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시아 또는 말련 동남아시아에 있는 연방제 입헌 군주국이다. 말레이시아는 13개의 주와 3개의 연방 직할구로 구성되어 있고, 남중국해로 나뉜 말레이 반도 지역과 보르네오 섬 지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타이, 인도네시아, 브루나이와 국경을 맞대고 있고, 해상국경은 싱가포르 베트남, 필리핀과 맞대고 있다. 수도는 쿠알라룸푸르이지만, 연방정부는 푸트라자야에 있다.

말레이시아의 역사는 18세기부터 대영 제국의 식민지가 된 말레이 왕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처음 영국의 식민지가 된 곳은 해협식민지로 불리었고, 다른 곳들은 보호령이 되었다. 1946년 말레이 반도의 주들이 연합하여 말라야 연합을 세웠고, 1948년 연합을 재편성하여 말라야 연방이 설립되었다. 1957년 8월 31일 영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을 하게 되었으며, 1963년 9월 16일 말라야 연방 사바, 사라왁, 싱가포르와 연합하면서 Malaya란 이름에 si를 추가해 Malaysia가 되었다. 그러나 2년도 채 지나지 않은 1965년, 싱가포르는 정부와의 마찰로 연방에서 탈퇴하게 되었다. 말레이시아는 독립 이후 아시아에서 최고의 경제적인 기록을 가지고 있는데, 거의 50년동안의 GDP 성장률이 평균 6.5%라는 것이다. 말레이시아의 경제는 전통적으로 천연 자원에 거의 의존하고 있었으나, 최근에 과학, 관광, 무역, 의료관광 등의 산업이 성장하고 있다.

말레이시아는 입헌군주국이며, 국가 원수는 군주로, 9개 주가 5년에 한 번씩(단, 궐위가 있을 경우에는 예외) 술탄이 임명한다. 군주의 칭호는 양디-퍼르투안 아공이며, 지금 군주는 무하마드 5세이다. 정부의 장은 수상이다. 정부체제는 웨스트민스터 체제에 가깝고, 법체계는 영국의 법에 기초한다. 말레이시아는 민족과 문화가 다양하고 그 다양성이 정치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국교 이슬람교이지만, 헌법상 종교의 자유는 인정되고 있다.

말레이시아에는 유라시아의 최남단 지역인 탄중피아이가 있고 적도 근처에 위치하고 있어 열대 기후의 국가이다. 다양한 동식물군이 있어 생물 다양성이 큰 국가이다. ASEAN, 이슬람 회의 기구의 창립멤버이며, APEC, 영국연방, 비동맹 운동의 회원국이다.

2013년을 기점으로 말레이시아의 구매력 평가는 1인당 $17,674로 평가되었다.


식민지 이전

약 4만년 전 지금의 말레이시아 땅에 인류의 거주지들이 형성된 기록이 있다. 이는 말레이시아가 고로 신생국가가 아님을 증명한다. 현재 서말레이시아에 해당되는 말레이 반도의 첫 정착민은 검은 피부를 가진 네그리토로 추정된다. 기원후 시대 초기 인도양과 남중국해 사이의 말레이 반도는 동서양 무역상 및 여행객들의 장소였는데, 2~3세기경 그들은 이곳에 무역항과 해안 마을을 건설했다. 그 결과 인도 및 중국 문화가 현지 문화에 강한 영향을 끼쳤고, 사람들은 이들로부터 유입된 힌두교와 불교를 믿기 시작했다. 4~5세기경 산스크리트어로 된 것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2세기 무렵 말레이 반도 북부의 랑카수카 왕국이 번창하기 시작했으며 15세기까지 존속했다. 7~13세기 말레이 반도 남부 해안 지역은 스리비자야 제국의 일부였다. 스리비자야 제국의 멸망 이후 등장한 마자파힛 제국은 말레이 반도와 말레이 제도 일대에 큰 영향력을 끼쳤다. 14세기 무렵 아랍 상인들이 이슬람교를 소개하면서 전국적으로 퍼지기 시작했고, 이것이 말레이시아가 이슬람 국가가 되는 시초가 되었다. 15세기 초 구 스리비자야 제국의 왕자였던 파라메스와라가 지금의 말라카 지역에 말레이 반도 최초의 독립 국가로 간주되는 말라카 술탄국을 건설했다. 지리적, 경제적, 군사적으로 말라카는 당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으며, 국제적인 무역항으로써 매우 크게 번영했다.

