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1922년 12월 30일부터 1991년 12월 26일까지 유라시아 북부에 존재하였던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였다.

소련은 세계에서 가장 큰 국가였다. 소련의 영토 면적은 무려 22,402,200 km² 였다. 지구의 전체 육지 면적의 6분의 1을 덮는 이 면적은 북아메리카 전체에 비견할 만하였다. 유럽 부분은 영토의 4분의 1에 해당하였고, 이 부분은 소련의 문화적, 경제적 중심이었다. 동쪽의 영토는 태평양에, 남쪽으로는 아프가니스탄에 달하였다. 아시아 부분의 인구는 유럽 부분 보다 적었다. 소련의 영토는 동서로 1만 킬로미터에 11개의 시간대에 걸쳐 있었으며, 4개의 기후대(한대 기후, 냉대 기후, 온대 기후, 건조 기후)가 걸쳐 있었다.

소련의 국경은 세계에서 가장 길어 약 6만 킬로미터에 달하였는데, 이는 지구를 1바퀴 반 돌 수 있는 길이이다. 국경선의 길이 중 3분의 2는 해안선이 차지하고 있었다. 1945년부터 1991년까지 소련의 국경은 아프가니스탄, 중화인민공화국, 체코슬로바키아, 핀란드, 헝가리, 이란, 몽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노르웨이, 폴란드, 루마니아, 터키와 접하였다. 해상 국경으로는 베링 해협으로 미국 알래스카와 마주보고 있었으며 소야 해협을 두고 일본 홋카이도와 접해 있었으며, 북극해를 두고 덴마크 그린란드  캐나다와 접했다.[1]

1917년 3월에 일어난 러시아 2월 혁명 러시아 제국을 멸망시켰다. 혁명 이후 수립된 러시아 임시 정부는 1917년 11월에 일어난 10월 혁명으로 붕괴하였고 볼셰비키가 러시아의 정권을 잡았다.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백군이 반란을 일으켜 러시아 내전이 일어났지만 볼셰비키는 백군을 쳐부수고 내전에서 승리하였다. 1922년 12월 30일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자카프카스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통합되어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 탄생하였다.

소련의 초대 지도자 레닌 1924년 1월 21일에 사망하였고, 스탈린이 소련의 새로운 지도자가 되었다. 소련은 스탈린의 경제 정책과 강력한 정치 억압을 통하여 거대한 규모의 산업화를 이루어 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이던 1941년 6월 22일, 나치 독일이 불가침 조약을 파기하고 소련을 침공하여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전쟁인 독소 전쟁이 발발하였다. 소련은 1945년 5월 9일 대조국전쟁에서 승리하였고 1945년 8월 대일전에 참전하여 승리하여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승리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승리한 이후 소련은 미국과 함께 세계를 이끌어 가는 초강대국이 되었다.

소련과 중앙유럽 위성 국가들은 서방 세계에 맞서 냉전 체계를 구축하였다. 이로 인하여 미국과 소련을 비롯한 양측 동맹국 사이에서 갈등, 긴장, 경쟁 상태가 이어졌다. 1986년, 소련의 마지막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 페레스트로이카 글라스노스트를 통해 소련의 경제를 중흥시키려 하였다. 1991년 8월 공산당 보수파가 일으킨 쿠데타가 소련 국민들의 반발로 실패한 뒤 1991년 12월 26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사임하면서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라는 명칭은 소비에트 (러시아어: Совет)에서 나왔는데, 이는 러시아어로 '평의회' 또는 '노동자-농민 평의회'를 뜻한다. 노동자, 농민, 군인의 공동체 조직인 소비에트는 직접민주제, 간접민주제를 거부하고, 인민민주 상향식 선거를 통해 일당제 체제 하에서 평의회 대의원을 선출한다. 작게는 각 생산수단 및 소공동체에서부터 크게는 모스크바 최고 소비에트에 이르기까지 각 계층에 걸쳐 설치되어 있었다.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영향을 받은 이러한 체제는 블라디미르 레닌 스스로가 자신의 저서인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파리 코뮌의 형태와 러시아 특유의 소비에트 제도를 본따서 만든 제도라고 밝혔다. 이러한 체제가 카를 마르크스가 최초로 주장한 정통 마르크스주의와 조금 다른 점은, 마르크스-레닌주의 소비에트 제도의 경우 노동자, 농민, 혁명가들로 구성된 '혁명적 당'이 장기간 일당 독재를 한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정치 제도가 하나의 '정통적 체제'로 대변된다는 점에 있다.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원형은 '당'을 사회주의 혁명 이후 프롤레타리아 독재 시기에 생산 수단의 사회화를 진행하기 위한, 일종의 '민주적 폭력'을 실행하기 위한 체계화 된 조직으로 묘사했고, 이러한 사회주의 체제에서의 정당 독재는 공산주의 사회에 진입한 후 사라질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의 소비에트 제도는 공산당 일당 독재의 장기화했고 이러한 제도를 바탕으로 모든 공산주의적 정책을 실행했다. 학문적으로 보면 소련이 기준에 따라 민주주의에 들어갈 수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소련의 성립기와 말기를 제외하면 소련 공산당의 일당 독재 체제였다.



