 전보로 발송받았다. 4월 23일에는 한성임시정부의 학무총장에 선출되었다. 1919년 4월 1일 기호지방에서 설립되려다가 취소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의정부장관에 피선되었다. 1919년 4월 17일 평안북도에서 설립된 신한민국임시정부에서는 외무부 차장(次長)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파리에서 각지의 임시정부에서 보내온 임명장을 받거나 전보로 소식을 접하였다.

국내에서는 137명의 유림(儒林)들이 별도로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는 탄원서를 작성, 그에게 보내려다가 실패한 일이 있었다. 파리 장서사건의 실패로 일본의 감시는 더해갔다. 일본은 김규식 일행에 위협을 느꼈고, 일본 경찰의 감시와 탐문에도 계속해서 홍보책자 등을 인쇄하여 돌리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고, 일본의 부탁을 받은 프랑스 경찰들이 이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게 했다.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였고, 여러가지 외교문서를 계속 만들어서 프랑스 외무성에 보내고, 강화회의 의장이 프랑스 대통령 크레망스에게도 발송하였고 세계열강들 대표에게도 여러가지 문서, 한국의 독립을 촉구하는 내용,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는 그런 문서를 작성·발송하였다.


윌슨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기대를 하였고, 김규식도 1918년 윌슨 민족자결주의 원칙 발표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 파리강화회의 제1차 세계 대전의 종결과 함께 전범국 처리를 논의하던 것이었다. 각지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나 강화회의에서는 답을 주지 않았고, 1919년 7월 14일 김규식은 프랑스 대혁명 기념일 행사에 한국대표로 참석할 수 있도록 프랑스 외교부에다 초청장을 보내달라고 서신을 보냈으나, 응답은 행사끝난 다음에 왔다. 이때 심한 두통으로 눈이 안 보일 정도까지 갔다.

열강의 그 어느 국가나, 그 누구도 아무도 김규식 일행의 한국독립 청원을 호응해주지 않게되면서 김규식은 크게 실망하였고, 활동무대를 옮겨 8월 프랑스 파리에서 배를 타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8월 9일 김규식은 김복, 김탕, 여운홍, 장택상 등과 함께 뉴욕으로 향했다. 선실에서 김규식은 활동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 쉬지 않고 타이프를 쳤다 한다.

파리 강화회의 열강들의 외면에 실망과 회의감을 느낀 김규식은 파리위원부위원장직을 사직, 파리위원부를 부위원장 이관용(李灌龍)에게 넘기고 여운홍, 김탕, 장택상 등을 데리고 미국으로 건너와 필라델피아에 도착하였다. 배로 도미하는 동안, 만성 두통과 소화불량, 배멀미에 시달리면서도 수반 이승만에게 보고할 보고서를 타이프로 작성하였다. 8월 6일 김규식 일행은 워싱턴 D.C 한인위원회에 도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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