하지만 이 번영의 말라카도 1511년 포르투갈의 침공과 함께 몰락했다. 포르투갈이 침공한 궁극적인 목표는 경제권을 확장하는 한편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말라카 주민들은 포르투갈의 통치에 강력하게 저항했으며, 1641년 이 지역을 노린 네덜란드의 침공으로 포르투갈의 지배도 끝이 났다. 이어 네덜란드의 지배가 시작되었으나, 1786년 크다의 술탄이 피낭을 영국령 동인도 회사에 양도하면서 대영제국의 지배가 시작되었다. 영국은 1819년 싱가포르를 획득했고, 이후 기존에 말라야를 지배하던 네덜란드와 마찰이 발생하자 1824년 영국-네덜란드 협정을 맺어 세력범위를 확정했다. 이 협정에 따라 영국은 싱가포르를 중심으로 해서 북부는 영국이, 남부는 네덜란드가 지배하도록 했는데 말라카는 영국이 가져가는 대신 자신들이 지배하던 벤쿨렌(방카훌루)을 네덜란드에 양도했다. 이후 영국의 세력범위는 영국령 말라야라 하여 오늘날의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가 되었고 네덜란드의 세력범위는 네덜란드령 인도라 하여 오늘날의 인도네시아가 되었다.

1826년 영국은 피낭, 말라카, 싱가포르, 라부안을 직접적으로 지배하기 시작했는데 이 지역에 직할식민지의 일종인 해협 식민지를 건설했다. 20세기 무렵 파항, 슬랑오르, 페락, 느그리슴빌란으로 구성된 연합 말레이 주에 영국이 눌러앉기 시작했는데 각 주의 말레이 지도자들이 자신들과의 협정을 거부할 것이 확실해지자 그들을 조언해 영국 지도부를 임명하게 했다. 나머지 5개 주는 비연합 말레이 주라 하여 영국이 직접 통치하지 않았는데 20세기 영국인 조언자가 있게끔 전환되었다. 19세기까지 말레이 반도와 보르네오의 발전은 대개 큰 관련이 없었다. 영국은 지배 기간 동안 중국과 인도에서 수입된 노동자들의 이민을 장려했다.

현재 사바 주에 해당되는 지역은 1877년부터 1878년 사이 브루나이와 술루의 술탄이 통치권을 영국에 양도하면서 영국령 북보르네오가 되었다. 지금의 사라왁 주에 해당되는 지역은 영국 모험가인 제임스 브룩(James Brooke)이 1842년 브루나이 술탄으로부터 양도받은 뒤 사라왁 왕국이 되었으며, 1946년 직할식민지로 개편될 때까지 백인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이 말라야, 북보르네오, 사라왁, 싱가포르를 점령했으며, 1945년 항복할 때까지 3년간 통치했다. 비록 3년으로 말레이시아를 지배한 그 어떠한 나라보다도 짧게 통치했지만, 더 잔인했으며, 특히 중국에 대한 반감을 갖고 있던 일본은 이 지역의 중국인들까지 무자비하게 살해했다. 중국인뿐 아니라 청년들은 태국을 거쳐 미얀마까지 이어지는 철로를 건설하는 데 동원되었는데, 많은 이들이 막노동에 영양 실조 등으로 희생되어 이 철로는 '죽음의 철로'라고 불리게 되었다. 또한 교육을 제대로 실시하지 않았으며 식량이 제대로 보급되지 않음으로써 경제난에 시달렸다. 이 무렵 공산주의자들의 산악전이 시작되었고, 한편으로는 인종적 긴장 상태 및 민족주의가 성장하였다. 민중의 항의가 이어졌으며, 1945년 일본의 항복으로 독립을 쟁취했으나 영국이 재점령했다. 이에 민족주의가 더 크게 성장하기 시작했고, 독립을 위한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소말리아에 대하여

예로부터 소말리아는 고대 세계 상업 중심지였다. 고대 이집트, 페니키아, 미케네에서 유향, 몰약, 향신료는 귀중품으로 여겨졌는데, 소말리아의 선원과 상인들은 교역을 통하여 이를 공급하였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고대 소말리아 땅에 고대 푼트 왕국이 있었다고 한다. 고대 푼트인들은 파라오 사후레 하트셉수트 시대에 이집트와 밀접한 관련을 맺었다. 소말리아에 있는 피라미드 건물, 신전, 돌로 지은 가옥도 이 시대의 것이라고 한다. 고전기에 사바 왕국과 경쟁하던 오포네(Opone), 모실론(Mosyllon), 말라오(Malao)같은 고대 도시국가와 파르티아, 악숨은 부유한 인도-그리스-로마간의 교역으로 소말리아에서 번성하였다.