1933년 1월 아돌프 히틀러 독일의 정권을 잡았고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 독일 중앙유럽 일대를 독일인의 생활권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스탈린 중앙유럽 국가를 공산화하여 위성 국가로 두고 싶어 했는데, 소련과 독일은 결국 중앙유럽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충돌하게 된다. 1939년 8월 소련과 나치 독일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고, 그 해 9월 1일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소련도 9월 17일 폴란드를 침공하였고 독일과 소련은 폴란드의 영토를 점령하였다. 이어 소련은 1940년에는 핀란드의 영토를 빼앗았고 발트 3국까지 점령하였다. 그러나 1941년 6월 22일 나치 독일은 독소 불가침조약을 파기, 독일과 소련 사이에 전쟁(대조국전쟁)이 발발했다. 그 결과로써 소련은 연합국에 참전하게 되었다. 초기에는 독일군이 우세하여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 근처까지 진격했으나, 소련은 레닌그라드 포위전 스탈린그라드 전투, 쿠르스크 전투 등의 공방전에서 많은 희생자를 냈지만 승리했다. 쿠르스크 전투 이후 소련군은 전세를 역전시켜 끝내 1945년 4월 30일 나치 독일의 수도 베를린 함락시키고 독일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 소련은 동부 독일을 점령했고 서부 독일을 점령한 프랑스, 영국, 미국과 독일을 분할하여 관리하기로 하였다. 1945년 8월 8일에는 얄타 회담의 협정에 근거해 소-일 불가침조약을 파기, 일본 제국 선전포고를 하여 일본과 전쟁을 해 승리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승리한 소련은 만주국 및 38도선 이북의 한반도를 점령하였고, 외몽골과 사할린을 얻을 수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은 전후 소련 정부의 국가 지도 방향을 결정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소련 정부는 많은 공산주의자들이 부르주아적 사상이라고 평가했던 애국주의 민족주의를 강조하면서 소련인을 하나로 단결시켰다.[3] 그리고 기존에 국교로서 인정하지 않았던 러시아 정교회의 지위를 회복시켰고, 소련군의 명칭을 붉은 군대에서 소비에트군으로, 국가를 국제공산당가인 인터내셔널가에서 소련 찬가로 바꾸면서, "프롤레타리아에게는 조국이 없다."는 공산주의의 기본 이념을 깨뜨렸다.



한국 전쟁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한민국을 침공하여 발발한 전쟁이다. 유엔군 중국인민지원군 등이 참전하여 제3차 세계 대전으로 비화될 뻔 하였으나, 1953년 7월 27일에 체결된 한국휴전협정에 따라 일단락되었다. 휴전 이후로도 현재까지 양측의 유무형적 갈등은 지속되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공산·반공 양강 진영으로 대립하게 된 세계의 냉전적 갈등이 열전으로 폭발한 대표적 사례로, 냉전(冷戰)인 동시에 실전(實戰)이었으며, 국부전(局部戰)인 동시에 전면전(全面戰)이라는 복잡한 성격을 가졌다. 이는 국제연합군과 의료진을 비롯해 중화인민공화국 소련까지 관여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최대의 국제전이다.

