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존된 임금 환조 이자춘의 아들이자 고려왕조의 신흥무인세력이었던 이성계는 1388년 위화도 회군으로 군사정변을 일으켰다. 창왕·공양왕을 왕위에 강제로 올렸다가 신씨인 신돈의 아들이라고 사건을 조작시켜서 폐위시키는 등 정권·군권을 장악하고 전제 개혁을 단행하였으며, 경제적인 실권까지 장악했다. 1392년 7월(음력, 양력으로는 8월 5일공양왕이 왕대비에게 준 옥새를 이성계가 받아들고 주변 측근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다. 1393년 2월 15일에는 국명을 “조선”으로 정하였고, 1394년에는 한양을 도읍으로 하여 여러 개혁을 단행했다.

태종은 특권층이 소유하고 있는 개인 사병들을 강제 해체하고 조선의 군대에 편입시키고, 호패법을 실시하는 등 왕권을 크게 강화하고 임금 중심의 통치 체제를 정비하기 위해 관료 제도를 정비하였다. 세종은 학문·군사·과학·문화 등 모든 면에서 큰 업적을 이룩하였다. 이 당시에 과학이 크게 발전했다. 세조는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 정통성에 문제가 있자, 반발하는 세력을 무마하고 힘을 키우기 위해 태종처럼 신권을 제한하여 왕권이 강력하게 강화되었고, 동국통감,국조보감 등을 만들기도 했다. 성종은 개국 이후의 문물제도를 정비했다. 15세기 말부터 지방의 사림 세력이 정계에서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존 대신인 훈구와 신진 관료 세력인 사림이 대립하면서 정치는 혼란해졌으며, 이에 따른 전반적인 사회상이 혼탁해졌다. 선조 때에는 마침내 훈구파들이 정계에서 물러나고 사림들이 정계를 장악하게 되었다. 이후 사림들은 '붕당'을 형성하여 조선 정치의 꽃이자 역모 반란죄에 해당되는 붕당정치(朋黨政治)를 시행한다.


이어 16-17세기에 주변국인 일본, 청(후금)과 치른 전쟁(임진왜란병자호란)으로 인하여 국토는 황폐해지고, 국가 재정은 고갈되었으며, 백성은 도탄에 빠졌다. 이후 청나라에게 당한 수치를 씻자는 북벌론이 대두되었으나, 실천에 옮겨지지는 못했고, 청나라를 본받자는 북학론이 대두되었으나 조선의 임금 효종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뜨면서 청나라를 본받자는 북학론은 실행하지도 못하고 흐지부지 되었다.

조선 후기의 정치는 붕당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붕당은 학파적 성격과 정파적 성격을 모두 띈 일종의 정당으로, 각 붕당은 국가의 공론(여론)을 따름으로써 여당이 되려고 노력했다. 각 붕당은 학문적, 정치적으로 대립하였으나 상호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여 스스로 부패하는 것을 경계했다. 각 붕당은 지방의 서원을 통해 그들의 스승에 제사를 지내고 결속을 다졌는데, 이 서원의 교장 격인 '산림' 은 조선 중앙정부의 삼사 언관직 선비들과 함께 공론(여론)을 형성했다. 조선의 이와 같은 여론정치는 당대 동서를 막론하고 어느 나라에서도 보기 힘든 정치였다.

그러나 1680년의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권력을 잡은 뒤 균형이 무너져, 서인은 남인을 철저히 탄압하였다. 이어 서인에서 분열된 노론과 소론이 대립하였고, 그기야 정국이 급격하게 바뀌는 환국이 일어나면서 견제와 균형을 통한 상호 공존이라는 '붕당 정치의원칙'이 무너지고 특정한 붕당이 다른 정권의 붕당을 몰아내고 정권을 독점하는 일당 전제화의 경향을 띠면서 국왕이 사사로운 감정으로 정치에 개입이 되어 국정이 마비될 정도로 혼란스러웠고, 이 때문에 여러 붕당 간에 갈등과 오해로 서로 죽이고 또 죽이는 당쟁으로 인해 영조의 아들인 사도세자 이선이 뒤주 안에 갖혀 죽는 임오화변이 일어났다. 그래서 왕권이 신하들에 의해 약해지자 당쟁을 막기 위해 영조와 정조는 당파의 균형을 고려한 인재기용(탕평책)을 실천했다. 그러나 정조가 1800년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뜨자 노론세력이 독점하여 정국을 이끌었지만, 19세기의 순조·헌종·철종 등 3대에 걸친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등 외척 세력의 세도 정치가 60여 년 동안 계속되었다. 이들 외척가문은 왕위 임명에도 손을 대는 등 절대권력을 누렸다. 그리고 풍양 조씨의 가문의 대표였던 조대비가 흥선대원군과 결탁하여 흥선대원군의 둘째아들 명복(고종)을 조선 국왕 자리에 올린다.