소말리아에서 홍해 너머 아랍에서 이슬람이 발흥하면서 아라비아 반도에 살던 소말리아 상인, 선원, 거류민들이 점차 교역 상대인 아랍인 무슬림을 통하여 새 종교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이슬람이 발생하고 수백 년 동안 이슬람 세계에서 소말리아로 무슬림이 이주하고, 이후 소말리아의 무슬림 학자가 소말리아 사람을 평화적으로 개종시키면서, 고대 도시국가는 이슬람화되어 베르베리(Berberi) 문명의 일부를 이룬 모가디슈 ,베르베라, 제일라, 바라와, 메르카가 되었다. 모가디슈 시는 "이슬람의 도시"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수백 년간 동아프리카의 황금 무역을 장악하였다. 중세 시대에 여러 강력한 소말리아 제국들은 지역 교역을 지배하였는데, 수로 공학 요새 건축이 뛰어났던 아주란 왕국(Ajuuraan State)  아흐메드 구레이(Ahmed Gurey) 장군이 에티오피아 제국을 정복하면서 아프리카에서 처음으로 대포를 쓴 바 있는 압달 술탄국, 소말리아인 술탄 아흐메드 유수프에 공물을 바쳐 라무(Lamu) 시 북쪽 오마니 제국을 군사적으로 지배한 겔레디 술탄국 등이 바로 그러하였다. 19세기 말 베를린 회의가 끝나자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은 아프리카의 뿔로 항해하여 군대를 이끌고 왔다. 소말리아에 제국주의의 기운이 엄습하면서 데르비시 지도자 무함마드 압둘라 하산은 위기를 느끼고 아프리카의 뿔 지역의 소말리아 병사를 모아 기나긴 반식민 투쟁을 전개하였다.

소말리아는 공식적으로 식민지화된 적이 없다. 데르비시 국가는 대영 제국을 네 번이나 격퇴하여 해안 지역에서 철수하게 하였다. 데르비시 국가는 중동 유럽에서 명성을 얻어 오스만 제국 독일 제국의 동맹이 되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중 아프리카 대륙에서 유일하게 독립한 무슬림 국가로 남았다. 영국이 만(灣)을 점령한 지 25년 만에 1920년 영국이 아프리카에서 최초로 비행기를 이용하여 데르비시의 수도 탈레흐(Taleh) 폭격하여 결국 데르비쉬를 패퇴시켰다. 이 폭격으로 과거 데르비시 영토는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다. 이탈리아도 영국처럼 소말리아 술탄과 군대의 저항에 부딪혔는데 1927년 말 파쇼 정권이 집권하고 나서야 오늘날 소말리아 땅의 일부 지역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의 점령은 1941년까지 지속되었으며, 이후 영국의 군정하로 넘어갔다. 남부 소말리아가 신탁 통치를 받을 때 북부 소말리아 보호령 상태였다. 1960년 두 지역이 통합하여 소말리아 민주 공화국이 탄생하였다.

1960년 영국 이탈리아로부터 독립하였다. 하지만 1991년 내전 때문에 혼란이 발생하였고, 아프리카에서 가장 못 사는 나라가 되었으며 유엔 평화 유지군이 파견되기도 하였다. 1993년 대한민국이 평화유지군 파병으로 소말리아를 지원해 준 적도 있었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북부는 소말릴란드가 독립을 원하고 있으나, 국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또한 현재 유일한 합법 정권인 과도 정부와 반군 세력의 대립이 계속되고 있다.

2012년 8월 20일 과도 정부 체제를 끝내고 헌법과 의회제도를 도입하여 소말리아 연방 공화국으로 출범하였고, 9월 10일 하산 셰흐 마하무드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어 9월 16일 공식 취임하였다.