미리 중화인민공화국 마오쩌둥 소비에트 연방 스탈린의 협조와 지지를 얻은 김일성 남로당의 대한민국 내 활동과 우방인 소련의 지지에 고무되어 1950년 6월 25일 38도선과 동해안 연선(沿線) 등 11개소에서 경계를 넘어 38선 이남으로 진격하였다. 이는 때마침 냉전으로 긴장되어 있는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친 바, 파문은 참으로 전에 없던 것이었다. 조선인민군의 대공세에 유엔 미국을 주축으로 바로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 제82호를 의결하고 이 전쟁에서 한국을 원조하기로 결정하고 파병하였다. 하여 7월 7일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유엔군이 조직되었다. 인민군은 무방비 상태였던 중부지방과 호남지방을 삽시간에 휩쓸었다. 연합군은 낙동강방어선에서 배수진의 결전을 전개하였다.

연합군은 더글러스 맥아더 인천 상륙 작전을 시작으로 대대적인 반격을 개시하여 평양에 이어 압록강 부근까지 이르렀으나, 중국인민지원군이 개입하여 전세가 다시 뒤집히게 되었으며, 그 와중에 남로당의 남한 내부 전복을 위한 활동과 이를 제압하려는 대한민국 정부의 충돌로 거창 양민학살 사건, 국민 방위군 사건 등의 사건이 일어났다. 이후 3년 간 지속된 전투로 수많은 군인 및 민간인이 사상하였고, 대부분의 산업 시설들이 파괴되는 등 양측 모두가 큰 피해를 입었으며, 이념적인 이유로 민간인들의 학살이 자행되고 지주들의 처벌과 그 보복이 반복되면서 남·북 간의 적대적인 골이 깊어지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1953년 7월 27일에 체결된 한국휴전협정으로 인하여 설정된 한반도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휴전하였다. 현재까지 서류상으로 휴전 상태로, 협정의 체결 이후에도 쌍방 간에 크고 작은 군사적 분쟁이 발생하고 있다.

1945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5년 전, 일본으로부터 해방을 맞은 한반도는 해방 직후 타의에 의해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다. 미국 소련의 군정이 끝나고 한반도에는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북한은 소련과 중화인민공화국을 설득하여 한반도를 적화 통일하려는 계획을 수립하고 준비를 해 나갔다. 소련은 소련군이 한반도 38선 이북에 진주한 이래, 아시아 공산화를 목적으로 북한에 소련을 대리할 수 있는 공산정권을 세우고, 한반도의 통일을 방해하면서 침략의 기회를 엿보아 왔다.중국 공산당은 1949년에 중화민국을 대륙에서 몰아내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하였다. 반면에, 미국은 주한미군이 철수를 완료(1949년 6월) 하고, 미국의 극동방위선이 타이완의 동쪽 즉, 일본 오키나와와 필리핀을 연결하는 선이라고 선언(애치슨 선언, 1950년 1월) 을 하는 등 대한민국에 대한 군사원조를 최소화해 나갔다. 이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지 얼마되지 않은 시기였기에, 미국은 소련 공산권과의 직접적인 군사 충돌이 제3차 세계대전을 야기할 수도 있다는 국제적인 정세를 고려하였으며, 소련 역시 그러한 이유로 북한에 대한 공개적인 지원을 중단하였다. 그러나 국내적으로는 정치 혼란 속에 이승만은 북진통일론을 주장하였고, 38도선 주변에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분쟁도 간헐적으로 벌어졌다.