그러나 그들의 예상과는 다르게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은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붕당의 근원인 서원을 철폐하고 외척 가문인 안동 김씨 세력들을 몰아낸다. 또한, 프랑스와 미국의 통상강요를 물리치고 통상수교 거부정책을 유지했다. 1873년 흥선대원군이 최익현의 탄핵으로 하야하고 친정을 하면서, 민씨 정권이 들어서자 마자 대외정책이 개방되었다. 1880년대에는 구식 군인의 차별대우에 따른 저항으로 임오군란이 일어났는가 하면, 개화정권을 수립하려는 시도인 갑신정변이 일어나기도 했다. 또한 무능한 개혁 정책은 조선을 근본적인 근대화로 이끌지 못했다.

1890년대에는 농민 수탈에 대한 저항으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고, 동학농민운동의 진압을 명분으로 조선에 들어온 청나라와 일본의 군대가 충돌하기도 했다. 1894년에는 친일적인 성격을 지닌 갑오개혁이 실행되었다. 한편 일본이 친러파인 명성황후를 없애고, 친일 내각 정권을 수립하기 위해 암살으로 조선의 국모를 살해하자, 고종은 1896년 몰래 아관파천을 감행하여 러시아 주한 공사관에 1년 동안 피신했다. 1897년 11월 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경운궁을 덕수궁으로 고쳐 쓰고, 원구단과 환구단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함으로써 조선이란 국호는 공식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황제의 국가인 대한제국의 국호로 사용하게 되어 지위가 격상되었다.


조선의 사대교린 정책

외교면에서는 명에 대해서는 사대정책을 썼다. 특히 국호를 정하는 일에서도 내부적으로 국호를 정했으나, 명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화령과 조선 중에서 승인을 받았던 일이 있다. 따라서 서로 사신의 내왕이 잦았으며, 이를 통하여 조공·회사 형식의 국가 간의 무역이 행해졌다.

조선의 국왕들은 명에 대한 사대 관계를 형성, 고려말부터 종주국으로 받들어오던 명에 형식적으로 제후, 속국의 예를 취했으나 이는 형식적인 것이었다. 1400년 이후 정식 국왕으로 책봉된 이후로도 조선의 역대 국왕들은 즉위 직후 명에 책봉 고명사를 파견하여 책봉 승인을 받아왔고, 국왕의 재위 중 왕후의 사망과 계비를 맞이할 때, 세자를 책봉할 때, 세자빈을 간택, 책봉할 때 역시 명에 책봉 고명사를 보내 승인을 받아온다.

조선에서는 매년 명나라에 진하사, 문안사, 동지사 등을 보냈고 태종 때부터 선조 때까지는 종계변무사를 파견했다. 개국 초기 정도전의 요동정벌 문제로 명나라는 조선의 국왕을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조선 국왕 책봉고명사신이 도착하면 권지고려국사 혹은 권지조선국사라는 임명장을 내려주었다. 조선 국왕을 정식 국왕으로 승인한 것은 1401년(태종 1년) 태종 때였다.

또 다른 주변 국가인 일본과 여진에게는 교린 정책을 취했다. 이 두 정책은 조선의 근본정책으로서 계속 계승되었다.

웨일스 영국을 구성하는 홈 네이션스 중 하나이며, 그레이트브리튼 섬 서부에 위치하며 동쪽으로 잉글랜드와 접하고 서쪽으로는 아일랜드 해에 접한다. 웨일스의 인구는 2011년 기준 3,063,456명이며 총 면적은 20,779 km²이다. 지리적으로 북온대 지대에 위치하여 변화무쌍한 해양성 기후를 보인다. 웨일스 해안길의 전체 길이는 1,200km가 넘고 웨일스 전역에는 산악지대가 널리 분포하며, 영국 중북부 지역에서 고도가 가장 높은 스노우돈 산이 위치하고 있다.