김정일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이다. 본관은 전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의 위원장이었으며 김일성과 김정숙 사이의 첫째 아들이다.


2011년 12월 17일에 급성 심근경색으로 사망한 그는 어린 시절 한국 전쟁 당시 평양을 떠나 간도 지역으로 은신하였으나 중국인민지원군의 참전으로 귀환했다. 김일성종합대학 정치경제학과를 졸업하였으며 1961년 7월 22일 조선로동당에 입당한 이후부터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과 비서 등에 임명되었다. 1970년대부터 김일성의 후계자로 주목되었으며 1980년 제6차 당 대회를 통해서 공식적인 후계자가 되었다. 1994년 김일성 국가 주석의 사망 이후에 권력을 세습해 공화국의 실권을 잡아 통치자가 되었고 경제적 상황이 매우 좋지 않았던 1993년부터 6년 동안 이른바 고난의 행군 시기를 거치면서 재정낭비 등으로 무능력한 지도자로 비판받았다. 김정일의 후계 자리는 왕정과 같이 그의 셋째 아들인 김정은에게 세습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조선로동당 총비서이시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위원장이시며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이신 우리 당과 우리 인민의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동지"(줄여서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동지")로 불렸다. 2012년 4월 11일 조선로동당 당대표자회의에서 조선로동당의 영원한 총비서로 추대되었으며 2012년 4월 13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제12기 제5차 회의에서 영원한 국방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김정일은 1954년 9월 평양제1중학교에 입학하여 1957년 8월 중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56년 5월에는 제1차5개년계획의 전망에 대한 사대주의, 교조주의에 물젖은 어느 노동당 간부를 강연에서 논박하기도 했다 한다. 1955년 4월 만경대와 칠골혁명사적지 참관을 조직하고 1956년 6월 5-14일에는 평양제1중학교 혁명전적지들에 대한 답사행군을 하였다. 그 뒤 1957년 9월 1일부터 평양제1중학교 고급반에 진학하여  1960년 평양남산고급중학교를 졸업했다. 남산고급중학교 재학 중에 이 학교의 교사로 재직함과 동시에, 교내 민주청년동맹 부위원장으로 활동했다. 1958년 6월 27일에는 종파주의자를 뿌리뽑자는 취지의 학교민청총회를 소집하기도 하였다. 이 시절의 김정일은 감수성이 풍부했고 감정적이었다고 한다.

고급반을 졸업한 1960년 9월부터는 김일성종합대학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하고, 1964년 4월에 졸업하였다. 젊은 시절에 그의 관심거리는 음악, 농업, 그리고 자동차 수리였다. 그는 학술 경쟁과 세미나를 조직하였을 뿐 아니라 야외 연구여행을 도와주기도 했다. 독서에 취미를 붙여 김일성의 고전적 로작들과 마르크스-레닌주의 저서들을 탐독하고 기계공학과 농학, 축산학과 같은 전문기술분야의 책들, 사회과학과 문학예술 분야의 책들을 읽기도 했다 한다.


김정일은 1957년 평양제1중학교를 졸업하고, 남산고급중학교를 거쳐 1963년 김일성종합대학에서 정치경제학과를 공부한 다음 문학, 교육, 예술, 언론 개혁, 그리고 천리마운동에 대해서 보다 과학적인 방법들을 주장 하였다고 한다. 감수성이 예민했던 그는 문학과 시에 빠지기도 했고, 다양한 책을 탐독하기도 했다. 또한 김일성  공산주의 사상을 찬양하는 시와 산문을 짓기도 했고, 가곡도 몇 편 작곡하기도 했으며, 직접 영화 대본과 희극 대본을 쓰기도 했다.

대학 재학 중 그는 소련 폴란드, 동독, 중화인민공화국 등을 두루 여행하였고, 비공식적으로는 미국 프랑스의 여행을 다니기도 했다.

조선로동당 활동

1969년 9월 조선로동당 조직지도부 부부장 및 선전선동부 부장을 지냈다. 이후 중앙당 문화예술부장, 중앙당 조직 및 선전비서, 정치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1972년 10월 조선로동당 당중앙위원회 제5기 제5차전원회의에서 당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73년 9월 조선로동당 당중앙위원회 제5기 제7차전원회의에서 당중앙위원회 비서로 선출되었다. 1974년 2월 당중앙위원회 제5기 제8차전원회의에서는 당 중앙위원회 비서에 유임되고, 겸임 당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86년 12월 29일 최고인민회의 특별회의에서 당 정치국 상무위원 겸 비서에 유임되었다.