북한군 상황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에서 한국전쟁은 김일성 박헌영의 주도로 이루어졌으며, 김책, 김무정도 적극적으로 찬성하였다. 리승엽 등 남로당 계열의 인사들도 찬성하였고, 군사지도자들인 강건, 김웅, 김광협, 방호산, 이권무, 김창덕, 유경수 등은 남쪽과의 일전을 고대하였고 승리를 확신하였다. 이에 비해 최용건은 적극적으로 반대하였고, 김두봉, 홍명희, 장시우 등은 반대 또는 소극적 찬성을 하였다. 김일성은 수 차례 소련의 지배자인 스탈린 중화인민공화국의 통치자인 마오쩌둥을 만나 무려 48회나 남침 허락 내지는 전쟁 지원을 요청하였다. 공개된 구 소련의 문서에 의하면 애초에 스탈린은 북한군이 절대적 우위를 확보하지 못하는 한 공격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인민군의 실력이 미국과 대한민국을 상대로 아직은 단독으로 전쟁을 치를 만한 실력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미국과의 직접적 마찰을 두려워하여 무력 행사를 기피하였다. 그럼에도 김일성은 수 차례 스탈린을 설득하였고, 일부 역사 연구자들이 옛 소련의 문서들을 근거로 주장하는 이론에 의하면, 스탈린은 미국을 시험하고 미국의 관심을 유럽에서 아시아로 돌리기 위해 중화인민공화국이 전쟁에 대한 원조를 북한에 하는 조건으로 김일성의 남침을 승낙하게 된다. 이리하여 스탈린은 북한에 강력한 군사적 원조로서, 소련의 무기들을 대량으로 북한으로 제공하였다.

김일성 조선로동당의 일당독재를 기반으로 반대파(민족주의자, 종교인 특히 북한 수립 이전 융성하던 개신교, 지주, 마름, 기업가, 기술자 등을 포함한 상당수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에 대한 철저한 숙청을 통하여 자국 내 정치적 입지를 강하게 다지고 있었다. 또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최고인민회의 간부회의를 통하여 통일을 위하여 점령군의 즉각적인 철수를 요구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둔 소련군은 1948년 12월 시베리아로 철수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소련 정부는 모스크바에서 비밀리에 군수뇌회담을 개최하여 철군이후의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하고 '특별군사사절단'을 통해서 집행하기로 하였다. 이 회의에는 김일성 등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고위 군부 대표도 참석하였다. 모스크바 계획이라고 불리는 전쟁준비 계획은 만주에 있던 조선인 의용군 부대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귀국시켜 5개 사단을 갖게 하고 이외에 8개의 전방사단과 우수한 장비를 보유한 8개의 예비사단, 그리고 500대의 탱크를 보유하는 2개의 기갑사단을 갖게 하는 것이었다.

1949년 2월 스탈린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 후 처음으로 김일성 박헌영을 모스크바로 불러 소련군의 철수로 인한 군사력 공백과 한반도 정세를 논의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뇌부는 방문 기간인 3월 17일에 유럽에서 일반적으로 체결하던 '우호 방위조약'이 아닌 '조·소 경제·문화협정'을 체결하였다. 이는 앞선 미군 철수 발표에 대한 소련의 대응으로 앞으로 있을 한국전쟁의 책임을 모면하기 위한 계획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러한 이유로 한국 전쟁 당시 소련은 공개적으로 북한을 돕지 않는다고 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을 통해 전쟁 물자 공급을 지속한다.