웨일스의 국가적 정체성은 5세기 경 로마인이 그레이트 브리튼 섬에서 철수한 이후 켈트계 브리튼인으로부터 수립되었으며 웨일스는 현대 켈트계 국가 중 하나로 간주된다. 1282년 르웰린 압 그리피드가 사망하면서 잉글랜드의 국왕 에드워드 1세가 웨일스를 정복하였고, 15세기 초 오와인 글린두르가 웨일스의 독립을 단기간 회복한 바 있다. 1536년 잉글랜드의 국왕 헨리 8세가 제정한 웨일스 법(1535-1542)에 의해 웨일스는 잉글랜드에 의해 영국으로 완전히 합병되었고 사법체계도 잉글랜드 중앙정부 치하에 통합되었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잉글랜드와 차별화된 웨일스의 정치가 발달하게 된다. 20세기 초, 로이드 조지 웨일스 진보주의를 제창하였고, 이는 사회주의의 신장과 노동당의 성장으로 이어진다. 웨일스인들의 국민적 감정이 1세기가 넘게 성장하며 1925년에는 웨일스당, 1962년에는 웨일스어 위원회가 창설된다. 1998년에는 웨일스 정부 법에 의해 웨일스 국회가 설립되어 현재 다양한 위임 책무에 대한 권한을 수행하고 있다.

산업 혁명 초기, 웨일스에서는 광업과 금속가공업이 발달하면서 농경사회에서 산업국가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남부 웨일스의 탄전 개발로 인해 인구가 급속하게 증가했다. 현재 전체 인구의 ⅔가 남부 웨일스에 분포하며 주민들은 주로 수도인 카디프, 스완지, 뉴포트 및 근접 산업 지구에 거주한다.

현재 웨일스의 채광 산업과 중공업은 몰락했거나 사양산업이며 웨일스 경제는 주로 공공 부문, 경공업, 서비스업, 관광업에 의존한다. 2010년 기준 웨일스의 총 부가가치(GVA)는 455억 파운드, 1인당 15,145 파운드이다. 이는 영국 전체 평균 수치의 74%로서, 북아일랜드를 제외하고 영국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다.

웨일스는 영국의 다른 지역과 정치적, 사회적 역사를 밀접하게 공유하고 있다. 웨일스는 공식적으로 이중 언어 체제이며 토착 언어는 웨일스어이고 공용어는 영어이다. 대부분의 주민이 영어를 주로 사용하지만 웨일스는 여전히 고유한 문화적 정체성을 보유하고 있다. 웨일스 내에는 560,000 명 이상이 웨일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이들은 주로 웨일스의 북부와 서부에 거주하며, 전세계적으로는 웨일스어를 구사하는 사람이 70만 명 정도가 있다.

19세기 후반부터는 노래, 춤, 시 낭송, 문학, 악기, 작곡, 뮤지컬, 연극 등을 겨루는 대회인 이스테드보드를 통해, 웨일스는 '노래의 나라'의 이미지로 널리 알려지게 된다. 이스테드보드는 1176년에 최초 대회가 개최되어 현재에 이르는 유구한 전통을 지니고 있다.

FIFA 월드컵, 럭비 월드컵, 영연방 경기 대회에서 웨일스는 독자적인 스포츠 팀을 보유하고 있으며, 특히 럭비는 웨일스 정체성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올림픽 경기에서는 영국의 다른 홈 네이션스와 마찬가지로 웨일스도 영국의 일부로 출전한다.


문화에 대해

전통적으로 웨일스인들은 매우 활발하고 경쾌한 사람들로 알려져 왔으며, 그들은 이웃과 어울려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즐겼다. 또한 하프 음악문화가 매우 발달했고 음유시인들은 웨일스어로 시를 썼다. 정기적으로 음유시인 경연대회가 개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웨일스 고유의 문화는 17세기 후반부터 잉글랜드의 문화가 유입되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사라졌다. 특히 18세기 초반에는 엄청난 속도로 웨일스의 전통문화가 퇴색되었다. 18세기 초반 웨일스어로 된 서적은 자취를 감추었고 하프 가락에 맞춰 노래하는 것은 저질스런 것으로 인식이 만연해졌다.

현대의 웨일스 문화는 18세기 초반 이후 잉글랜드 문화와 섞임에 따라 잉글랜드 문화와 큰 차이가 없어졌다.


잉글랜드 왕국  스코틀랜드 왕국은 따로 나뉜 주권자와 독립한 나라로서 그들 자신의 군주와 정치적인 구조를 가지며 9세기부터 존재해 왔다. 일단 웨일스 공국 1284년 러들랜 법(Statute of Rhuddlan)에 따라 잉글랜드 왕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603년부터 왕국연합(Union of the Crowns)이라는 동군연합 상태였던 잉글랜드(웨일스를 포함한)는 1707년 연합법(Acts of Union 1707)에서 스코틀랜드와 합병하였다. 이로써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의 형태로 정치적 연합이 이루어졌다.

1800년 연합법(Act of Union 1800)은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에 아일랜드 왕국을 병합시켰다. 당시 아일랜드는 리머릭 조약(Treaty of Limerick)에 따라 1541년부터 1691년까지 점차 잉글랜드의 지배를 받아 가던 상태였다. 그에 따라 1801년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이 성립하였다. 1922년 아일랜드 공화국 독립은 2년 전에 아일랜드 섬의 분할에 따른 결과며, 얼스터 지방(province)의 9개 (county) 가운데 6개 주가, 1927년에 현재 이름으로 바뀐 영국령으로 남겨졌다.