김정일은 천리마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경제성장 운동에 동참했다. 1973년부터 전개된 3대혁명 소조운동을 조직, 직접 지도하였고 1970년대 말부터 3대 붉은 기 쟁취 운동을 벌여 근로자의 노동 능률을 높이는 데 노력했으며, 1980년 10월에 열린 조선노동당 제6차 당대회에서 후계자로서 지위가 확정되었다. 이 대회에서 김정일은 최초로 대중 앞에 자신의 모습을 공개적으로 드러냈다.1980년 10월 조선로동당 제6차대회에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 당 중앙위원회 비서,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82년 2월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제7기 대의원에 선출되었고, 이후 최고인민회의 제8기, 제9기, 제10기, 제11기 대의원에 연임되었다.

1984년 5월 18일에는 로작 남조선인민들의 반미자주화투쟁은 높은 단계의 애국투쟁이다를 발표하였다.


1994년 그의 아버지인 김일성이 사망하자 3년간의 유훈통치를 발표하였으나 사실상의 통치권자가 되었다. 김일성을 공화국의 영원한 주석으로 추대하면서 사실상 국가주석직을 폐지하고, 명목상의 국가원수직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맡게 하되, 김정일 본인은 군사권을 장악한 국방위원장으로 실권을 행사하였으며 2009년 4월 9일에야 헌법을 고쳐 헌법상의 국가원수에 취임하였다.

1990년 베를린 장벽 붕괴와 1992년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를 목격한 그는 개방정책을 추진하기도 했다. 나진·선봉의 무역지구를 대폭 확대하였고, 개성직할시 내의 개성공단, 함경남도 원산 등의 무역항을 재정비하고 국외 상인들의 출입을 허용했다. 1998년 이후에는 중국 경제 특구제를 도입하여, 4개의 경제특구를 지정하였다. 사상적으로는, '주체사상의 최종적인 해석권은 수령과 그 계승자에게 있다는 정치적 특권'을 강조하여, 국가지도자 한 사람에게 불법적인 권력이 집중되는 북한의 현 제도를 이론적으로 확립시켰다.

1997년 6월 김정일은 일꾼들에게 '여운형선생 서거 50돐이 되는 계기에 모란봉극장에서 추모회를 조직하는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1997년 10월 조선로동당 총비서에 선출되었다. 1998년 11월 현대그룹 정주영 명예회장과 평양에서 회담을 가졌다. 1999년 1월초에는 신년사에서 새해를 '민족의 자주와 대단결의 해'라고 선언하였다.


김정일은 비날론, 주철, 옷감 등 산업현장을 시찰, 방문하여 직접 지도하였다. 1980년대에는 '남포갑문' 개발 사업을 직접 진두지휘하기도 했는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이를 그의 큰 치적으로 본다. 2009년 2월 21일 함경북도 김책제철연합기업소를 시찰하였고 2월 22일 함북의 7월7일연합기업소를 현지지도하였다.

2010년 3월 14일 북한노동당 황해북도위원회 책임비서 최룡해,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장 김경희장성택, 조선로동당 제1부부장 리제강리재일을 대동하고 새해영농전투에 진입한 사리원시 3중3대혁명붉은기 미곡협동농장을 현지지도하였다. 김정일은 먼저 농장책임일군들의 안내를 받아 새로 개건된 혁명사적관 우렝이양식장 등을 돌아본 뒤 '강성대국의 대문을 열어제끼는데서 가장 중요한 문제의 하나는 농업생산을 늘이는것이라고 하시면서 농장앞에 나서는 강령적인 과업들을 제시하시였다. 이어 그는 미곡협동농장에서 최근년간 농업생산을 급격히 늘일수 있은 기본요인은 종자혁명방침을 철저히 관철한데 있다고 하면서 일군들과 농업근로자들의 창발성을 적극 발양시켜 농장의 기후풍토에 맞는 우량품종을 도입하기 위한 사업을 계속 힘있게 추진시켜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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