1949년 8월 12일, 김일성 박헌영은 대한민국이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의 평화적 통일안을 거부하고 있으므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대남공격을 준비할 수밖에 없으며 그렇게 되면 대한민국에서는 이승만 정권에 대한 대규모 민중봉기가 분명히 뒤따를 것이라고 언급했다. 김일성과 박헌영은 만약 대남공격을 하지 않는다면 인민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들은, 이승만 대통령이 많은 친북 ‘민족인사’들을 투옥시켰지만 북한은 아직도 대한민국에서의 봉기를 조직할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는 1949년 남조선로동당 등의 대한민국 내부의 공산주의자들이 반공정권이었던 이승만 정권의 공산주의 탄압에 의해 대대적으로 검거되었다는 것을 대한민국에서 온 공산주의자들의 허위보고로 생각한 까닭이었다.1949년 8월 27일, 북한 주재 소련 대사 스티코프는 8월 12~14일의 김일성과의 면담내용을 스탈린에게 보고하고 다음과 같은 이유로 북한의 대남공격이 불가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1. 현재 한반도에는 두 나라가 존재하며 그중 대한민국은 미국 및 기타 국가에 의해 승인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격시 미국은 대한민국을 무기탄약 공급뿐 아니라 일본군의 파견을 통해 지원할 가능성이 있음. 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남공격은 미국이 대소련 모함∙선전에 이용할 수 있음. 3. 정치적 측면에서 북의 공격은 남북한 인민 대다수의 지지를 얻을 수 있으나 군사적 측면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아직 대한민국에 대해 압도적 군사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음. 4. 대한민국은 이미 상당수 강한 군대와 경찰력을 창설하였음에도 소련의 지원하에 있는 조선인민군에 비하여 약세에 있었다.(스티코프는 김일성이 제의한 강원도 지역의 '해방구역' 창설계획에는 찬성하고 또한 인민군에 의한 옹진점령계획도 군사적으로 타당하다고 보고했으나 남한의 반격시 이 작전이 지구전이 돼버릴 수 있다고 언급)  스탈린에게 제출한 9월 15일자 보고서에서, 스티코프는 “김일성 박헌영은 현 정세하에서는 평화통일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북이 남한 정부를 무력공격하면 남북양쪽의 인민들이 이를 지지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리고 지금 무력통일을 안하면 통일이 연기될 뿐이고 그동안 남한 정권은 좌익세력을 탄압하면서 북진할 수 있는 강력한 군대를 만들어 통일은 물거품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김일성은 남진을 시작할 때 소련과 중공이 원조해줄 것을 기대하는 듯하다.”고 썼다. 그의 견해는 남북의 내전은 북에 유리하나 북한군이 남한 공격을 개시하면 소련이 국제적 비난을 받게 되며 미국이 끼어들 것은 물론 남한을 적극 지원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또, 물론 북한이 남한에서 빨치산 활동을 강화하는 것은 좋다. 옹진작전은 유리한 상황하에서는 실시 가능하고, 이를 위해 38선 지역에서 남쪽의 도발을 이용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소련 공산당 정치국 중앙위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남침이 시기적으로 적절하지 못하다는 지시문을 스티코프를 경유하여, 김일성에게 전달하였다.(1949년 9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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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버워치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가 개발하고 배급하는 다중 사용자 1인칭 슈팅 게임이다. 2016년 5월 24일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플레이스테이션 4, 엑스박스 원으로 출시하였고, Wii U 출시할 예정이다.

오버워치에서 플레이어는 각 여섯 명으로 구성된 두 팀 중 하나에 속하며, 각 플레이어는 특별한 능력과 기술을 가진 다수의 특정한 영웅 캐릭터 중 한 명을 고른다. 이 영웅들은 공격, 수비, 돌격, 지원의 네 역할로 나뉜다. 플레이어들은 함께 협동하여 전장의 거점을 차지하기 위해 싸우거나, 전장을 가로지르는 화물을 제한 시간 안에 목표 지점까지 호위한다. 플레이어들은 경기를 계속 플레이하면 캐릭터 스킨과 승리 포즈와 같이 게임플레이에 영향을 주지 않는 외관 보상을 얻는다. 블리자드가 출시 한 달 후 경쟁전 플레이를 추가했지만, 이 게임은 근본적으로 캐주얼 플레이를 지향한다. 블리자드는 모든 오버워치 업데이트는 무료로 진행될 것이며, 플레이어가 부가 요금을 내는 경우는 오직 추가적인 외관 보상을 구입할 때 뿐이라고 발표했다.