영국은 철학적이고 과학적인 정보 및 유력한 문학 연극의 전통을 가진 계몽시대의 중요한 국가였다. 그 다음 세기 내내 영국은 문학, 예술  과학에 획기적으로 공헌한 의회 민주주의와 같은 서양 사상의 발전에서 주역이 되었다. 초기 대영 제국의 부는 다른 강국처럼 역시 1750년 이후에 있었던 노예무역의 산업화를 포함한 식민 착취에 의해 그 일부는 생성되었다. 18세기 영국의 노예 매매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했던 영국 함대가 아프리카 노예를 아메리카 대륙으로 보내는 악명 높은 삼각무역의 일부였다. 그러나 19세기 초에 영국은 노예무역법을 만들어, 영원히 노예 무역을 금지하는 첫 번째 국가가 되었다. 영국은 미국 시카고, 클리블랜드, 디트로이트, 피츠버그, 필라델피아, 뉴욕, 볼티모어, 보스턴, 워싱턴 D.C., 애틀랜타 등을 차지했다가 18세기 말에 독립시켰다.

산업혁명 나폴레옹 전쟁에서 나폴레옹을 격파한 뒤에, 19세기 영국은 세계의 주요 국가 중 하나가 되었다. 대영 제국이 전성기일 때 영국의 영토는 지구의 약 4분의 1까지 커졌었고, 인구도 세계 인구의 약 4분의 1이었다. 이는 역사에서 가장 큰 인구와 영토였다. 당시 대영 제국은 그 영토가 지구 널리 퍼져있어서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일컬어졌다. 1910년대 후반에는 이라크까지 점령하였다.

19세기 내내 영국은 다당제의 출현과 투표권의 확장을 통해 부분적으로 의회 민주주의의 발달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과학 예술의 발달은 18세기에 이루어진 아이작 뉴턴 등의 업적을 계승하거나 부분적으로 더 오래된 문학의 전통에 영향을 받았다.

영국은 탁월한 강대국으로 남았고, 1921년에는 제1차 세계 대전 뒤에 국제 연맹 위임 통치령이 되었던 독일 제국과 오스만 제국의 식민지를 획득하여 최대로 넓어졌다.


전쟁에서 벗어난 뒤에 세계 최초로 거대한 국제 방송망인 BBC가 생겨났다. 영국의 노동 운동은 19세기 후반부터 확장해 왔고, 1924년 제1차 노동당 내각이 집권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때 영국은,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공화국, 인도를 포함한 영국 연방과 연합하여, 그리고 나중에는 연합국과 연합하여 나치 독일과 싸웠다. 전시 지도자 윈스턴 처칠과 그의 후임 클레먼트 애틀리(Clement Attlee)는 3대 강국의 한 축으로 전후 세계를 계획한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영국에 재정적인 타격을 주었다. 경제적으로 비싼 전시 대부금, 미국과 캐나다에서 1945년에 빌려준 대부금이 전후에 미국의 마셜 플랜 원조와 합쳐져서 영국은 복구되기 시작하였다.

영국은 1973년 이후로 유럽 경제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었고, 1992년에는 마스트리흐트 조약에 서명하여 12개국으로 이루어진 유럽 연합의 창립 멤버가 되었다. 오늘날 보수당 내각의 태도는 EU에서의 몇몇권리와 자격반환으로, 노동당 EU와의 통합으로 그리고 자유민주당은 현재 정책의 지지쪽으로 기우는 경향을 보였으나 현재는 브릭시트 투표로 인하여 탈퇴하였다.1945년에 영국은 세계 최초면서 가장 광범위한 의료 제도를 포함한 복지 국가의 출현을 알렸고, 정부 정책의 변화는 영국 연방 도처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다민족 국가로서의 영국을 만들 수 있게 하였다. 전후 영국의 정치적 역할의 한계가 1956년 수에즈 사태에서 보여졌지만, 영어의 국제적 통용과 1960년대 영국 대중 문화의 해외 전파는 영문학이나 영국 문화가 지속적인 영향을 주고 있음을 의미했다. 1970년대의 국제 경제의 하향세와 산업 쟁의의 시대에 뒤이어 1980년대는 북해 유전의 수익과 경제발전이 있었다. 마거릿 대처 수상의 지도력은 전후 정치적, 경제적 합의의 전환을 이끌었다. 이러한 경향이 1997년 부터 토니 블레어수상의 지도 아래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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