오버워치는 블리자드의 네 번째 프랜차이즈로, 2014년 다중 접속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 《타이탄》의 개발이 취소되면서 만들어졌다. 타이탄 팀의 일부는 팀 포트리스와 같은 팀 기반의 1인칭 슈팅과 멀티플레이어 온라인 배틀 아레나의 높아지는 인기, 팀워크를 강조하는 영웅 기반의 슈터 창작을 기반으로 오버워치의 컨셉을 구상하였다. 오버워치의 일부 요소들은 취소된 타이탄 프로젝트의 설정과 구상들을 빌려왔다. 세계적 위기 이후 가까운 미래의 낙관적인 지구 설정의 이야기를 정립시킨 이후, 개발자들은 이 설정의 일부로 폭넓은 성별과 인종을 가진 다양한 영웅을 제작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캐릭터 간의 밸런스를 조정하는 것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새로운 플레이어가 계속해서 재미를 느낄 수 있도록 만든 한편, 숙련된 플레이어는 비슷한 실력을 가진 플레이어에게 힘겨운 도전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오버워치는 2014년 블리즈컨에서 완전히 플레이 가능한 상태로 공개되었으며, 2015년 후반부터 2016년 초반까지 클로즈 베타를 진행했다. 2016년 5월 오픈 베타에는 970만 명 이상의 플레이어가 참여하였다. 게임의 출시는 줄거리와 각 캐릭터를 소개하는 단편 애니메이션 영상을 통해 홍보하였다. 공식 출시 이후, 오버워치는 비평가들로부터 전반적인 호평을 받았으며, 특히 게임의 접근성과 재미있는 게임플레이에서 좋은 점수를 받았다.


오버워치는 각각 여섯 명의 플레이어로 구성된 두 팀 간의 분대 단위 전투를 기본으로 한다. 플레이어는 저마다의 독특한 능력과 역할을 가진 영웅 캐릭터 중 한 명을 선택한다. 캐릭터의 역할은 총 네 가지다. 공격 영웅들은 빠른 속도와 공격을 가졌으나 방어가 낮으며, 수비 영웅들은 조임목에서 적의 돌격을 막고, 돌격 영웅은 적의 공격을 견뎌내는 방어구와 생명력을 갖추고 팀의 공격을 주도하며, 지원 영웅은 아군과 적군 각각에 대한 강화와 약화(치료나 속도 변화 등)를 부여한다. 경기에 들어가기 전 영웅 선택 화면에서, 팀의 플레이어는 수비 영웅이 부족할 때처럼 팀의 밸런스가 맞지 않을 경우 조언을 받으며, 플레이어는 경기 전에 다른 영웅으로 변경하여 밸런스를 맞춘 뒤 팀을 시작할 수 있다. 경기 도중에 플레이어는 캐릭터가 죽거나 본진으로 돌아가면 다른 영웅으로 변경할 수 있으며, 게임의 전체적인 설계에서 이를 권장하고 있다.

각 영웅은 주요한 공격이나 기술을 가지고 있고,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는 적어도 두 가지의 추가 기술을 가지고 있으며, 대다수는 재사용 대기시간이 있어 일정 시간이 지나야 다시 사용할 수 있다. 더 나아가, 각 플레이어는 천천히 쌓이는 게이지를 모두 채우면 캐릭터의 궁극기를 한 번 사용할 수 있다. 이 계량기는 시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차오르나 적을 공격하거나 팀에게 이로운 활동을 수행할 경우 더 빠르게 채울 수 있다. 한 번 준비가 되면, 플레이어는 이 기술을 어느 때든지 사용할 수 있다. 기술은 몇 초동안 지속되는 방식(공격력이나 방어력 상승 등)이거나 강력한 단일 행동(가까이 있는 팀원을 부활)이며, 사용 후에는 게이지가 다시 찰 때까지 기다려야만 한다. 상대 플레이어는 궁극기를 사용하는 캐릭터의 대사를 통해 궁극기 사용을 경고 받게 된다. 예를 들어, 총잡이 맥크리는 플레이어가 시야의 모든 적을 대상으로 치명적인 대미지를 입히는 궁극기를 사용하면서 "석양이 진다" 라는 대사를 하게 되는데 이 대사를 들으면서 궁극기를 무력화하거나 응수할 수 있는 잠깐의 기회를 가지게 된다.

두 번째 계량기는 플레이어가 처치나 처치를 도울 때, 방어나 치료를 할 때, 임무에 기여할 때 득점하는 포인트이다. 일정량에 도달하면, 플레이어 캐릭터의 아이콘이 불타는 상태가 되며, 캐릭터가 위협적인 상태임을 보여주나, 그밖에 게임플레이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

각 경기가 끝나면, 게임 서버가 짧은 시간에 많은 적을 죽이거나 효과적으로 팀을 치료했을 때와 같이 고득점의 플레이를 한 특정 유저의 하이라이트 장면을 결정하고, 이것을 "최고의 플레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플레이어가 짧은 시간동안 영상으로 감상한다. 각 팀에서 가장 뛰어난 활약을 펼친 네 명의 플레이어가 표시되고, 플레이어는 그 중 한 명에게 투표한 뒤 경기를 평가한다. 이전 게임에서 "최고의 플레이"를 달성하거나 가장 많은 투표를 받으면 다음 게임을 위한 경험치를 받게 된다.

플레이어는 경기에서 승리했는가 패배했는가, 캐릭터의 주요 능력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사용했는가, 많은 범주의 개인 달성 기록 등 몇가지 요소를 바탕으로 경험 레벨을 쌓을 수 있는 경험치를 얻는다. 경험치는 게임의 빠른 대전 모드와 경쟁전 모드, 아케이드 모드에서 플레이했을 때만 얻을 수 있으며, 사용자 지정 게임에서는 불가능하다. 경험 레벨을 쌓으면, 플레이어는 특정 영웅 전용의 승리 포즈, 페인트 스프레이, 스킨, 음성 대사와 같은 많은 외관용 수집품이 들어있는 수집품 상자를 얻을 수 있다. 이 상자에서 게임 화폐인 크레딧도 얻을 수 있으며, 크레딧을 사용해 특정한 외관용 수집품을 직접 구입할 수 있다. 중복되는 아이템이 보상으로 나오면 크레딧을 함께 얻는다. 플레이어는 실제 세계의 화폐를 사용해 직접 수집품 상자를 구입할 수도 있다.

게임의 전장은 실제 세계의 장소에서 영감을 받았는데, 처음에 공개된 세 전장("왕의 길", "하나무라", "아누비스 신전")은 각각 런던, 일본, 고대 이집트 유적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게임모드

오버워치의 게임 방법으로는 컴퓨터가 조종하는 적들과 싸우는 튜토리얼과 훈련장, 다른 플레이어와 함께 인공지능과 싸우는 인공지능 상대, 플레이어끼리 전투가 펼쳐지는 빠른 대전, 주간 난투, 사용자 지정 게임, 경쟁전이 있다.

빠른 대전은 플레이어가 혼자 또는 같은 그룹에 있는 친구와 함께 무작위로 선택된 다른 상대와 경기를 벌인다. 이 모드에서는 게임 서버가 레벨을 바탕으로 팀과 상대를 찾으며, 상대할 플레이어를 찾는 시간이 길어지면 검색 범위가 넓어지게 된다그리고 빠른대전 또한 영웅 선택이 중복이 돼지 않는다 블리자드는 이 대전 상대 찾기 시스템이 비슷한 실력을 가진 사람을 확실하게 찾아 경기할 수 있도록 조정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를 위해, 블리자드는 2016년 6월 플레이어가 특정한 상대를 피할 수 있는 설정을 제거했는데, 이 설정은 훼방을 놓는 사람을 피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지만, 숙련된 플레이어가 기피 목록에 올라가 그들이 자신과 맞는 경기를 찾기 어렵거나 실력이 낮은 플레이어와 경기하는 문제점이 있었다.

주간 난투는 하스스톤: 워크래프트의 영웅들의 선술집 난투에서 영감을 받은 모드이다. 이 경기는 플레이어가 특정한 영웅, 또는 특정한 역할의 영웅만 고를 수 있거나, 부활할 때 무작위로 영웅이 바뀌는 등 독특한 규칙을 특징으로 가지며, 모드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난투 규칙이 주 단위로 바뀐다.

기간 한정 행사의 일부가 되기도 하는데, 2016년 하계 올림픽동안에는 3대3 축구 형태의 경기가 추가되었다. 2106 크리스마스 이벤트때에는 메이의 신나는 눈사움 대작전이 추가되었고 또한 2017 닭의 해 신년 이벤트 동안에는 아케이드 모드에 깃발 뺏기 모드가 추가되었다.

사용자 지정 게임은 플레이어가 경기 시간, 전장, 영웅 선택 제한, 재사용 대기시간 조정 등 다양한 설정을 조정하여 공개 또는 비공개로 경기를 진행할 수 있다. 플레이어는 빠른 대전, 경쟁전, 주간 난투와 다르게 사용자 지정 게임을 통해서는 어떠한 경험치도 얻을 수 없다.

아케이드 모드는 1대1, 3대3, 6대6(영웅 중복 가능), 주간난투 로 이루어져있는 모드 모음집이다. 주간난투에서는 그동안의 난투들중 랜덤으로 플레이할 수 있다.(이벤트 기간중 한정 난투 제외)


스토리

오버워치의 배경 이야기는 단편 애니메이션과 블리자드가 게임 홍보를 위해 배포한 다른 미디어를 통해 설명되고 있다.

오버워치는 지금으로부터 60년 후, 30년 전의 '옴닉 사태'가 해결된 후인 가상의 미래 지구를 배경으로 한다. 옴닉 사태 이전에 인류는 과학 기술 발전과 번영으로 황금기를 맞이했다. 인간은 인공지능을 가진 로봇 '옴닉'을 개발하고, 그들을 전세계에 자동화된 '옴니움'으로 생산하며, 이들을 이용해 경제적 평등을 이룩했다. 옴닉 사태는 옴니움이 인류를 상대로 일련의 살상 로봇을 생산하면서 시작되었다. 국제 연합은 옴닉의 위협에 대항하고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국제 특수기동 부대인 '오버워치'를 결성하였다.

두 명의 노련한 유전자 강화 군인인 가브리엘 레예스와 잭 모리슨이 오버워치를 책임지게 되었다. 오버워치는 로봇들의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하고 재능이 있는 많은 사람들을 중요한 위치로 끌어올렸지만, 레예스와 모리슨 간의 불화가 발생하게 되고, 모리슨은 사실상 오버워치의 수장이 된 반면 레예스는 오버워치가 공개적으로 수행할 수 없을 만큼 더러운 비밀 작전을 수행하는 블랙워치를 떠맡게 되었다. 오버워치는 '오버워치 세대'라고 부르는 몇 십년간 세계를 종횡무진하며 평화를 유지하였으나, 모리슨과 레예스의 불화는 더욱 깊어만 갔다. 범죄와 실패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오버워치로 향하고, 오버워치에 대한 대중의 강력한 항의와 요원들 간의 내전이 발생함에 따라, 유엔은 즉시 상황에 대한 조사에 착수하였다. 이때, 오버워치의 본부가 폭발로 파괴되고, 이로 인해 모리슨과 레예스가 사망한 것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유엔은 오버워치를 해체하고 그들의 활동을 금하는 페트라스 법을 통과시킨다.

오버워치의 본격적인 배경은 페트라스 법이 시행된 몇 년 후이다. 오버워치가 사라지자, 기업들이 역할을 이어받기 시작했다. 싸움과 테러가 세계 곳곳에서 발생했고, 러시아에서 제2의 옴닉 사태의 신호가 나타났다. 그리고, 런던 '왕의 길'에서 옴닉 수도사가 범죄 조직 탈론의 암살자 위도우메이커에게 암살당하고, 이 사태로 인해 윈스턴은 오버워치 재결성을 결정한다. 오버워치의 옛 요원들은 페트라스 법에도 불구하고 오버워치로 다시 모이기로 결심하여, 오랜 친구들을 소집하고 새로운 동맹을 모아 싸움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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